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이창무 2021. 5. 2.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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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8 강 / 이창무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말씀 / 요한복음 6:1-21
요절 / 요한복음 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현실 인식과 관련하여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합리주의자이고 다른 하나는 경험주의자입니다. 합리주의자는 사고로 추론하고 계산하여 답을 찾습니다. 경험주의자는 몸으로 부딪쳐 가면서 답을 찾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합리주의자 빌립과 경험주의자 안드레가 등장합니다. 두 사람이 출발점은 서로 달랐지만, 같은 결론은 도달합니다. 그러나 이 결론은 곧 예수님에 의해 뒤집어집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합리주의입니까? 경험주의자입니까? 둘 다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무엇보다 예수님의 자비와 능력을 신뢰하는 믿음주의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말씀이 우리를 믿음주의자의 길로 이끌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본문은 ‘그 후에’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1). 마가복음에 보면 여기서 ‘그 후’는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하고 돌아온 직후였습니다. 예수님은 고생한 제자들과 함께 잠깐의 휴가를 보내려고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마침 유월절이 가까운 때라 무리들은 예루살렘으로 향할 줄 알았습니다(4). 그러나 주님께서 병자들에게 행한 표적을 본 큰 무리가 해안길을 따라 예수님 일행을 뒤쫓아 달려왔습니다(2). 

이때 제자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화나고 짜증이 났습니다. “휴가지까지 따라오다니 해도 너무 한 것 아니야?”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예수님은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셨습니다(5a). 마가복음에 따르면 이 순간 예수님의 심정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당시 백성들에게 헤롯 왕이나 바리새인과 같은 명목 상의 목자는 있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정치 지도자들은 로마와 결탁하여 자기 배를 채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주의로 백성들의 삶을 옥죄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목자 없는 양무리들은 각자 자기 살 길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왜 이렇게 자신을 뒤쫓아왔는지 이해하셨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산 위에서 봄맞이 일일 수양회를 여셨습니다(3). 이 산은 현재 “골란 고원”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뾰족한 봉우리가 아니라 고지대 위에 넓은 풀밭이 펼쳐진 곳입니다. 야외 집회에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참석 인원 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수양회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 이어졌습니다. 어느새 서산으로 해가 지려 하고, 참석자들의 배꼽시계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습니다. 참 목자 예수님은 굶주린 양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친히 먹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6).

단, 그 전에 할 일이 있으셨습니다. 제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가진 믿음의 현주소를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빌립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5b)?” 이에 대한 빌립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7)” 예수님은 “어디서” 라고 물으셨는데, 빌립은 “얼마나”로 대답합니다. 빌립이 이렇게 대답한 까닭은 “얼마나”가 해결되지 않은 채 “어디서”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일단은 살 돈이 있어야 그 다음 어디서 살 지를 고민할 것 아닙니까?” 이런 뜻입니다. 당장 필요한 돈은 최소한 이백 데나리온이었습니다. 노동자의 8개월 치 일당에 해당합니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2,400만원 정도입니다. 만 명의 무리가 있었다 가정하면 일 인당 2,400원입니다. 2,400원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김밥 한 줄, 샌드위치 하나 정도일까요? 이렇게 겨우 허기를 달랠 정도만 목표로 한다 하더라도 2,400만원이라는 거금이 필요합니다. 제자들에게 이런 큰 돈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빌립의 결론은 “계산해 봤는데 답이 안 나옵니다.”였습니다. 빌립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마가복음에 보면 제자들이 다같이 나와서 이곳은 빈들이니 무리를 보내어 각자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자고 제안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누가 봐도 이것이 상식적인 판단이었고 최선의 대책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도 이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셨을까요? 시험을 잘 보려면 무엇보다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둘째 예림이에게 “어디서 먹을까?”라고 물을 때는 이미 제가 친히 사주겠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묻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아는 예림이는 음식 값이 얼마인지, 아빠 지갑에 그만한 돈이 들어 있는지 전혀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냥 “오늘은 마라탕!” 이렇게 단순하게 대답합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디서 떡을 사서 먹이겠느냐고 하실 때는 이 사람들을 먹여야 하겠다는 예수님의 의지가 질문 속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만약 먹이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왜 물으시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목자 없는 양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어떻게 하든 그들을 먹이고자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의지를 확인했으니 그 다음은 능력입니다. 예수님에게 무리를 먹일 만한 능력이 없을까요? 이제까지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왕의 신하의 아들을 원격으로 살리셨고, 38년 동안이나 누워 있는 병자를 한 마디 말씀으로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이 정도라면 만 명의 무리를 먹이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제까지 하신 모든 일이 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하신 일들인데, 이백 데나리온이 없는 것이 결정적인 장애물일 수 있을까요? 결국 빌립의 문제는 예수님의 마음도, 예수님의 의지도, 예수님의 능력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빌립이 계산은 참 잘 하는데 예수님이라는 결정적인 변수를 빼고 계산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오답을 내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이 사람들을 먹이려면 어디서 떡을 사야 하겠느냐고 물으실 때가 있습니다. “죽어가고 있는 저 캠퍼스 영혼들에게 어떻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할까?” “다음 세대를 먹일 교사 목자가 부족다고 하는데, 누가 그들의 목자가 되겠느냐?” “굶주리는 북한 사람들, 베네수엘라 사람들, 아프리카 사람들을 어떻게 먹일 수 있겠느냐?” 내 한 몸, 내 가족 챙기기에도 벅차다고 느끼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으로 시험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질문에 빌립처럼 답할 때가 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데 캠퍼스 전도가 되겠습니까?” “경제가 어렵고 취직이 바늘 구멍인데 제자 양성이 되겠습니까?” “북한은 늘 저 모양인데, 평화 통일 제사장 나라 무슨 꿈 같은 소리입니까?”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 봐도 답이 안 나옵니다.” 

이런 식이라면 사실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 따져보고 안전하게 살려고만 하면 도대체 믿음이 설 자리는 어디일까요? 계산해 보고 답이 없을 때는 모든 것을 주님께서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품에 나를 던지는 모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주의자의 길입니다.

상식에 기초하지 않은 신앙은 광신이나 맹신으로 흐릅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현실에 눈을 감으면 안 됩니다. 기본적인 합리성과 상식을 갖추지 못한 신앙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상식에만 머무르다 현실의 한계 속에 갇히게 된다면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나이게 새 출발을 하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이제까지 자식 하나 없던 사람에게 큰 민족이 나온다니! 현실적으로 실현가능성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상식을 깨고 현실을 뛰어넘었습니다. 만약 이것이 근거 없는 자기 확신이었다면 광신 또는 맹신으로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명령이자 약속이기에 상식과 계산보다 말씀을 더 신뢰하여 과감히 자신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만이 아닙니다. 고아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지 뮬러가 처음 고아원을 시작할 때는 접시 3개, 쟁반 28개, 물병 하나, 컵 하나, 칼과 포크 네 개, 강판 한 개가 가진 것의 전부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지 뮬러는 고아들의 향한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그 자비와 사랑 한 가지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고아들을 먹이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고아원을 운영하기 위해 정부의 힘을 빌리지도 않았고 부자에게 손을 내민 적도 없습니다. 다만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고 또 구했습니다. 그 결과 단 한 번도 고아들을 굶긴 적이 없이 신실하게 공급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조지 뮬러가 63년 동안 믿음과 기도로 받은 것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한화로 약 30억원 정도라고 합니다. 

우리 모임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후진국이었던 우리 나라에서 감히 선진국인 미국과 독일의 대학생들에게 말씀을 먹이겠다고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누구 봐도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이번 선교사 수양회에 북미, 남미,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아시아, 유럽, CIS 등 전 세계로부터 1,500명이 넘게 등록을 이미 마쳤습니다. 상식적 판단과 현실적 계산만 앞 세웠다면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빌립이 보여준 것과 같은 냉철한 현실 인식은 칭찬을 받을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또 하나의 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현실을 볼 때 지금 이곳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이 어떠하며 주님은 무엇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가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뜻과 계획이라는 변수를 항상 계산에 넣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와 예수님과 관계는 한 자리에 있어도 서로 다른 꿈을 꾸는 동상이몽의 관계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만 가지가 부족합니다. 가진 것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 사정을 다 아십니다. 다만 우리에게 한 가지를 원하십니다. 주님과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가지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도전하는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주님께서 친히 하시는 일에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동참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때 안드레가 불쑥 끼어들었습니다(8). 한 아이에게서 나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나왔습니다(9a). 어쩌라는 말입니까? 이것으로 만 명을 먹이려면 미분해서 분자 단위로 먹여야 될 것 같습니다. 안드레도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이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9b)?” 이 말 속에는 안드레의 복잡한 심정이 담겨 있습니다. 안드레는 빌립과 달리 예수님의 질문 중에 “어디서”라는 말에 꽂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디인가 잘 찾아보면 무슨 수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를 품었습니다. 무리들 사이로 이리 저리 휘젓고 다니며 “어디 먹을 것 가져온 사람 없습니까?” 라고 소리쳤습니다.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습니다. 딱 한 사람, 작은 소년 하나가 자신이 먹으려고 싸온 도시락에 담긴 오병이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안드레는 크게 실망하고 낙심했습니다. 그래도 일단 찾아보기라도 했다는 사실을 어필하고 싶어서인지 오병이어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애를 써 보기는 했는데 이것 밖에는 없네요. 아무래도 안 되겠지요?” 이것이 안드레의 결론이었습니다. 빌립이 계산에 근거해서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했다면, 안드레는 경험에 근거해서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경험에 근거한 결론이 더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은 안드레가 내놓은 오병이어를 출발점으로 삼아 자신의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무리들을 요회별로 앉도록 하셨습니다(10). 오병이어를 앞에 두고 감사 기도를 올리셨습니다(11a). 그리고 그 떡과 물고기를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11b). 이어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골란 고원 위에 무한 리필 무료 뷔페가 열렸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계속해서 떡과 물고기가 나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을 거두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11,12).

여기서 막연한 기대와 현실에 대한 절망감이 공존하던 안드레의 모습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그 동안 빌립 같은 합리주의자는 우리 모임 가운데 그다지 인정을 받기가 쉽지 않은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안드레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름을 보면 딱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안드레라는 이름을 가진 분들은 꽤 있습니다. 하지만 빌립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은 찾아 보기 힘듭니다. 가끔 있긴 하지만 그 빌립은 제자 빌립이 아니라 사도행전에 나오는 전도자 빌립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안드레처럼 “일단 가진 것을 찾아보자” “주님께 진심을 드리자”는 정신이 있습니다. 구체적인 해결책은 안 보여도 막연히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일단은 이리저리 찾아보고 발로 뛰어다녔습니다.

그렇게 발로 뛴 결과 냉엄한 현실을 온 몸으로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실의 벽이 이 정도까지 없을 줄 몰랐는데 너무 힘들구나.”하는 결론에 도달하곤 합니다. 그래서인지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점점 더 부정적인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한 때 믿음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사람도 이제는 “어차피 안 될 일 가지고 무리하지 맙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상식의 한계에 갇힌 불신앙도 불신앙이지만, 경험의 한계에 갇힌 불신앙도 불신앙이기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에게는 불신앙을 뚫고 오병이어를 들고 주님께 나아가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렇게 고백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주님! 제가 최선을 다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찾았습니다. 이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받아 주시옵소서. 주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입니다.” 

지난 주 예배부터 장장군, 장사라 목자님 가정의 찬양 인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진기도 사모님으로부터 릴레이 특송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특송 뒤에는 서바나나 목자님이 계십니다. 반주도 직접 만드시고 카메라도 여러 대 동원하시고 영상 편집까지 온 맘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이것이 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오병이어입니다. 주님께서 이 오병이어를 축복해 주셔서 예배가 아주 풍성해졌습니다.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진 것에 의지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가지신 것에 의지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요 참여입니다. 우리는 다만 오병이어를 들고 주님께 나아가 주께서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14)” 그 선지자란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했습니다(15a). 예수님이 못 이기는 척 따라가시면 압도적인 지지율로 대권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좋은 일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이렇게 무리의 요구에 끌려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정치 문제, 경제 문제를 해결해 줄 영웅은 될 수 있을지 언정 죄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줄 참된 그리스도가 되실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를 피해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습니다(15b).

이때 제자들은 따로 배를 타고 바다 건너 편 가버나움으로 향했습니다(17a). 날은 어둡고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않았습니다(17b). 웬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아니나 다를까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났습니다(18). 제자들 중 다수는 갈릴리 바다의 풍랑에 해박한 지식과 다양한 경험을 가진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풍랑은 이전과 급이 달랐습니다. 밤새도록 노를 저었지만 제자리에서 계속 맴돌 뿐이었습니다. 

힘이 다 빠져 포기하려고 할 때 즈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제자들이 탄 배로 가까이 오셨습니다. 이를 본 제자들은 공포에 가득 차 외쳤습니다(19). “귀신이다”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실 줄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고 말씀하셨습니다(20). 그제서야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기뻐서 예수님을 배 안으로 영접했습니다(21a). 그 순간 이제까지 제자들이 탄 배를 집어 삼키려 하던 광풍이 순풍으로 바뀌었습니다. 제자들이 한숨을 돌리는 사이 배는 어느덧 본래 목적지로 삼았던 가바나움에 도착해 있었습니다(22b).

지금 교회의 모습이 마치 본문 속 큰 바람과 파도를 만난 배와 같습니다. 교회는 작년부터 코로나라는 광풍을 만났습니다. 성경 공부, 식사 모임, 대면 예배, 수양회가 올스톱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잠시 불다가 몇 달 안에 멈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계속 거세게 불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여기서 떠밀려 가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를 저었습니다. 줌이라는 어색한 도구에 적응해서 어떻게 하든지 성경 공부를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작은 모니터 앞에서 제대로 예배 드리기 위해 고군분투해 왔습니다. 방역과 신앙 생활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놓칠 수 없어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 온 것 같습니다. 힘들게 노를 계속 저었지만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늘 제자리인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들 좀 지친 것 같습니다. 이제 줌도 지긋지긋하고 지금까지 겨우 붙잡고 있던 노를 슬며시 내려놓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버티고 버티다 보면 예수님께서 물 살을 가르시고 친히 우리를 구원하러 반드시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교회가 침몰하도록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기이한 방법으로 우리를 찾아오시고 거센 풍랑으로부터 우리를 건져 주실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에게 기쁨과 환한 웃음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본래 가려고 했던 목적지까지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영화 기생충에 나온 송강호의 유명한 대사가 있습니다. “아들아,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그렇습니다. 우리가 비록 시험 중에 있을지라도 예수님에게는 다 계획이 있습니다. 시험이 끝나고 날이 언제가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제보다는 오늘 그 날이 더 가까워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선하신 계획을 신뢰하고 우리 앞에 닥친 이 풍랑을 잘 견딜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경험과 이성을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주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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