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창무 2021. 4. 4.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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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부활절 특강 / 이창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말씀 / 요한복음 11:1-44
요절 /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봄이 왔습니다. 시내에 나가 보면 벚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날씨도 많이 따뜻해 져서 옷차림이 가벼워졌습니다. 하지만 마음껏 봄을 감상하고 즐거워 하기에는 제약이 많습니다. 작년부터 일 년 넘도록 우리를 괴롭혀 온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입니다. 이 질병으로 인한 두려움과 불안감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이 두려움과 불안감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요? 그 근원은 바로 죽음입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바로 부활의 복음입니다. 올해 부활절을 맞이하여 요한복음에 나타난 부활의 복음을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부활의 주, 생명의 주되신 예수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부활 신앙으로 현재 우리 삶에서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떤 병든 자가 있었습니다. 마리아, 마르다 자매의 오빠인 나사로였습니다. 세 남매는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그들을 각별히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그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거기서 말씀을 나누기도 하시고 음식도 잡수셨습니다(눅 10:38-42). 대학교에 입학한 나사로는 들 뿐 마음으로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러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그에게 고열이 나며 호흡이 가빠지는 증세가 보였습니다. 나사로는 즉시 베다니 종합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습니다. 병명은 코로나 19 이었습니다. 이를 본 누이들은 사람을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급히 보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이들은 아주 간단하게 나사로가 병든 사실만을 알렸습니다. 그렇게만 해도 나사로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즉시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오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4)"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는 말씀이 어떻게 들립니까? 젊으니까 가볍게 지날 병이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통해 받고자 하신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까지 듣고 나면 지금 가서 나사로의 병을 고쳐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있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습니다. 나사로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왜 이틀씩이나 계시던 곳에 머무르셨을까요? 유대인들이 무서웠기 때문일까요? 예수님이 오직 자기만 생각하고 나사로와 그 동생들에게는 무관심하신 분이기 때문일까요?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이나 삼남매는 그 이유를 알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새로운 믿음, 더 좋은 믿음을 주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들이 원하는 대로 달려가서 병을 고쳐 주셨다면 예수님은 이들의 좋은 주치의는 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할 때 예수님을 부활의 주님으로는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일생 죽음의 세력에게 시달리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시기에 때문에 오해를 무릅쓰고 이틀을 더 지체하셨습니다.

우리는 다급할 문제가 있을 때 예수님을 찾습니다. 지금 이곳에 함께 해 문제를 해결해 주시도록 열심히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 기도가 빨리 응답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마치 주님께서 이틀을 지체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틀이란 시간 때문에 “주님이 왜 나와 함께 하지 않으시는가? 왜 이렇게 내게 무관심하실까?” 묻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무관심하거나 사랑하지 않으셔서 지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지체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더 좋은 것, 더 나은 것을 주시기 위해 지체하시는 것입니다. 함께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함께 아파하고 계십니다. 다만 침묵 가운데 하나님의 때, 우리에게 가장 좋은 때를 기다리고 계실 뿐입니다.

이틀이 지나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하셨습니다. 제자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님이 유대에 계실 때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라고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이 신성 모독죄로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10:30,31). 그래서 제자들은 유대로 간다는 말이 몹시 두려웠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밝은 낮인데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9,10). 여기서 낮과 밤에 대한 제자들과 예수님의 기준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안전한 여기가 낮이고 위험한 저 곳이 밤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 하면 낮이다. 나와 함께 하지 않으면 밤이다. 나와 함께 하지 않으면 아무리 안전한 곳에 있어도 넘어질 것이요 나와 함께 하면 아무리 위험한 곳에 있어도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후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깨우러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우리는 잠을 사모하여 틈만 나면 자고자 합니다. 심지어 예배 중에도 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 죽음은 이런 잠과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시 깨어날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 때문에 잠시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해야 한다는 슬픔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슬픔 가운데서도 우리는 또 기뻐할 수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 죽음은 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함께 하는 영원한 안식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한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고 했을 때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나사로가 잠들어 쉬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느니라"하시며 나사로가 죽었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에게로 가자고 제자들을 재촉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갈등했습니다. 사지를 향해 걸어 들어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갈 수도 없고, 안 따라갈 수도 없었습니다. 마침내 도마가 비장한 각오로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도마는 그 이름답게 칼질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도마는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이런 그의 결심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예수님께 대한 '의리'에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의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십자가를 앞에 두고 다 도망쳤습니다. 왜 의리를 지키지 못했습니까? 부활신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부활 생명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끝까지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잠시 후 이런 부활신앙을 선물로 줄 것을 생각하시며 기뻐하셨습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15)"

만약 예수님의 이 말씀을 마르다와 마리아가 들었다면 어떻게 느꼈을까요? 내가 거기 없던 것을 기뻐하신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자매는 예수님께 대해 서운함을 넘어서 너무 잔인하시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부재가 어떻게 기쁨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부재함이 낳는 열매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부재로 인한 일시적인 괴로움과 고통이라는 비용을 치르고도 훨씬 남는 장사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으로 일생 우리 인생에 드리워질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낼 수 있다면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예수님의 부재라는 상황을 통과하지 않고서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부재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그 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선하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궁극적으로 나에게 가장 큰 유익이 되는 것을 주실 것을 믿는 것, 그것이 믿음이 자라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한 때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 되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급히 달려가 맞았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식사 초대 때는 20분 전에 오시던 주님이 막상 급할 때는 왜 이렇게 이틀이나 지체하셨는지 마르다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원망의 말을 쏟아 놓았던 마르다는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는지 예수님께 대한 막연한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 말은 ‘무엇이든지’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무엇이든지’ 안에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는 희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하며 부활을 장래에 일어날 일로 기대했습니다.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하고 말함으로써 과거에 얽매였습니다. 또 이제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이라 함으로써 미래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마르다에게는 과거와 미래는 있었지만 현재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현재는 여전히 슬퍼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25,2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현재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습니다. 이 법칙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영생을 꿈꾸던 이집트의 파라오도 중국의 진시황도 다 죽음에 삼킨 바 되었습니다. 또한 이 죽음은 지금 살아 있는 모든 자들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살있는 제자들 마음속에 두려움과 이로 인한 무기력으로 찾아왔습니다. 죽음은 마르다에게 슬픔, 절망으로 찾아왔습니다. 이처럼 죽음은 우리 주위에 늘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상실을 경험할 때마다 죽음과 대면합니다. “죽으면 끝이니까 최대한 즐기며 살아야 해!” 죽음은 현재 삶에 대한 이런 맹목적인 집착으로 찾아오기도 합니다. “어차피 죽을 텐데 살아서 뭐해?” 반대로 이런 삶에 대한 허무와 무의미로 찾아오기도 합니다. 죽음의 지배를 받는 자의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덮여 있습니다. 기쁨이 없고 늘 무엇에 쫓기는 듯 불안해 보입니다. 죽음의 지배를 받는 자의 말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납니다. “다 부질 없는 짓이야. 소용 없어. 어차피 난 안 될 거야. 살고 싶지 않아.” 등등 온갖 부정적인 말, 불신과 패배적인 말을 달고 살아 갑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죽음의 세력을 이기며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바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신 부활이요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물으심으로 우리에게 믿음을 원하십니다. 부활 신앙은 머리로 아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는 것은 이론이요 믿는 것은 실제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네가 아느냐”가 아니라 네가 믿느냐"고 하십니다. 우리가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진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을 때 현재 우리 삶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떨쳐 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의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부활의 기쁨과 희망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부활의 능력은 우리 삶에 생명의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게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부활의 믿음으로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를 체험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르다에 이어 동생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마을 어귀에 계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을 보자마자 마리아는 그 발 아래 엎드려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함께 온 유대인들도 울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이요 생명의 주가 앞에 계시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죽음으로 인해 여전히 울고 있었습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눈물은 그들의 불신에 대한 안타까움의 눈물, 죽음의 세력에 대한 분노의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무덤으로 가서 무덤을 막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방금 신앙고백을 한 마르다가 말했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는 어느새 예수님의 말씀을 다 잊어버리고 오빠를 포기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제 마르다의 불신을 책망하셨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마르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면 믿음으로 순종하여 돌을 옮겨 놓아야 했습니다.

무덤의 돌을 옮겨 놓자 예수님은 둘러선 무리들이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심을 믿을 수 있도록 간절히 감사 기도하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향하여 큰 소리로 나사로를 부르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러자 죽은 나사로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나 살아!” 하면서 무덤 밖으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풀어 다니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흘러 나왔습니다. "오! 죽은 사람이 살아 나오다니.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던 무덤 앞은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됨으로 부활의 빛, 생명의 빛이 충만한 축제의 장으로 변하였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이는 나사로가 죽음의 세계 밖으로 나오라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어둠의 세계에서 예수님이 계신 빛의 세계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절망의 세계에서 예수님이 계신 희망의 세계로, 예수님이 없는 허무와 무기력의 세계에서 예수님이 계신 창조와 능력의 세계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되면 빛으로, 생명으로 나오게 됩니다. 요 5:25은 말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저도 이 주님의 음성으로 살아난 사람입니다. 저에게는 죽음이 허무로 찾아 왔습니다. 허무는 어릴 적 들었던 한 뉴스 꼭지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바람이 많이 불던 날 길을 가다 간판에 떨어져 죽은 사람의 뉴스를 들으며 인생이 한 순간의 우연에 의해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또 “플란다스의 개”를 심취해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 장면에 주인공 넬로가 죽는 장면을 읽고서 하루 종일 울었습니다. 꿈도 선함도 아름다움도 모두 삼켜버리는 죽음의 횡포에 전율했습니다. 이후로 늘 허무의 그림자가 제 인생에 짙은 어둠을 드리우게 했습니다. 이런 저에게 예수님께서 부활과 생명의 주님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대학 4학년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무너져 내려 있을 때였습니다. 이런 내 형편을 주님을 모르시는지, 아무런 힘도 쓰지 않으시는 것 같은 주님을 원망만 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죽고 싶다는 생각을 수 없이 했습니다. 그러던 중 가게 된 수양회 전체 타이틀인 “광명의 십자가”가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십자가가 암흑이 아니라 광명이 될 수 있는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중 십자가는 십자가로 끝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생명의 부활로 이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바로 조금 전까지 저를 지배하고 있던 허무의 세력이 싹 물러갔습니다. 어둡던 십자가는 제게 부활의 빛이 찬란히 빛나는 광명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요즘 저에게는 매일 계속 되는 싸움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대로 주저 앉게 되는 것 아닌가? 캠퍼스 선교 단체들은 다 망하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고민입니다. 채플에 학생이 한 명도 없는 것을 보고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게 다 제 책임 같았습니다. 이렇게 나를 절망과 자포자기로 몰아넣는 죽음의 요소와 오늘도 싸우고 있습니다. 제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는 부활 신앙이 필요합니다. 제가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이 불신과 회의를 딛고 일어나 승리를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머리 속 부활 신앙이 아닌 현재 삶 속에서의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능력을 누리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마치 초상난 나사로의 집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한계에 갇혀 슬퍼하고 절망하고 있습니다. 또한 원망하고 불신에 빠져 있습니다. 세상은 시체가 썩어 냄새가 나듯이 온갖 죽음의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우리가 믿을 때 우리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는 지금 살아 계십니다. 이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생명이 살아납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명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허무와 절망의 세계에서 나오라고 명하십니다. 불신과 운명주의와 무기력의 세계에서 나오라고 명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죽음의 세계에서 나와 생명력이 넘치는 힘찬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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