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시는 예수님

이창무 2021. 5. 16.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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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10 강  / 이창무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시는 예수님

말씀 / 요한복음 7:1-24
요절 / 요한복음 7: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투자 전략에 대해서 두 가지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하나는 "무릎에서 사서 어깨에서 팔아라.”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소문에 사서 뉴스에 팔아라”입니다. 앞에 것은 때를 분별하라는 것이고, 뒤의 것은 사람들의 말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투자 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도 이 두 가지를 분별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때와 말을 옳게 분별하기만 한다면 우리 인생도 흑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바로 오늘 말씀 가운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때와 말을 분별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때는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 때였습니다(2). 조상들이 출애굽한 이후에 광야에서 초막(텐트)을 치고 살았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기 때문에 “초막절”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초막절이 가까워지면 모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갈릴리에 머무르시고 유대로 가려 하지 않으셨습니다(1).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정을 전혀 모르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찾아와 말했습니다.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3,4)”

형제들의 제안은 이런 뜻입니다. “형님, 좀 더 큰 물에서 노십시오. 형님 정도면 중앙에서 통합니다. 중앙에서 이름을 날리면 갈릴리에서는 그냥 먹힌다니까요? 지금 뭐 하십니까?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죠.” 겉으로 보면 형님을 끔찍하게 위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들의 본심은 “나도 형님 덕을 좀 보고 살자.”였습니다. 내가 뜨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내 능력으로는 이번 생은 이미 틀린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능력 많은 우리 형님이라면 얼마든지 뜰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이 뜨고 나면 동생들도 한 자리 챙겨 주실 것 같았습니다. 이러면 형님 좋고 아우 좋고 둘 다 좋은 아니겠습니까?

이때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6)”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 때’는 항상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때를 가리킵니다. 십자가 사건의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는 때가 언제일까요? 예수님의 시간표에는 그 시점이 유월절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상 죄를 대속하는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초막절입니다. 유월절이 오려면 아직은 6개월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철저히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고자 하셨습니다.

반면, 형제들의 때는 늘 준비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까? 자신을 세상에 나타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내가 뜰 수 있는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오케이 입니다. “지금이 하나님의 때인가? 아닌가?” 여부는 그들에게 전혀 고려 사항이 아닙니다. 이런 형제들에 대해 저자 요한은 이런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5)”

형제들이 예수님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전적으로 믿고 있는 않아요? 그런데 왜 그들이 믿지 않았다고 말할까요? 여기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믿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처럼 출세와 성공에 대한 목마름으로 움직이는 분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여 세상을 구원하려 하신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고맙다 아우들아. 내 생각 해주는 건 너희들 밖에 없구나.” 하시면서 형제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세상에서 이름을 내는 것이 크게 어렵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변방 갈릴리 출신으로 자수 성가한 위대한 랍비로 명성을 얻으셨을 것입니다. 병든 사람, 귀신 들린 사람들을 데리고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예수님의 집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유명인사가 되어 로마 총독이 주최하는 만찬에 초대받아 건배하시는 장면이 뉴스에도 나왔을 것입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이러면 좀 안 되나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7)”

세상에서 뜨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의 비위를 맞추어 주고 세상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말만 골라서 해 주어야 합니다. “당신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 당신들의 생각이 다 옳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이 내키는 대로 다 해라. 무조건 당신의 최고다.” 이런 말을 해야 사랑을 받고 예쁨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실제로 악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가치 중립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께 반역하고 죄를 정당화시키고 있는 완악한 세상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늘 이런 세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셨습니다. 이 세상의 악을 눈감아 주거나 그것과 타협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여기서 오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을까요? 그러니 형제들의 말이 예수님께 처음에 달콤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 속에서 오래 전 마귀에게서 들었던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내게 주리라”는 속삭임을 있다는 것을 간파하시고 함께 올라가기를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8).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기를 원합니까? 그런 욕망들이 집약되어 표출되는 곳이 바로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입니다. 사람들은 SNS를 통해서 자신의 생각이나 활동을 적극적으로 드러냅니다. “좋아요”와 “구독자” 수를 올리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최대한 멋진 사진이나 영상을 연출해서 올려야 합니다. 유튜브에서는 소위 말하는 “말빨”도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얻는데 성공하면 그때부터 힘이 생깁니다. 여론을 좌지우지하기도 하고 유행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그런 힘을 가진 사람들을 “인플루언서(influencer)”라고 부릅니다. 인플루언서가 되면 인기와 명성 뿐만 아니라 돈이 뒤따라옵니다. 협찬을 받기도 하고 광고 수익으로 수십 억원 대의 수입을 올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에서 모두가 우러러보는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자기를 세상에 나타내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세상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아무리 진실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싫어할 말은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대중의 기호에 민감해지는 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는 무관심해집니다. 세상의 흐름은 잘 타지만, 하나님의 때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시고 하나님의 때를 따라 움직이셨습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거짓의 사람이 되지 않고 진실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이 말은 너무 달콤하지만, 사실은 마귀의 유혹입니다. 이런 목소리가 밖에서든 안에서든 들리면 딱 세 글자로 답해 주면 됩니다. “됐거든” 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 없이 높이 올라가고자 했던 바벨탑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는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낮은 자리로 내려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인기와 명성이라는 바벨탑이 아니라 예수님의 뒤를 따라 십자가에 오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진정한 영광을 누리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형제들의 청을 거절하신 후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10)”

예수님은 결국 명절 중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형제님들이 제안한 대로 세상에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셨다는 말씀 속에 이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올라가신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14)”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체포될 위험을 무릎 쓴 행동이었습니다. 말씀을 전파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열정은 정말 아무도 말릴 수가 없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무리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15)”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구약 성경을 읽을 수 있으려면 일반적으로 따로 정규 랍비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그런 과정을 밟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막힘이 없이 구약 성경을 인용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게다가 그 가르침에 놀라운 통찰력과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이상하다고 여길 만도 했습니다. 그들은 누구에게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예수님이 임의로, 독창적으로 가르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나의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16)”

예수님은 내 교훈은 나의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내 맘대로 내 생각대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것, 곧 하나님의 것을 그대로 받아 전달하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랍비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자의로 말씀하시는 지,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하시는 지 누가 알 수 있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17,18)”

만약 누군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는 예수님과 이심전심으로 마음이 통하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교훈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얕잡아보고 무시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정규 코스를 밟지 않았다. 예수님의 표현이 다른 랍비들과 달리 세련되어 있지 못하다.” 등등의 이유로 예수님의 교훈을 비판했습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에 무슨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들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 그 자체를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대신 자기 영광을 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교훈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말씀이 귓가에서만 맴돌 뿐 그들의 마음에 어떤 울림도 일으킬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말씀이 내게 잘 와 닿지 않을 때 주로 그 원인을 어디에서 찾습니까? 성경 그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신자일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대개 메신저에게서 그 원인을 찾습니다. “메신저가 깊이가 없다. 전달력이 떨어진다. 지루하고 재미 없다. 메신저의 준비가 부실하다.” 등등입니다.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사실 완벽한 메신저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모로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메신저가 서툴다 하더라도 메시지의 내용 대부분은 성경에서 온 것입니다. 성경을 싹 무시하고 자기 말만 하는 설교자가 있기는 하지만, 많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말씀에서 은혜를 못 받고 주된 이유는 메신저나 메시지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이 없이 듣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나를 판단하게 해야 하는데 내가 말씀을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메시지를 전하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려 하니 자기 변명처럼 들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은 제 자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번에 선교사 수양회 메시지를 섬기며 어느새 평론가처럼 메시지를 듣고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것은 아니다 싶어 순종하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들으니 하나하나가 그렇게 은혜로울 수 없었습니다. 분명히 똑같은 메시지인데 전혀 다르게 들렸습니다. 결국 메시지가 아니라 제 마음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한 말씀 한 말씀이 우리 안에서 힘있게 역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어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고 있는지 사례 하나를 제시하셨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뜻이 담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율법을 지키지는 않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도 십계명 중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고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19)? 

예수님의 혐의는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쳐 줌으로 안식일법을 어겼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모순되는지 할례를 예로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22-23). 할례는 아기가 태어난 후 8일쨰 되는 날에 주도록 되어 있는데 마침 그 날이 안식일이면 어떻게 합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그런 경우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할례를 시행했습니다. 할례는 일종의 외과 수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일이 의료 행위라서 위법이라면, 안식일에 행해지는 할례도 똑같이 위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이를 위법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일차적으로 시간 상 안식일법보다 할례에 관한 법이 먼저 나왔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할례를 받아야만 온전한 한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한 사람이 태어난 것은 생물학적으로 태어난 것이고 할례를 받은 후부터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삶이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38년 동안이나 병을 앓으며 온전하지 못했던 한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할례가 부분적으로 사람을 온전하게 한다면 예수님은 한 사람의 전신을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이 이것을 문제 삼는다면, 스스로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 아닙니까? 누가 이 예수님의 지혜로운 말씀에 반박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지금까지 하신 말씀의 결론이자 마지막 당부를 다음과 같이 주셨습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24)”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가지 말을 듣습니다. 그 다음 그 말에 대한 판단을 해야만 합니다. “이 말은 참일까? 아니면 거짓일까?” “이 말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나? 아니면 가볍게 무시해도 되나?” “이 말을 따를까? 아니면 거절할까?” 이런 중요한 판단을 수시로 합니다. 이때 사람들은 주로 어떤 기준을 가지고 판단합니까? 

말 그대로 외모가 중요한 요소로 작동합니다. 일단 잘 생기고 핸섬한 송중기 같은 사람이 말하면 다 맞는 말처럼 들립니다. 똑 같은 말을 해도 못 생긴 사람이 말하면 잘 귀를 기울여 주지 않습니다. 스펙도 중요합니다. 학벌과 경력이 화려한 사람이 말하면 신뢰성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학벌이나 경력이 변변치 않은 사람의 말은 쉽게 무시를 당합니다. 인기가 좋고 지명도가 높은 사람의 말은 잘 먹힙니다. 그러나 무명인 사람은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듣는 이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가진 권력입니다. 힘 있는 사람이 말하면 껌뻑 죽습니다. 하지만 힘 없는 사람이 말해봐야 “귀찮게 하지 마라. 조용히 해라.”라는 반응만 돌아올 뿐입니다. 이런 것이 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외모라는 기준입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이나 예루살렘에 모였던 무리들이 가진 기준이 바로 이 외모라는 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외모가 아니라 공의로 판단하라고 하십니다. 무엇이 공의로 판단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이미 앞에서 공의로운 판단의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첫째 기준은 “보내신 분의 말씀을 전하는가? 자기 말을 하는가?” 입니다. 자기 생각, 자기 확신이 지나치게 강한 사람의 말을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왜곡하거나 변질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들려주는 말입니다.  

둘째 기준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가? 자기 영광을 구하는가?” 입니다. 아무리 “말빨”이 세고 그럴듯해도 자기 영광을 구하는 사람의 말은 걸러 들어야 합니다. 설령 좀 어눌하고 투박할지라도 사심이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셋째 기준은 “겉모습이 아니라 속 마음과 동기가 어떠한가?” 입니다. 우리는 외모에 너무 잘 속습니다. 믿는 사람마저도 때로는 지나치게 스펙을 따지는 모습을 보면 씁쓸해 지기도 합니다. 외모와 스펙만 믿었다가 발등 찍히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사람의 말을 판단함에 있어서 외적 조건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 그리고 내면의 동기입니다. 

정리하고 보니 이 세 가지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되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정하신 때를 물으시고 구하셨습니다. 그 때를 알았을 때 순종하셨습니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 말씀하신 대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우리도 “지금이 무엇을 할 때인가?” 때를 옳게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참된가? 거짓인가?”를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지혜도 생기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고 우리는 수많은 말들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삶으로 매일 매일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예수님의 말씀이 이끄는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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