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말씀을 믿고 가더니

이창무 2021. 4. 18.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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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6 강 / 이창무

말씀을 믿고 가더니

말씀 / 요한복음 4:43-54
요절 / 요한복음 4: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요즘 코로나 팬데믹 현상 때문에 언컨택트 시대가 십 년 정도 앞당겨졌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대면 접촉이 없이도 거의 못하는 것은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언컨택트 시대를 가장 먼저 여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직접 가시지 않고 30 킬로미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권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얼마든지 비대면으로도 역사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믿음이 눈에 보이는 표적을 보고 믿는 믿음에서 말씀을 듣고 믿는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43)”

사마리아 사람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이틀간 그들과 함께 거하시며 말씀을 나누셨던 예수님은 이제 그들의 작별 인사를 뒤로 하고 갈릴리로 향하셨습니다. 막 갈릴리로 들어가려던 순간 갑자기 예수님은 제자들을 돌아 보시더니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44)”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은 당시 떠돌던 격언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예수님 자신을, 고향은 갈릴리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자신이 갈릴리에서 환영을 받지 못할 것을 예고하십니다. 왜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유대에 계실 때 세례 요한이 세례 주는 것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 주는 것이 많았습니다. 사마리아에 계실 때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했습니다. 제자들은 생각했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이렇게 환대를 받았으니 고향 갈릴리로 돌아가면 얼마나 열렬한 환영을 받을까? 플래카드가 걸려 있을까? 혹시 카 퍼레이드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찬물을 확 끼얹으십니다. “지금 우리는 배척과 거절을 기다리는 곳으로 가고 있다. 꿈을 깨어나라.”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환영을 받는 것은 분명 기분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자칫하면 정신적인 마약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취하면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첨하게 되고, 싫은 소리는 한 마디도 못하게 됩니다. 오롯이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 이루어야 할 사람에게는 너무나 치명적인 일입니다. 처음에는 멀쩡했던 사람이 성공한 뒤에 이상하게 변질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구약의 사울 왕 같은 사람이 딱 그런 케이스입니다. 처음에 사울은 무척 겸손하고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된 후 변했습니다. 자신의 왕권이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지지 여부에 달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도저히 쓰실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비참하게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렇게 사람의 인정에 중독되길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보내신 이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온전히 이루는 사람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배척과 거절이 기다리고 있는 갈릴리로 향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갈릴리 사람들의 반응은 우리를 헷갈리게 합니다.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45)”

막상 갈릴리에 들어서자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일행을 뜨겁게 환영했습니다. 사인을 받아가겠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예수님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때 많은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명절 중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모든 일이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계시던 동안 행하셨던 여러 기적과 병 고치는 일과 귀신 쫓아내는 일들을 말합니다. 이런 예수님이라면 자신들의 현실 문제를 얼마든지 해결해 주실 것이라 기대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 나름대로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바라는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신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않으신다고 느끼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은 하루 아침에 돌변할 것입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크고, 환호는 야유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어제까지 두 손을 흔들며 영접하던 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소리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영접이라고 해서 다 같은 영접이 아닙니다. 영접한 것 자체보다 어떤 영접을 했는지가 중요합니다. 믿음이라고 해서 다 같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표적과 기사가 다 무의미하고 쓸 데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결코 그런 뜻은 아닙니다. 아무 의미가 없다면 예수님께서 왜 기적을 일으키셨겠습니까? 당장 요한복음의 전반부만 보아도 일곱 개의 표적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는 사람에게서 놀라운 일들, 기이한 일들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예수님께 관심을 갖게 됩니다. 

제가 처음 안암UBF에 왔던 날 요한복음 축제가 있었습니다. 그날 한 소감 강사님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증언했습니다. “저의 학점은 선동열 선수의 방어율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4.0을 넘어 전액 장학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당시 선동열 선수의 방어율은 1.0이 채 되지 않았었습니다. 이 소감을 듣고 “이것 참 놀랍고 기이한 일이다. 그렇다면 나도 예수님을 만나면 전액 장학금을 받게 될까?” 하는 기대를 가졌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믿으면 자신의 현실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신앙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상태 그대로 고착되는 것입니다. 그런 기대가 믿음으로 가는 접촉점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경이 요구하는 믿음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도마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소식을 듣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예수님의 손에 난 못자국을 두 눈으로 똑똑히 자기 손으로 만져 보고 창에 찔린 옆구리에 자기 손을 넣어서 그 생생한 질감을 느껴 보아야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겠다고 말했습니다. 8일 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 네 손가락을 내밀어 만져보고 네 손을 내밀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깜짝 놀란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도마를 보시고 참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0:29)”

표적을 보고 믿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을 수 있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고 이런 믿음에 근거한 영접이 예수님이 기대하시는 영접입니다. 그러면 이런 참된 믿음은 무엇을 근거로 한 믿음일까요? 이어지는 한 사건이 우리에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46,47)”

갈릴리 가나는 초콜릿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첫번째 표적을 행하신 곳으로 우리에게 낯 익은 곳입니다. 그곳에서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갈릴리 분봉왕인 헤롯 왕을 받드는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가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집은 갈릴리에서 가장 큰 도시인 가버나움에 있었습니다. 현재 그는 좋은 옷에 대궐 같은 집에 살고 있었지만 마음속은 점점 숯검정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병든 아들 때문이었습니다. 거의 죽게 되었다는 표현을 볼 때 병든 아들은 거의 가망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저에게는 저보다 생일이 몇 달 빠른 사촌인 미애 누나가 있었습니다. 착하고 순박한 전형적인 시골 소녀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미애 누나는 백혈병으로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로 큰 어머니는 한 동안 저를 볼 때마다 우셨습니다. 제가 중학생이 되자 “미애도 지금쯤 중학생 되었을 텐데”, 제가 고등학생이 되자 “미애도 지금쯤 고등학생이 되었을 텐데” 하시며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이럴 때 부모의 심정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알겠습니까? 

왕의 신하 정도면 용하다는 의사를 백방으로 찾아 다니며 하는 데까지 해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에 관한 명성과 그분이 갈릴리 가나에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30 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를 단숨에 달려갔습니다. 아버지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을 예수님께 매달렸습니다.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이런 태도를 믿음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이런 태도는 앞서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을 본 갈릴리 사람들이 영접했던 태도와 다를까요? 예수님의 대답을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48)”

예수님은 아주 냉정하게 대답하십니다. 간다는 말씀도, 안 간다는 말씀도 없이 그저 책망조로 말씀하십니다. 흥미로운 점은 “너희”라는 2인칭 복수 대명사를 쓰셔서 왕의 신하 뿐만 아니라 주위에 몰려 있는 갈릴리 사람을 향해서도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자신을 영접한 태도나, 왕의 신하가 아들을 고쳐 달라고 간절히 구하는 태도 모두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기대하는 믿음은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성도 없이 막연히 도움을 청하는 태도는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마치 필요하면 달려와서 구해 주는 뽀빠이 아저씨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쥐어 주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 같은 존재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뜻 밖에 차가운 대답을 들은 왕의 신하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내가 누군데 감히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나?” 하면서 되돌아 갔을까요?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49)”

그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예수님께 매달렸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문제였다면, 심지어 자기 자신에 관한 일이었다면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의 생명이 달린 일이기 때문에 물러날 곳이 없었습니다. 왕의 신하는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선생님. 저는 그저 당신이 행하신 일을 듣고 자식 살려고 이렇게 사정하는 것입니다. 제게 무어라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아무튼 제발 저와 함께 가버나움으로 가 주십시오.“ 이 순간 그는 예수님 앞에서 더 이상 지체 높은 왕의 신하가 아닙니다. 그저 한 아이의 아버지일 뿐입니다.

왕의 신하의 이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과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부모에게 있어 자녀는 다른 것은 다 포기할 수 있어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잘 나가는 사람도 자녀 문제 앞에서는 겸손해지고 연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현재 선교사 수양회 TFT멤버로 선교사님들의 메시지와 인생 소감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에 소감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자녀 문제였습니다. 아들 때문에 속을 끓였던 이야기, 딸을 위해 주님께 간절히 매달려 기도했던 이야기 등등 많은 선교사님들은 자식 문제로 엎치락뒤치락 씨름하는 가운데 기도를 배웠고 믿음을 배웠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자식 문제로 고뇌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단독자로 주님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우리의 기도가 깊어지기 시작하는 곳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우리의 믿음이 자라기 시작하는 곳입니다. 그러면 왕의 신하의 간구는 어떤 응답을 받았을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50a)”

예수님의 이 말씀은 왕의 신하에게 동시에 두 가지 감정을 불러 일으켰을 것입니다. 먼저는 아들이 살아 있다는 말씀이 무척 반갑고 기뻤을 것입니다. 하지만 곧이어 과연 이 말씀을 믿어도 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뇌에 빠졌을 것입니다. 30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계신 예수님이 가보지도 않고 들려주시는 아들의 생존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지금 눈에 보이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만이 있을 뿐입니다. 삐딱한 시선으로 보면 “혹시 나를 귀찮게 여겨 빨리 떼어 놓으려고 둘러댄 것이 아닐까?” 이렇게 의심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될 것을 믿고 갈 수도 있었습니다. 왕의 신하는 어느 쪽을 선택했을까요?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50b)”

놀랍게도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 자기에 하신 말씀을 믿고 갑니다. 마치 왕의 명령을 듣자마자 곧장 실행에 옮기는 신하처럼 어떤 근거나 이유를 묻지 않고 그냥 갑니다. 체념하고 간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 살아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갑니다. 왕의 신하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사건이고 행동이었습니다. 말씀이 예수님의 입 밖으로 나오면 그것은 예수님이 직접 가신 것이나 다름 없고, 손을 대신 것이나 다름 없고, 메스를 들고 수술을 하신 것이나 다름 없다고 왕의 신하는 믿은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말씀하셨으니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말씀하셨으니 말씀에 토 달지 않고 순종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책망을 들은 왕의 신하는 예수님을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믿게 된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처음에 왕의 신하에게 그렇게 차갑게 대하셨는지 비로서 이해하게 됩니다. 왕의 신하의 믿음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그를 시험하신 것이었습니다. 이런 시험을 통과하지 않고는 우리의 믿음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확률과 가능성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선택할 것인가? 우리는 종종 이런 시험대 위에 올라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 둘 사이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으십니다. 지난 금요 기도회 때 올해 순회 교육을 시작한 춘천 UBF 황사무엘 목자님의 인생 소감을 나누었습니다. 황사무엘 목자님은 풀타임 목자 생활을 시작하려고 할 때 가족들의 만류가 있었습니다. 특히 목사이신 외삼촌과 전도사이신 누님 부부가 춘천까지 찾아와 정말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면 우리가 앞길을 열어줄 테니 나에게 오라고 강력하게 권했습니다. 누가 봐도 이 길을 택하는 것이 성공할 확률이 높아 보였습니다. 이때 춘천의 김바울 목자님은 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시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가장 축복받은 삶이라는 말씀만 하셨다고 합니다. 면담이 끝난 후 큰 매형은 황사무엘 목자님을 따로 불러 “네가 다니는 있는 교회가 진짜 교회이니 서울로 오지 말고 계속 여기서 섬기라” 당부했다 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확률이 아닙니다. 믿음은 가능성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는 주님께 맡기고 예수님의 말씀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왕의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선택하신 결과가 어떠합니까?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51,52)”

왕의 신하는 기뻐 어쩔 줄 몰랐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져 흥이 달아나고 수치를 당할지 모를 위기가 닥쳤을 때 물로 포도주로를 만들어 기쁨을 회복시켜 주셨던 예수님이 이번에는 자식을 잃을 뻔한 아버지에게 아들을 되찾는 기쁨을 주셨습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런 와중에도 왕의 신하는 아들이 의식을 되찾은 때를 물었습니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 결과를 낳게 한 것이 과연 예수님의 말씀인지 여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종들은 어제 일곱 시라고 대답했습니다. “일곱 시”는 어떤 시각과 일치합니까?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53)”

가버나움까지 가기도 전에 왕의 신하는 말씀의 성취를 맛보았습니다. 길 위에서 말씀의 영광을 경험했습니다. 그 순간 그의 믿음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자라났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이미 믿었던 왕의 신하에게 또 한 번 믿었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럼 앞엣것은 거짓이었고 이번에는 진짜라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둘 다 믿음입니다. 그러나 내용과 깊이가 다릅니다.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믿음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이렇게 역동적입니다. 더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하고 깊어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왕의 신하의 믿음은 가족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질적으로 업그레이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확대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54)”

요한복음 2장부터 4장은 갈릴리 가나에서 일어난 첫번째 표적으로 시작해서 역시 가나에서 일어난 두번째 표적으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의 표적을 일으키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표적 자체를 의지하라고 일으키신 것이 아닙니다. 표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 예수님에게서 선포된 말씀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21장 30,31절,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 믿음의 현 주소는 어디일까요? 아직은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믿음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작은 믿음도 주님은 귀하게 여기시고 우리를 더 깊은 관계 속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나의 말을 믿고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왕의 신하처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예수님 안에 있는 충만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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