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창무 2021. 3. 7. 14:41
반응형

2021년 요한복음 제 1 강 / 이창무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 / 요한복음 1:1-18
요절 /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클래식 음악의 장르 중에 서곡(Overture)이 있습니다. 윌리엄 텔 서곡, 에그몬트 서곡, 경비병 서곡 등이 유명합니다. 서곡은 오페라, 연극, 발레에서 처음에 연주되는 곡으로 이후의 분위기를 암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18절은 요한복음 전체의 서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밝고 경쾌한 행진곡 풍의 윌리엄 텔 서곡과 같은 분위기는 확실히 아닙니다. 장중하고 위엄 있는 에그몬트 서곡의 분위기와 흡사합니다. 이 서곡에 흐르는 메인 선율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곧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왜 하필이면 말씀으로 표현했을까요?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인데 이성, 원리, 계시 등의 의미로 폭넓게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헬라인이면 모두 다 아는 말이었습니다. 특히 헬라 철학자 중 스토아 학파는 ‘우주를 지배하는 이성적 원리’가 있는데, 이것을 로고스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떻습니까?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말씀을 헬라어로 번역하면 로고스입니다. 그런데 로고스를 추상적인 관념으로 여긴 헬라인들과 달리, 유대인들은 말씀을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를 전달하는 인격적인 실체로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이라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헬라인들에게는 ‘너희가 로고스, 로고스 하는데, 예수님이 바로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바로 그 분이야.’ 하는 메시지가 됩니다. 또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이 바로 구약의 그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야’ 하는 메시지가 됩니다. 이처럼 말씀은 당대의 헬라인과 유대인 모두를 아우르는, 꿩 먹고 알 먹고, 마당 쓸고 동전 줍고, 도랑치고 가재도 잡는, 아주 절묘한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서문이 노래하는 말씀이신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어떤 분일까요?

첫째, 말씀은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1,2).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 요한복음의 첫 문장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1a)’입니다. 이 구절은 자연스럽게 창세기 1장 1절(‘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습니다. 모든 세계가 생기기 전부터 계시는 분이 누구이겠습니까?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신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1b). 여기서 ‘말씀’은 성자이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성부이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또 ‘함께’라는 단어의 원어는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을 표현할 때 쓰는 전치사입니다. 몇 주 전 이 레베카 자매님의 결혼식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신랑과 신부가 예물을 교환한 뒤 잠시 서로를 마주 보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약간 오글거리긴 하지만 애정이 가득한 눈빛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보통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으르렁거리는 눈빛으로 마주 볼 때도 많은데,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마치 신랑 신부처럼 친밀하고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두 분 사이에는 비밀이 전혀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다 아시고 아들은 아버지를 모두 아십니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빗대어 설명하다 보면 자치 빠지기 쉬운 오해가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고 성자 예수님은 그에 좀 못 미치는 부족한 하나님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1절은 이렇게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c)”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십니다. 성부와 마찬가지로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 예배 때마다 찬송가 10장을 부르며 1절에서는 성부 하나님께, 2절에서는 성자 예수님께, 3절에서는 성령 하나님께, 이렇게 성삼위 일체께 한 없는 찬송을 드리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초반부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랍비’ 곧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뒤로 가면 갈수록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기 시작합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이 불경이 될까 싶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대신하여 부르던 호칭이었습니다. 이것은 어느 순간 제자들 마음 속에서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인식의 대전환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은 제자들이 어떤 사건 또는 어떤 말씀을 통해서 이런 인식의 대전환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이 주제는 우리가 지난 두 달 동안 공부했던 골로새서와 맥이 닿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힘주어 선포했습니다. 왜 그리스도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아무리 위대한 분이라 해도 단지 한 인간이었다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한계가 없으십니다.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파고 또 파도 다 알 수 없는 신비한 분이십니다. 제가 요한복음 서론 마지막 부분에서 바다 사진을 보여드렸습니다. 왜 바다였을까요? 바다는 어린아이가 해안가에서 물장구치며 재밌게 놀 수 있는 곳입니다. 동시에 그 어린 아이의 수백 수천 배에 달하는 고래가 헤엄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세계가 이 바다와 같습니다. 우리 중에 많은 분들이 그 동안 요한복음을 여러 차례 공부했습니다. 이번 학기 요한복음을 시작하며 우리가 ‘또 요한복음?’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탐구해야 할 예수님의 세계는 아직 깊고도 넓습니다. 요한복음을 통해 우리의 눈이 열려 예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요한복음을 통해 깊고 넓은 예수님의 바다 속으로 우리가 ‘풍덩’ 하면서 빠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말씀은 만물을 지으셨고 생명과 빛을 주십니다(3-13).

신랑 신부가 결혼하여 사랑으로 하나되었을 때 어떤 결실을 맺게 됩니까? 바로 자녀라는 새 생명이 태어납니다. 이처럼 영원 전부터 계셨던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친밀한 교제와 사랑 가운데 생겨난 것이 무엇입니까?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3)”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통해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의 ‘천지창조의 목적’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창조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언가 부족해서 피조물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서로의 관계를 통해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왜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너무나 풍성하여 차고 넘치기 때문에 이를 나누어 주기 위해 피조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말에 비추어 보면 흔히들 하나님께서 외로워서 사람을 지으셨다 하는 생각은 큰 오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외로워서’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사랑이 차고 넘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 충만한 것을 우리에게 무한대로 나누어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분 안에 있는 충만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4)” 바로 생명과 빛입니다. 생명과 빛이 없는 우주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것이 다 죽은 것뿐이라면, 빛이 전혀 없는 칠흑 같은 어둠 뿐이라면 얼마나 삭막할까요? 따지고 보면 피조된 세상이 얼마든지 그런 모습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우주에는 생명이 있고 빛이 있습니다. 생명과 빛은 과학자들이 여전히 그 실체를 다 파악하지 못한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사람을 콕 집어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유일한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체의 생명과 물리적인 빛을 넘어서는 영적인 생명과 빛이 필요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과 빛으로 가득한 복음서입니다. 생명이란 단어가 무려 19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말씀하셨고, 자신이 온 이유는 사람들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기 위함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빛이라는 단어도 16번이나 반복됩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9)” 예수님은 자신 안에 충만한 생명과 빛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빛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두 가지 서로 상반된 반응이 있습니다. 
첫째 반응은 빛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했습니다(5).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10).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습니다(11). 영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십자가 못박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입니까? 사람 안에 있는 어둠이 너무 깊기 때문입니다. 너무 깊어서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빛을 피하고 거부하려고 합니다. 이런 심정이 가수 비가 부른 ‘태양을 피하는 방법’이라는 노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울고 있는 나의 모습 / 바보 같은 나의 모습 / 환하게 비추는 태양이 싫어 태양이 싫어 / 누군가 날 알아보며 / 왜 우냐고 물어보면 / 대답을 해줄 수가 없는게 너무 싫었어” 이처럼 사람들은 어둠 때문에 고통을 받으며 울면서도 빛이신 예수님 앞에 그런 내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지독하게 싫어합니다.
두번째 반응을 빛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2,13)” 모두가 다 빛을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접하는 자, 예수 그 이름의 능력과 권세를 믿는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엄청난 특권이 주어집니다. 자녀에게는 미래에 부모의 유산을 물려 받을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물려 받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자녀의 가장 큰 특권은 부모와 막힘이 없이 소통할 수 있는 권리, 부모에게 사랑을 받을 권리, 사랑을 누릴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소원을 아뢸 수 있는 권리,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누릴 권리가 생깁니다. 그런데 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인간 조건이나 사람의 노력이나 의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납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영접하는 것은 내 의지와 선택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이번 겨울 방학 목자 학교에서 12명이 졸업을 했고 지난 금요일 목자 선서식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선서한 분들 대부분이 목자의 가정이나 선교사의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분들입니다. 본인들은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분들이 부러울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내가 목자의 가정에서 2세로 태어났으면 내 어린 시절보다 훨씬 더 구김살 없는 밝은 인생을 살았을 텐데’하는 엉뚱한 생각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환경 아래서 성장한다고 해도 한계는 분명히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부모라 해도 자녀 안에 있는 어둠과 죽음의 세력을 대신 몰아낼 수는 없습니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목자 학교 졸업 소감을 들으며 이 분들 각자에게 예수님께서 생명의 빛으로 임하셨음을 보고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각각 나름대로 빛을 피하여 어둠에 머무르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엎치락뒤치락하는 갈등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빛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 결과 한 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즐겁게 누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 다른 분은 예수님 안에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깊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또 어떤 분은 나를 어둠과 죽음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그 은혜에 대한 감사로 충만했습니다. 목자들이 주신 선물들을 한 보따리 씩 들고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 오늘 본문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삼위 하나님 사이의 교제와 사랑 가운데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분이십니다. 자신의 충만함 가운데 모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기꺼이 나누어 주고자 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심을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빛으로 임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무지를 깨닫고 진리를 알게 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셋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14-18).

성경은 총 몇 개의 절로 나누어져 있을까요? 30,993절이라고 합니다. 그 많은 구절 중에서 가장 놀랍고 신비한 구절이 어디일까요? 사람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묻는다면 저는 주저없이 요한복음 1장 14절을 꼽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제까지 살펴본 말씀은 어떤 분입니까? 태초부터 계시던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분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강력한 빛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그 말씀이신 분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믿겨 지십니까?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감히 누가 상상이나 해 본 적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만큼 놀라운 신비는 없습니다.

여기서 ‘거하셨다’는 표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본래 구약에서 성전을 가리킬 때 쓰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사이에 거하시기 위해서 장막을 펴신 것이 바로 성전입니다. 그런데 성전의 역사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부패로 말미암아 제 구실을 못하더니 마침내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을 불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영영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전은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무너진 성전을 대신하기 위해 누가 오셨습니까? 아예 하나님 자신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걸어다니는 성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 하나 하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처음에는 나사렛 출신의 목수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그 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예수님 안에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맛보았습니다. 은혜와 진리는 택하신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언약적인 사랑의 본체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율법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은혜와 진리라는 더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것도 은혜인데 은혜와 진리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주시니 은혜 위의 은혜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볼 수가 없을 뿐더러 설령 본다 해도 곧장 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신 분처럼 거리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품속에 있던 독생하신 하나님 곧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온전히 나타내셨습니다. 

얼마 전 뉴스에 한 치킨집 사장이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치킨이 먹고 싶지만 너무 가난하여 수중에 오 천원 밖에 없던 두 형제에게 수 차례나 공짜로 치킨을 대접한 홍대 한 치킨 집 사장님에 대한 사연이었습니다. 이 사연을 듣고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이런 사람은 돈쭐을 내주어야 한다고 난리가 났었습니다. 돈쭐이란 ‘돈으로 혼쭐을 내준다’는 뜻입니다. 이후 너무 많은 주문이 폭증하여 이 치킨 집은 현재는 휴업 중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은혜도 모르고 진리도 모르고 아무 것도 없는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저 높고 높은 하늘에서 이 낮고 낮은 땅으로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이 땅 가운데 오시되 비천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시고 일생 죄인들을 섬기시다가 마침내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너무나 엄청난 이야기라서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구요? 그러나 이 스토리는 치킨집 사장의 이야기처럼 이것은 소설이 아니고 엄연한 실화입니다. 그런데 아직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우리의 증언과 고백이 필요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가 앞으로 요한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광과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누리고 경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