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참된 예배

이창무 2021. 4. 11.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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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5 강 / 이창무

참된 예배

말씀 / 요한복음 4:1-26
요절 / 요한복음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000년 전 어느 날 사마리아 스포츠 신문의 1면 기사를 살펴 보겠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대화하고 있는 장면을 파파라치가 찍은 사진이 정면에 걸려 있습니다. 기사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대인 예수, 화려한 남성 편력을 자랑하던 사마리아 여인까지 포섭하다! 생수 게이트 사건으로 번지나?” 물론 이 내용은 상상에 기초한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정말 스포츠 신문이 있었다면 얼마든지 이런 기사가 났을 수 있습니다. 이런 스캔들이 터질 위험성을 아시고도 예수님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한 사마리아 여인과 뜨거운 중동의 태양 아래에서 장시간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지금부터 그 대화의 현장 속으로 함께 떠나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1)”

자신들이 보기에 일개 목수의 아들이자 갈릴리 출신의 촌뜨기에 불과한 예수님이 세례 요한보다 더 많은 추종자를 모은다는 소식은 바리새인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바보 같이 가만히 있지 말고 들이 받아.” 말하며 갈등을 부추겼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불필요한 충돌이나 오해를 불러 일으키지 않기 위해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고자 하셨습니다(3).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하겠는지라(4)”

이 구절에는 영어의 must에 해당하는 헬라어 조동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사마리아를 통과하겠다는 예수님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가지 않았습니다. 요단강 동편의 우회로를 선택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을 더럽다고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자칫 하다가 사마리아인들에게 테러를 당한 위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굳이 사마리아를 통과하고자 하셨을까요? 여행 경비와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였을까요?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들도 구원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때 예수님도 다른 유대인들처럼 사마리아를 피해 가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나중에 사도행전에서 빌립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용기를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그들을 교회의 일원으로 뜨겁게 환영하고 영접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5,6)”

이 수가라는 동네는 역사적으로 야곱과 인연이 깊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동네 사람들은 야곱이라는 인물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이 많았던 듯 싶습니다. 오랜 여행 끝에 수가 성에 도착한 예수님은 피곤하여 야곱의 우물 곁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으셨습니다. 우물가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를 처음 만난 곳이 우물가였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만난 곳도 우물가였습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도망 나와 아내가 될 십보라를 처음 만난 곳도 우물가였습니다. 하나 같이 우물가는 남편과 아내가 처음 만난 장소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남편과 아내가 만나는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지 않습니까?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과 자기 백성 간의 관계를 종종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비유하곤 합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우상 숭배는 간음에 비유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 참 남편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라는 영적 간음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의 참 남편이 되실 분이 장거리 여행 끝에 이미 우물가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누가 등장할 차례이겠습니까?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7)”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내막을 알고 나면 이상한 일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여자가 여섯 시 지금으로 하면 정오의 시간에 물을 길으러 왔다는 점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뜨거운 햇볕을 피해 이른 아침이나 저녁에 물을 길었습니다. 사람을 피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여인이 이 시간대에 물 길러 왔을 리가 없습니다. 둘째는 유대인 남자인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거셨다는 점입니다. 집 밖에서는 아내에게도 말을 걸지 않는 것이 당시 풍습입니다. 하물며 낯선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다는 것은 그 자체로 스캔들이 될 만한 일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여인은 깜짝 놀라 이렇게 대꾸합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9)”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역사적으로 여러 악연이 깊어 서로 상종 못할 사이였습니다. 오죽하면 두레박 하나 빌려줄 여유가 없겠습니까? 이런 ‘상종 못할 사이’는 인간의 역사 가운데 어느 장소, 어느 때에나 있어왔던 현상입니다. 사람 사는 곳에 차별이 있고 장벽이 있습니다. 배제가 있고 소외가 있습니다. 인간적인 조건을 두고 남과 자신을 구별하려는 시도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후 스스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늘 저질러 오던 일들입니다. 우리 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보수와 진보, 노년 세대와 청년 세대, 남성과 여성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습니다. 설령 코로나로 인한 물리적 거리두기가 끝난다 해도 이런 심리적 거리두기는 쉽게 사라질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차별과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다들 접근을 기피하는 사마리아로 굳이 통과하고자 하셨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 먼저 말을 거셨습니다. 혹시 우리 마음 속에 “저 사람은 상종 못할 사람이야” 하면서 금을 그어 놓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나는 예수님께서 보실 때 상종할 만한 자격이 되는 사람이었을까?”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에게 손을 내밀지 않으셨다면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벽을 허물고 내게 다가오지 않으셨다면 누구도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은 순간부터 서로에게 빚진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먼저 다가가고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세워진 경계를 허물고 벽을 넘는 평화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경계심 많은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내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

예수님은 여인에게 왜 하필이면 하나님의 선물을 언급하셨을까요? 우선 굳게 닫힌 여인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 였습니다. 선물을 싫어할 사람은 없습니다. 선물은 경계와 장벽을 허물 수는 없어도 적어도 금이 가게 만들 수 있습니다. 여인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게사옵나이까(11)”

여인은 예수님이 주고자 하시는 선물이 제주 삼다수나 강원 평창수 같은 생수 인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조금 전에 자신에게 물을 얻어먹겠다고 한 처지에 생수를 주겠다고 하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이었습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12)” 비교를 당하고 기분 좋은 사람 어디 있습니까? 또 이런 까칠한 반응을 접하고 나면 대개 움찔 하면서 뒤로 물러서기 마련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

앞에 나오는 물은 야곱의 우물 물을 가리킵니다. 이 물을 마시면 잠시 동안 시원함과 만족감을 줍니다. 그러나 이내 곧 다시 목마르게 됩니다. 마치 가나 혼인 잔치의 포도주와 같습니다. 포도주가 있는 동안만 즐거울 뿐 포도주가 떨어지고 나면 잔치의 즐거움도 사라지고 맙니다. 즐거움이 사라지면 이내 불쾌한 느낌이 몰려 옵니다. 이때 “더 세게, 더 짜릿하게”를 외치며 강한 자극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런 탐닉이 중독을 낳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 되면 더 이상 어떠한 자극에도 아예 반응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남은 것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나 자신 뿐입니다. 목마름의 대상은 인정과 명예, 권력, 주식, 비트코인, 이성의 사랑 등등 대상은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탐닉에서 시작해서 중독에 빠졌다가 권태에 이르는 전 과정은 늘 동일합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끝나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이 지긋지긋한 악순환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습니까?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면 됩니다. 그러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그 물은 우리 안에서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약속에 대한 사마리아 여인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

여인은 아직도 생수가 먹는 생수인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생수,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물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7:37-39)”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생수가 무엇입니까? 바로 믿는 자들이 받는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성령님은 야곱의 우물과 달리 절대 고갈되는 법이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물입니다. 성령님과의 교제는 우리에게 참된 만족과 기쁨과 세상에서 맛본 적이 없는 행복감을 줍니다. 예수님은 “목이 마르더라도 꾹 참고 잘 견뎌라. 인생이 원래 그런 거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생명의 물이 차고 흘러 넘치게 하여 우리 안에 있는 타는 목마름을 근원적으로 해결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생수를 맛보고 나면 그 시원함과 충만함 때문에 세상이 주는 야곱의 우물물은 더 이상 생각이 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장 목이 마르다고 세상이 주는 우물로 달려가지 마십시오. 그 물은 생수가 아닙니다. 더 큰 갈증을 일으키는 소금물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우물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 물은 우리에게 들어와 생명과 만족과 기쁨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물을 제발 내게 달라 하는 여인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16)”

여인은 경악했을 것입니다. 생수와 남편이 도대체 무슨 관계란 말입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별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이 여인이 하늘로부터 오는 생수를 누리려면 먼저 하나님께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까지 자신이 섬기던 우상의 실체를 드러내고 우상과의 관계를 단절해야 합니다. 이 여인에게 있어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던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남편이었습니다. 여인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17a)”

남편이 없다는 말은 참 애매모호한 대답입니다. 당황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이 말을 듣고 자신을 과부로 생각하시고 대충 넘어가 주실 것을 기대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에 여인은 거의 까무러칠 뻔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7b,18)”

여인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예수님 앞에서 적당히 얼버무리려 했던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여인은 어쩌다 남편을 다섯이나 두게 되었을까요? 원래 바람기가 많았을까요? 아니면 어떤 기구한 운명 때문이었을까요? 원인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여인에게는 감추고 싶었던 과거였습니다. 짓궂게도 예수님은 왜 이런 과거를 굳이 들추어 냈을까요? 여인을 비난하거나 창피를 주려고 하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비난하지 않고 연거푸 너의 옳고 참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먼저 여인으로 하여금 남편이라는 우상을 의지하다가 망가져 버린 자신의 참 모습을 직면하도록 도와주고자 하셨습니다. 일그러진 그 모습을 직면하는 일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참모습을 직면하지 않고는 해결도 없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이를 계기로 여인이 예수님의 참모습에 눈을 뜰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하셨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19,20)”

예수님의 의도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여인은 이제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여인은 드디어 문제의 핵심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만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들 전체의 문제가 하나님과의 관계성 문제임을 자각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했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시온산에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누구의 말이 옳은 것입니까?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어떤 예배가 올바른 예배인지 알아야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바르게 가져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

예수님은 어떤 때가 다가오고 있는데 그때가 되면 예배 장소가 그리심 산이냐, 예루살렘이냐는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대답하십니다. 그러면 그 때가 오기 전까지 올바른 예배 장소는 어디였을까요?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22)”

예수님은 과거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시온산에서 드리는 예배가 바른 예배였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면 새 시대의 예배는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까요?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23)”

여기서 영은 성령님을, 진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참된 예배는 성령과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옛 시대에는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새 시대에는 예배자가 중요합니다. 새 성전이신 예수님을 구주와 왕으로 모시는 예배, 성령님에 의한 생명과 치유와 화해를 경험하는 예배, 진리에 순종하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인격과 삶을 본받고자 하는 예배, 이런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4)”

하나님은 이 땅과는 전혀 다른 차원인 하늘과 영에 속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땅과 육에 속한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을 하나님도 기뻐하신다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웅장하고 화려하고 거대한 예배에 감격하는 것은 인간이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기분 좋다고 하나님도 좋아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늘 맞는 것은 아닙니다. 형식이 어떠하든 영이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딱 한 가지입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까? 그리스도가 중심에 계신 예배입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넉 달이 넘도록 비대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번 주부터 두 요회 씩 현장 예배를 드리고자 했지만 이것마저 여의치 않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점에 대해 염려하고 계십니다. 예배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흩트려지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편한 유튜브 예배에 익숙해져서 막상 대면 예배를 부담스럽게 여기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 기초해 볼 때 “대면 예배냐, 비대면 예배냐?”가 본질이 아닙니다. 거실에 앉아 예배를 드리든, 마크홀 의자에 앉아 예배를 드리든 예배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핵심은 성령과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반대편에 사람이 중심이 되는 예배, 내가 중심이 되는 예배가 있습니다. 예배에 대한 나의 기호와 취향이 기준이 되는 예배가 그런 예배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마치 쇼핑하듯이 자기 마음에 드는 예배를 골라서 예배 드리고 있습니다. 한 예배에 싫증이 나면, 훌쩍 옮겨 가서 다른 예배를 드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예배하는 개인만 있고,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는 실종되고 맙니다. 전에도 말씀 드린 적이 있지만 엄밀히 말해 비대면 예배는 없습니다. 모든 예배는 하나님과 마주 하는 대면 예배입니다. 유튜브 화면과 줌 스크린 너머에는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는 자를 찾고 계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만약 우리의 예배가 무너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시는 성령님의 함께 하심을 누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진리를 떠나 물질주의, 쾌락주의와 같은 이 세상의 온갖 거짓 신들에게 휘둘리게 될 것입니다. 다시 또 목마른 인생으로, 길고 긴 어둠의 터널로 되돌아 가고 말 것입니다. 부끄러운 과거를 애써 부정하고 숨기려 하는 어두운 삶을 깨끗하게 청산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더 이상 목마르지 않을 하늘의 생수를 마시고 싶지 않으십니까? 영이신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그 예배자로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우리를 그런 삶으로 이끌어 주실 분이 저 높고 높은 하늘을 떠나 사마리아 같은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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