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창무 2021. 3. 14.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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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2 강 / 이창무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말씀 / 요한복음 1:19-34
요절 /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18절까지는 요한복음의 서문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이 서문의 주인공은 당연히 말씀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중간에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6-8)” 오늘 말씀은 바로 이 세례 요한과 그의 증언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증언하는 자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며 증언의 대상이 되시는 예수님은 누군가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19)” 예루살렘에서 사찰팀이 세례 요한에게 파견되었습니다. 그들은 분명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 기구인 산헤드린 소속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대뜸 세례 요한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가 누구냐” 이 질문 속에서 무엇이 느껴집니까? 불편함이 느껴집니다. 관심과 애정이 어린 질문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정말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로마와 결탁하여 부귀 영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천편일률적인 메시지는 울림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달랐습니다. 화려한 예루살렘을 뒤로 하고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옷차림만으로도 주눅이 늘게 하는 술이 긴 흰 옷 대신에 약대 털옷을 입었습니다. 요한의 메시지는 거칠고 투박했지만 진정성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이런 세례 요한의 등장에 열광했습니다. 대중들은 세례 요한의 삶과 말을 보면서 그가 혹시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기대를 품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래서 세례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누구냐? 네 정체가 도대체 뭐냐? 너의 배후가 누구이기에 겁도 없이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느냐? 네가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이 질문에 세례 요한은 어떻게 대답을 했습니까?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되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20)” ‘드러내어 말하되 숨기지 아니했다’는 표현이 역설적으로 얼마든지 숨길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당신들이 알아서 판단하시오.’ 또는 ‘난 노 코멘트 하겠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과 인기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명명백백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종교 지도자들은 ‘네가 엘리야냐’고 물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죽지 않고 불 병거를 타고 승천한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세례 요한은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리라고 했던 그 엘리야가 바로 세례 요한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정체를 예수님만큼 분명하게는 모르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더욱 훌륭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엘리야라는 분명한 인식이 없는 상태에서 엘리야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세한 형제님이 목자 선서도 하기 전에 사실상 목자처럼 살았던 것과 흡사합니다. 아무튼 그들은 참 집요합니다. 또다시 세례 요한에게 그 선지자냐고 물었습니다. 이는 모세가 죽기 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18:15)’라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예언을 메시아의 출현을 내다보는 말씀으로 간주했습니다. 전라도에서는 ‘거시기’ 하면 다 통하듯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그 선지자’ 하면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통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도 세례 요한은 또 ‘아니라’ 부정을 했습니다. 요한의 대답 속에는 세 번의 ‘아니다’가 이어집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누가 아닌지를 아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만큼이나 무슨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설령 그 일이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일인 듯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인 듯 보인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고 칭찬할 때 우리는 ‘아닙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겉으로만 사양할 뿐 속으로는 그 말을 고스란히 다 받고 즐거워할 때가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우리는 내가 이 세상에서 주류가 되기를 원하고, 어디를 가든 조연보다는 주인공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안 되면 내 자녀만이라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단지 세인의 주목을 받고 싶어 합니다. 하지는 우리는 속아서는 안 됩니다. 그 자리를 유지하기가 얼마나 힘든 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걸린 시간에 비하면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시간이 얼마나 짧은 지, 그 자리에 어울리게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든 지 잘 모릅니다. 그 자리가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자리를 나를 삼키고 말 것입니다. 명성과 평판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노예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나는 아니라’ 하는 세례 요한의 단호한 자기 부정을 발견합니다. 내가 자꾸 나 이상이 되려고 할 때 우리가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앞에 해야 할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나는 아니라. 나는 아니라. 나는 정말 아니라.”

세례 요한이 세 번이나 부인하자 속이 탄 쪽은 사찰팀이었습니다. 그들은 보고할 건수를 하나라도 건지기 위해 노골적으로 물었습니다.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22)” 이에 대한 세례 요한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23)” 세례 요한은 이사야 40장 3절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혔습니다. 이사야 40장은 1장부터 39장까지 심판의 메시지가 끝나고, 40장부터 66장까지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시작하는 장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이 회복의 소식, 위로의 소식을 전하는 역할이 바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다. 세례 요한은 어디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찾았습니다. 사람들의 요구와 기대에 끌려 다니지 않았습니다. 나 자신을 기준점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주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발견했습니다. 덕분에 그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굳게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왜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라고 하지 않고, 하필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을까요? 소리는 잠깐 동안 메시지를 전달하고 곧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이 이런 소리처럼 주의 메시지를 전하고 곧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겸손한 사람이 있을 수 있나요? 혹시 세례 요한의 진심이 아니라 그냥 겸손해 보이려고 한 말이 아닐까요? 사찰팀이 바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질문했습니다.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25)” ‘정말 너의 말대로 아무 것도 아닌 자라면 조용히 찌그러져 있을 것이지 어째서 세례를 주고 난리법석을 피우느냐’라는 뜻의 질문입니다. 이에 대해 세례 요한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26,27)” 그의 대답이 어떻습니까? 무슨 자격으로 세례를 주냐는 질문에 나는 아무 자격도 없다며 답하고 있으니 완전히 동문서답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세례 요한의 숨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더 이상 나에 대해서 관심 가지지 말아 달라. 나는 이 정도로 관심을 둘만 한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대신 내 뒤에 오시는 이 곧 예수님에게 관심을 가져 달라는 호소입니다. “여러분! 저를 그리스도로 보신 것 같은데 잘못 보신 것입니다. 제가 그분의 신발 끈도 못 풀 정도라면 그분이 어떤 분이실지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타락한 성전을 떠나 광야에서 지냈다면 그분은 더욱 낮은 곳으로 더욱 소외 받는 곳으로 향하실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야성을 담아 선포했다면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분은 그 이상의 분이 되실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이 하고 싶은 이야기였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한 사람을 한 사람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주저 없이 세례 요한을 꼽고 싶습니다. 어떤 역할이었습니까? 바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과 자기 자신의 증인이 동시에 될 수 있을까요? 자기 자신이 대단히 뛰어나다는 인상을 주는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전능한 구세주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설 수 없습니다. 증언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증언자는 죽어야 합니다. 증언이 돋보이기 위해서 증언자는 사라져야 합니다. 증언자가 가장 위대해지는 순간이 언제입니까? 증언만 남기고 사라지는 때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 역설의 진리를 온 몸으로 살아낸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가리켜 이제까지 여자가 나은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다음의 말을 남기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이 말씀대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증인들이 본받아야 할 탁월한 모델인 세례 요한의 말과 행동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힘을 다해 섬기는 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일입니다. 교회에서 맡은 직분에 충성하고 열심을 내는 일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 주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내 몫은 어디에 있는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됩니다. 지금 누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바로 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말씀을 전하고 나면 누군가 ‘말씀이 너무 좋았다. 은혜 많이 받았다.’는 말을 해 주기를 바랍니다. ‘능력 있다. 잘 하고 있다.’는 칭찬 듣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말을 가끔 들을 때마다 ‘아닙니다. 별 말씀을요. 제가 많이 부족합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무척 즐거워합니다. 동시에 이런 제 모습이 너무 혐오스럽습니다. 이런 감정 때문에 괴로워서 어디로 가서 숨고 심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려고 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고 있지 않습니다. 내 명예도 생각하고 늘 사심이 섞여 있습니다. 솔직히 내 만족을 위해 목자 생활하는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런 점을 인정하고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늘 사람들의 칭찬이 아니라 오직 한 분의 청중이신 하나님의 칭찬만을 기대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길 가에 세워진 이정표가 딴 생각하지 않고 충실하게 한 방향만을 지시하듯이 제가 오직 예수님만을 충실하게 가리키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가 세례 요한처럼 위대한 증인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음날 세례 요한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예수님을 주위 사람들에게 거리낌 없이 증언했습니다. 그가 증언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b)” 죄를 지고 간다는 표현은 죄는 마치 짐과 같다는 것을 시사해 줍니다. 무거운 짐을 지면 어떻게 됩니까? 눌립니다. 압박감에 숨을 쉬기조차 힘들어집니다. 지쳐 쓰러지게 됩니다. 죄가 똑같습니다. 죄를 범하면 영혼이 눌립니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결국 내면 세계가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님들이 ‘죄 짓고는 못 산다’고 하셨습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발 뻗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하루 빨리 죄의 짐을 훌훌 벗어 던지고 자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이 죄의 짐을 벗을 수 없습니다. 짐을 벗기는커녕 점점 더 무거워질 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군가 내 대신 짐을 가져가 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대신 짊어 지시고 가져가 버리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십니다. 어린 양이란 표현 속에서 예수님께서 죄 문제를 처리하신 방식이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로 가져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 길로 올라가던 그 길에서 계속 쓰러지고 또 쓰러지신 이유는 우리의 지은 죄의 무게가 그만큼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다 끌어 안고 죽으심으로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셨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실 바로 메시야께서 자기 눈앞에 나타나셨을 때 세례 요한은 가슴 속에서 벅차 오르는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렇게 소리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둘째,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33)” 물 세례와 성령의 세례가 대조되고 나타나 있습니다. 물 세례는 본래 유대교에서 이방인이 입교할 때 행하던 의식이었습니다. 이방인은 죄로 인해 부정해졌으니 물로 씻음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이 물 세례를 유대인을 향해서 시행했습니다. 이는 곧 유대인인 너희 역시 이방인이나 별반 다를 것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요한의 물 세례는 죄를 깨닫고 뉘우치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세례였습니다. 그러나 물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 세례로 온 몸을 씻을 수는 있지만 한 사람의 영혼까지 씻어 새롭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성령 세례는 성령 안에서 죄를 씻어 없에 주시고 죽었던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합니다. 누가 이런 성령 세례를 베푸실 수 있겠습니까?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밖에는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두 번이나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예수님을 전혀 몰랐다는 뜻은 아닙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인 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점은 전에 몰랐으나 이제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34)”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을 통해 그가 왜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 거듭 말하며 부정할 수 있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리쌍의 ‘겸손은 힘들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겸손 겸손은 힘들어 겸손 겸손은 힘들어” 왜 겸손이 이토록 힘든 것입니까? 나의 작음을 아는 것이 왜 이렇게 버거운 것입니까? 왜 나는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지 못하고 자꾸 사심이 들어가는 것입니까? 인정 문제에 평생 시달려 왔으면서도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웅재 목사님이 쓴 ‘소원’이라는 노래 가운데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나의 작음을 알고 그분의 크심을 알며” 나의 작음을 아는 것과 그분의 크심을 아는 것은 서로 깊이 맞물려 있습니다. 나의 작음을 알면 알수록 그분의 크심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반대로 그분의 크심을 알면 알수록 저절로 나의 작음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하나님의 아들, 이렇게 크신 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놀라운 분과 비교할 대상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왜 여전히 그분의 크심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는 우리가 그분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기 보다는 내 자신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기 보다는 세상에 대단해 보이는 것들, 돈과 아파트와 자동차와 미모와 간판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세례 요한은 여전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우리가 세상과 자신만을 바라보던 눈을 들어 예수님께 집중하고 그분께 날마다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어린 양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를 정결하게 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부터 우리가 세례 요한을 이어 어둠 가운데 있는 세상과 캠퍼스를 향해 예수님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되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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