설교/요한복음

생명의 떡 예수님

이창무 2021. 5. 9.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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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9 강  / 이창무

생명의 떡 예수님

말씀 / 요한복음 6:22-40
요절 / 요한복음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월부터 지금까지 매주 진행해 오고 있는 교회사 특강에서 배운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혹시 교회가 가난해서, 박해 때문에, 순교 때문에 기독교가 사라졌다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 동안 교회는 돈 때문에 무너졌고, 권력 때문에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아니라 사람과 교회의 이름이 더 유명해졌을 때 교회가 무너졌습니다. 썩을 양식을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을 때, 그래서 물질적인 번영을 영적인 축복과 동일시할 때 교회는 무너지고 신앙은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과거의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나를 살리고 교회를 살릴 수 있는 참된 양식이 무엇인가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과 한밤 중에 물 위로 제자들에게 걸어오신 사건이 벌어졌던 그 다음날이었습니다. 무리들은 하나뿐인 배를 제자들이 타고 가버나움을 향해 떠났고, 그 배에는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22). 그런데 이상하게 예수님이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무리들은 급하게 배를 구해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24).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그곳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무리들은 반갑고 인사를 했습니다.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25)?” 이 무리들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마치 아이돌 그룹을 따라다니는 팬들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만나려는 소원이 참 대단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팬 사인회를 여시고, 선물도 나눠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

예수님의 반응이 의외로 냉랭합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간절히 찾고 구하는 것 자체를 나무라신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의 동기가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표적을 본 까닭으로 찾기를 기대하셨습니다. 무리들이 오병이어 사건이라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이 진정 누구신가를 발견하고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표적의 의미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끊임없이 계속 나오는 떡과 물고기에 매료되었습니다. 이 예수님만 내 곁에 계시면 평생 굶을 일은 없을 것 같았습니다. 떡을 먹고 배부른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사실 먹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 중에 일부입니다. 먹어야만 생명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거식증에 걸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류 멸망은 시간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먹고 배부르고자 하는 욕망 자체를 부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욕망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고 집어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식탐만이 아니라 떡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소유욕 전반이 문제입니다. 물질에 대한 소유욕이 얼마나 강력합니까? 알면 알수록 점점 무서워집니다. 부유층의 비밀 재산을 신탁 관리해 주는 회사에서 일하시던 제 경영학과 선배 한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자기 회사에 방음실이 있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어떤 부자가 죽으면 그 자녀들을 방음실로 불러 남은 재산 규모를 알려주고 어떻게 처분할 지 합의를 해달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직원이 나간 후 두 시간 정도 지나면 다들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때로는 옷이 찢어진 모습으로 방을 나온다고 합니다. 그 순간 대기하고 있던 변호사 사무실 직원들이 달려들어 우리에게 소송을 맡겨 달라고 로비를 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물질 앞에서는 가족 간의 우애나 사랑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사례가 우리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납니다. 사람이 소유욕에 사로 잡히면 다른 사람들이 살든지 죽든지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더 많은 것을 독점하려고 합니다. 한쪽에서는 너무 많이 먹어 다이어트가 고민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직도 굶어 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 세계 상위 1%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세계 인구의 90%인 69억 명이 가진 재산의 2배가 넘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제가 어렸을 때를 생각해 보면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소유에 대한 기대 수준, 요구 수준은 그보다 훨씬 더 높게 상승했기 때문에 해가 갈수록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전공, 직업, 결혼 등등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돈이 선택의 기준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물질의 위력 앞에서 다른 모든 가치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27)”

예수님은 먼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썩을 양식이란 먹고 배부른 육의 양식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이 세상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신앙 생활이나 열심히 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육의 양식을 얻기 위한 노동의 가치를 부정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살전3:10)”고 합니다. 주목할 곳은 “위하여”라는 말입니다. 즉 육의 양식이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국 육의 양식은 썩어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의 양식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이런 육의 양식이 우리 삶의 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물질을 목적으로 삼고 산 사람의 종착지는 정해져 있습니다. 물질을 잃음과 동시에 삶의 의미도 존재 이유도 함께 다 잃어버리고 맙니다. 물질이 전부인 줄 알았던 사람은 결코 물질로 채울 수 없는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깊은 허무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육의 양식 대신 무엇을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까? 예수님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십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란 영원히 그 가치가 사라지지 않을 영의 양식을 가리킵니다. 육의 양식을 공급받지 못하면 점점 약해지다가 병들거나 죽을 수 있는 것처럼 영의 양식을 공급받지 못하면 영혼이 병들거나 죽습니다. 밥을 먹고 나면 배부른 것처럼 영의 양식을 먹어야만 얻을 수 있는 만족과 행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항상 영의 양식이 먼저입니다. 왜냐하면 영의 양식을 먹지 않고 육의 양식에만 집착하게 되면 그것이 살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의 삶까지 파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28)” 이 질문은 누가복음 10장 25절에서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했던 질문과 유사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무리들은 예수님에게서 어떤 율법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서 나온 답변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29)”

우리말 성경에는 그 차이가 나타나 있지 않지만 원어를 보면 무리들은 하나님의 일들, 곧 복수로 질문을 했습니다. 영원한 양식을 얻으려면 많은 일들을 해야 하는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 단수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믿는 일, 이 한 가지 밖에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리들은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 주시기를 기대했는데 예수님은 그냥 믿기만 하라 하시니 상당히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마치 허경영의 ‘Call me’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들렸을 지 모릅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 눈을 바라봐 넌 행복해지고 / 내 눈을 바라봐 넌 건강해지고 / 허경영을 불러봐 넌 웃을 수 있고 / 허경영을 불러봐 넌 시험 합격해”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주문을 외우듯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떡이 나오고 밥이 나온다는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인격적인 신뢰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예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성 위에 서있는 사람에게 영생의 양식이 선물로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육의 양식과 영의 양식은 썩느냐? 썩지 않느냐? 하는 질적인 차이가 있을 뿐더러, 이렇게 얻는 방법에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육의 양식은 일한 만큼 받습니다. 적게 일한 사람은 적게 받고, 많이 일한 사람은 많이 받습니다. 하지만 영의 양식은 다릅니다. “적게 일했느냐? 많게 일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영생의 양식을 주시는 예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느냐? 그릇된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무리들은 예수님을 찾으러 이리저리 다니느라고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계속 떡만 내 놓으라 하고 있으니 영생의 양식을 받아 누릴 수 없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신뢰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영생의 양식이 주어집니다. 그에게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 주는 만족과 기쁨이 있습니다. 허무가 사라지고 대신 생명의 충만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남들과 비교하여 더 적게 가졌고 더 작은 집에 살고 더 작은 차를 타고 다녀도, 얼마든지 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가진 것이 별로 없어도 지금까지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동기들이 나보다 엄청 잘 나간다는 소리를 들어도 잠깐 배가 아팠을 뿐, 그들의 삶을 부러워하거나 동경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최근 물질주의의 거센 파도가 연이어 계속 밀려 들어오면서 우리도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차피 캠퍼스 양들이 없으니 하나님의 일을 하려 해도 할 것도 없고, 내 재산을 증식하는 일에만 골몰해지기 쉽습니다. 이러다 아들 딸 시집 장가 갈 때 집 한 채 장만해 주는 것을 우리 인생의 목적으로 삼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말씀하십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양 치는 것만이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무슨 직분을 맡아야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하셨습니다. 양이 없어도 직분이 없어도,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예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믿음의 통로를 타고 하늘의 양식, 생명의 양식, 영의 양식이 더욱 풍성하게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시대의 분위기에 편승해서 흔들릴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추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예수님에게 우리가 당신을 믿을 수 있게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30). 그들은 이미 예수님에게서 많은 표적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또 무슨 표적을 원하는 것입니까? 무리들은 구체적으로 모세처럼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달라고 했습니다(31). 무리들의 일관성 하나만큼은 참 대단합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 떡을 먹고 배부르게 해 달라 요구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만나에 관한 그들의 오해를 몇 가지 바로잡아 주십니다.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32).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주신 것이지 모세를 의지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만나를 먹는다고 영생하지 않습니다. 만나 역시 그 자체는 썩을 양식입니다. 그렇다면 썩지 않을 양식,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참 떡은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니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

드디어 생명의 떡의 정체가 밝혀 집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을 나누어 주시는 분일 뿐만 아니라 생명의 떡 그 자체이십니다. 이 예수님께 오는 자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매우 추상적이고 뜬구름 잡는 말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 믿는다고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사실 이 질문은 제 어머니께서 예수님을 믿기 전에 저에게 수도 없이 하셨던 질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어떤 사람은 먹고 살기가 얼마나 힘든데 이런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사람을 현혹시키려 하느냐고 공격할 지 모릅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가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외면하게 하고 관념의 세계로 도피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지 않냐며 비난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칼 마르크스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래 생명이라는 것은 말로 다 납득시키고 이해시키기 불가능한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얼마 전 디즈니에서 나온 소울이란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 중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인간의 영혼들 중에 문제아 중의 문제아로, 수천 년 동안 지구로 내려가는 것을 계속 거부하고 있는 22호이라는 영혼이 나옵니다. 그는 태어나면 뭐하냐며 모든 일에 다 시큰둥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조’라는 피아니스트의 몸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에게 특별하거나 거창한 일들이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조의 몸을 통해 이것저것을 맛보고 만지고 듣고 보고 느끼는 경험을 하면서 비로서 삶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한때 자신의 멘토였던 마더 테레사도, 링컨도, 코페르니쿠스도 찾아주지 못한 생명의 불꽃을 22호는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찾습니다. 생명이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을 맛보고 경험해 본 사람은 예수님이 결코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절로 다 알게 됩니다. 구구절절이 다 사실 그대로를 가감 없이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배고픔을 느끼고 목마름을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영적인 생명이 있으면 예수님을 향한 굶주림, 예수님을 향한 목마름을 느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간절히 찾게 되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집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를 하고 나면 이상하게도 맛있게 밥 먹고 배부를 때처럼 만족감과 행복이 찾아옵니다. 결국 썩어질 양식이 주는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 없이는 내가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 없이 살 수 없네”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해” “주 사랑이 나를 숨쉬게 해” 라고 노래하며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정말 나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심을 믿으십니까? 예수님께로 가면 결코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는 것을 믿습니까? 나는 정말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사람입니까?

이 질문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 맞는 말 같은데 왜 나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을까? 이런 고백을 확신 있게 할 수 없을까? 고민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신앙 생활하는 것은 참 고역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 생활이 따분하고 피곤한 일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으로 굶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런 일이 나에게 가능합니까? 예수님이 이미 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로 오기만 하면 됩니다. 너무 단순하고 쉬워 보입니다. 하지만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믿음은 오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예수님에게로 중심이 이동하는 것입니다. 나를 의지하던 삶에서 나의 무능을 인정하는 삶으로 이동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세상으로 주리지 않고 예수님으로 주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목마르지 않고 예수님으로 목마른 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눈앞에서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는 것 같은 놀라운 기적으로 문제가 해결되고 내가 바라던 것을 손에 쥐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36)”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은 왜 보고도 믿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지 않고 자기들의 욕망을 투사해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몸만 예수님께 나아왔지 마음은 나아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에게서 생명의 떡을 받아 누리게 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37)”

예수님은 분명히 앞에서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고 구하고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번에는 하나님이 보내 주셔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반응 사이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먼저 은혜를 주셔야 하고, 우리가 그 은혜에 반응해야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겸손하게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는 결코 내쫓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가 니고데모이든 사마리아 여인이든 38년된 병자든 누구든지 나는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두 손 들고 주님께 나아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 받아주실 것입니다. 그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마지막 날에 다 살려주실 것입니다(39,40). 죽음 이후 미래의 부활과 영생까지도 다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초청장입니까? 얼마나 분에 넘치는 은혜입니까? 먼저 예수님을 찾고 구하는 자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시겠다는 약속, 입을 것과 먹고 마실 것을 다 챙겨 주시겠다는 약속, 단 한 명도 잃지 않고 그 죽은 몸까지 다시 살리시겠다는 약속, 그 약속을 믿고 기대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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