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창무 2021. 4. 2.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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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성금요일 예배 / 이창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말씀 / 요한복음 3:11-21

요절 /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은 기독교 역사 가운데 성금요일이라고 불리어 왔던 바로 그 날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고 십자가에 못 박하신 날은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절이 있는 주일 마지막 금요일을 성금요일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가던 일주일을 기념하여 고난주간이라고 부르는데 그 고난주간의 절정이 바로 성금요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날 많은 교회들이 성금요일 특별예배를 드립니다. 이 예배의 주제는 당연히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지난 주일 말씀에 이어 요한복음 3장 말씀으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11, 12)”

 

여기서 우리가 아는 것, 본 것 그리고 땅의 일, 둘 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을 가리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은 이 땅에서 실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런 일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하늘의 일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일이란 무엇일까요? 하늘의 일이란 육에 속한 사람, 죄에게 종노릇하던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또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제 니고데모에게 이 하늘의 일을 설명해 주고자 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13)”

 

예수님은 먼저 자신이 하늘의 일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있다는 점을 밝히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떠오르는 구절이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1:51)” 예수님이 땅의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역할을 하시는 동시에 하늘의 일을 땅에 알려 주는 자가 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이와 비슷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14)”

 

예수님은 민수기 21장 4-9절에 기록된 사건을 인용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백성들은 길이 험하다고 투덜대며 하나님께 그 길보다 더 험한 말로 불평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뱀에 물린 고통이 얼마나 심했기에 불뱀이라고 했을까요? 이제 백성들은 불뱀에 물려 다 죽게 생겼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아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았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불뱀에 물린 자들은 이 놋뱀을 바라보면 낫는다고 선포했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놋뱀을 바라보면 나을 수 있느냐’며 믿지 못했습니다. 위로 고개를 들어 놋뱀을 보느니 차라리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불뱀을 피하는 편이 더 살 확률이 높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다만 말씀을 믿고 높이 들린 놋뱀을 바라본 사람은 다 나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이렇게 연결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 놋뱀의 들림이 구원의 방법이었다면, 하나님을 거부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유일한 구원의 방법은 인자가 들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의 죽음은 니고데모에게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메시아가 죽다니? 그것을 구원의 방법으로 믿으라니?” 이것은 유대인의 상식으로도, 로마제국 시민들의 상식으로도, 아니 세상 그 어떤 사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소식이었습니다. 차라리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이 쉽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가 높이 들린 사건 때문에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메시지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왜 인자가 반드시 들려야만 합니까?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5)”

 

믿음으로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영생을 얻는다”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와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그토록 들어가기 원했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길 정말 원한다면 반드시 예수님을 십자가를 바라보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분명하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발 밑에 불뱀이 우글거리는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에 높이 들린 놋뱀을 바라보라. 그러면 살리라”는 말씀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처럼, 당장 눈 앞에 닥친 삶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구원을 받습니다.”라는 메시지는 환영을 받기 어렵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1:23)”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에 기초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저주 받은 자가 나를 구원한다고?” 미친 소리로 들렸을 것입니다. 헬라인은 이성적인 합리성과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이치에 닿지 않고 상식에 어긋나는 메시지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십자가가 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까?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죄 문제에 대한 치료제이고 해독제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불뱀에 물린 것 같은 고통과 죽음을 가져옵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어떤 사람도 영생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높이 들리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구원과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6)”

 

이 구절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또 암송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앞선 13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 편에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표현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셨고,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내려오신 것입니다. 또 15절과 16절 후반부가 거의 같은 것을 보면, 이 말씀은 14절 “인자가 들려야 하리니”라는 말씀에 대한 부연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왜 하나님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는가? 왜 하나님은 세상에 보낸 그 아들을 십자가 위에 높이 들리게 하려 하시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 지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입니다. 모든 부모는 자기 자녀를 가장 좋은 곳으로 보내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전에 한 선교사님이 저에게 전화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선교사님은 학창 시절 이곳에서 훈련을 받으시고 척박한 선교지에 나가서 고생을 많이 하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아들이 한국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하여 장막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님이 전화를 한 이유는 장막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질문이 끝이 없었습니다. 저는 방이 몇 개이고 몇 명이 살고 있으며 가전 제품은 어떤 것이 있는지 주변에 어떤 편의 시설이 있는지 등등을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 들으신 선교사님은 마지막으로 “장막이 아니라 거의 호텔이네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제서야 안심이 되셨는지 전화를 끊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죄가 있는 곳이며 죽음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깨어진 곳이고 아픔이 많은 곳입니다. 이 곳은 괴롬이 많은 곳이며 눈물 골짜기를 지나야 하는 곳입니다. 반면에 저 하늘은 눈물과 슬픔도 아픔도 없는 곳입니다. 죄와 죽음이 없는 곳입니다. 거기 있는 아들을 하나님께서 굳이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게다가 그 아들을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는 길로 보내신다고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사건입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파격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이 당혹스러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높이 들리게 하심으로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의 결과로 독생자, 가장 소중한 아들을 주셨습니다. 더욱 더 우리를 어리둥절하고 당혹스럽게 하는 사실은 세상이 하나님의 그런 사랑을 받을 이유나 조건을 전혀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의 존재 자체를 거부했습니다. 하나님께 도전하고 반역했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싫어했습니다. 파멸과 죽음의 길을 어리석게 고집하며 숱한 경고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커녕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미워하사” 라는 말씀이 나와야 납득이 되고 앞뒤가 맞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사 사랑하는 아들을 죽음의 고통에 넘겨주셨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나머지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하신 일이 자기 아들을 대신 죽이시는 일이었습니다. 이 사랑을 어떤 사랑이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인간을 지은 하나님이 인간 손에 죽으셨네 / 주가 싫어 멸시한 우릴 위해 죽임 당했네 / 무엇을 위한 사랑인지 / 무엇을 바란 희생인지 / 당신은 사랑에 눈 먼 주님” 겸손의 왕이라는 노래 가사의 일부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에 눈이 멀어 버리신 것 아닐까요? 우리의 상식과 경험을 초월하는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그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다고 노래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시는 지에 대해 다른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습니까? 로마서 5장 8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제 남은 것은 우리의 응답 뿐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냐 영원한 멸망이냐는 독생자 예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를 거절하는 것은 스스로 영생을 거절하는 것이요 멸망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17,18)”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심판이 따로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누리지 못하는 것 자체가 이미 심판 아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은 필요 없어. 나는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살거야” 하면서 그렇게 살면 자유하고 행복할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그런 삶 자체가 이미 심판입니다. 끝까지 착각 속에서 재물과 권력과 쾌락의 우상에 취해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생명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그 상태로 이미 심판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날 주님이 오시는 날에 있을 최후 심판은 이미 내려진 심판을 본인에게 확인시켜 주는 날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착각을 바로잡아주는 날입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이 임합니다. 이 구원 역시 장래에 얻을 구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 구원이 임하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영생은 오늘 나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복을 누리며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임하게 됩니다.

 

여기까지 내용을 들어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누구나 다 사랑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누구나 다 구원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누구나 다 생명력이 충만한 인생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멸망 당하고 심판 받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이러니한 사실은 여전히 세상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19)”

 

세상이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틀렸다고, 내가 잘못 살아왔다고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삶의 주도권을 나 이외의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나를 향한 사랑에 눈먼 주님에게도 내어주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에 교회 다니던 사람에게 상처 받은 적이 있어요.” “성경에는 구멍이 숭숭 뚫린 부분이 많다고 하던데요.” “지금은 아직 마음 준비가 안 되었구요. 나중에 나이가 더 들면 생각해 볼께요.”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숱한 이유와 변명을 만들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를 둘러댑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이유는 한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신 사랑의 하나님보다 그 아들을 죽인 세상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나타난 참 사랑보다 세상의 거짓 사랑을 선택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보다 권력을 더 사랑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보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더 사랑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20,21)”

 

이 세상에 죄인이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와 진리를 따르는 자는 분명히 나뉩니다. 여기서 악을 행하는 자는 어떤 사람을 가리킬까요? 죄가 죄인줄 알면서도 여전히 그 죄 안에 끝까지 머무르고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한 걸음 더 나아서 자신의 죄를 합리하고 내면의 어둠을 끝까지 감추며 겉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려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술과 음란에 빠져 이러다 망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부정을 저지르면 파멸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합니다. 왜냐하면 결과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나 당장 죄가 주는 달콤함이 내 혀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끝까지 자기를 믿고 자기 영광을 추구하려 합니다. 말씀의 빛 앞에 내 실존이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거부합니다. 결국 죄책감, 수치심, 절망감, 두려움과 같은 내면의 어둠을 감추기 위해 더 짙은 어둠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러면 진리를 따르는 자는 누구일까요?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죄를 죄로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범한 죄로 인해 마음이 상한 사람입니다. 절망적인 심정을 가지고 자비하신 예수님 앞에 엎드려 도우심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의 빛 앞에서 자신을 비추는 사람입니다. 그때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는 자신의 실존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아프고 부끄럽지만 얼굴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못 들은 체 하거나 자신을 정당화할 구실을 찾지 않습니다. 자신의 실존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이럴 때 성령님이 역사하시기 시작합니다. 나 하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이 원하시는 뜻을 물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성령의 열매가 조금씩 맺히기 시작합니다. 그 열매가 결국 그가 빛의 사람임을 드러내 줄 것입니다.

 

제가 약 15년 전에 썼던 ‘고슴도치 스토리’라는 시가 있습니다. 시의 제목에 나오는 고슴도치가 누구였을까요? 바로 과거의 제 모습이었습니다. 살다보니 가시로 찌르듯이 저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나를 보호하려고 가시를 박아 넣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보니 제 모습이 꼭 고슴도치 같았습니다. 이제 누구를 사랑할 수도 누구의 사랑을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저를 하나님은 대학생 때 목자님을 통해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을 가장 무섭고 큰 가시로 죄인을 심판하는 고슴도치의 대왕쯤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누구의 사랑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를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제게 사랑의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증거는 단 하나 뿐인 당신의 외아들이었습니다. 이 명백한 증거 앞에 저는 무장 해제하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내 안에 있던 날카로운 가시가 떨어져 나가고 두터운 가죽을 벗겨졌습니다. 저는 고슴도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거듭났습니다. 용서가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되었고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해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신 사건을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 이미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기에 믿고 놀랄 뿐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깨달은 만큼 전하고, 찬양하고, 고백할 따름입니다. 제가 그 사랑을 깨달은 만큼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이 제 안에 자리 잡을 것이라는 것은 압니다. 이 기막힌 하나님의 사랑을 점점 더 알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날마다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이신 예수님께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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