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예수님

이창무 2021. 3. 21.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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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3 강 / 이창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예수님

 말씀 / 요한복음 2:1-11

요절 / 요한복음 2: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전라도 잔치에서는 다른 음식은 없어도 홍어만 있으면 손님 대접이 된다고 할 정도로 없어서는 안 되는 음식입니다.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도 홍어가 없으면 여지없이 “워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드만 딱 그 짝이여. 후손들이 그라면 안 되제”라는 소리가 나오고 맙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찾아가신 곳이 바로 이 결핍의 자리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집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결국에 맞닥뜨리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풍성한 듯 보이지만 참다운 기쁨이 없는 인간의 자리가 예수님에 의해 어떻게 최고의 기쁨을 누리는 자리로 변할 수 있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1,2)” 

사흘째 되던 날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이었습니다. 그 첫 무대가 혼인 잔칫집이었습니다. 이것이 과연 우연이었을까요? 구약 성경에서 혼인 관계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중요한 은유였습니다. 또한 혼인 잔치는 하나님의 구원이 주는 풍성함과 기쁨을 상징해왔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한 바 있었습니다.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62:5)”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신부로 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신랑이십니다. 아니 바람난 신부를 용서하시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신랑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공생애 첫 기적의 장소로 선택하신 곳이 혼인 잔칫집인 것은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혼인 잔칫집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지라(3a)” 

당시 혼인 잔치는 약 일주일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이때 쓸 포도주를 결혼식 일년 전부터 담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요 예측을 잘못 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너무 마셔버린 것일까요? 아무튼 포도주가 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한창 무르익은 잔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제 곧 하객들은 불평과 욕지거리를 내뱉고 나갈 것입니다. 신랑 신부는 썰렁한 식장 앞에 풀어 죽은 채 주저 앉을 것이고, 그들을 바라보는 부모는 안쓰러운 마음에 눈물을 글썽이게 될 것입니다.

 

파국이 눈 앞으로 다가온 이 위기의 상황에 누가 나섰습니까?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3b)” 

아마도 마리아는 단순한 하객이 아니라 일손을 거들기 위해 이 자리에 와있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다’고 말한 것은 그저 사실을 전달하려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큰 일이 났으니 어떻게 하든 해결해 달라, 제발 도와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4)” 

의외의 반응이었습니다. ‘여자여’라는 표현은 결코 무례한 표현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어진 대답은 좀 냉정하게 느껴집니다. ‘왜 이 일을 저와 관련시키십니까?’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대답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이 대답은 마리아와 예수님과 관계가 예전과 같지는 않을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막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은 더 이상 마리아의 아들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예수님은 어머니이든 누구든 사람의 권위 아래에 있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람들의 긴급한 필요나 소원에 따라 무조건 움직이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동하시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덧붙이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때’라는 단어가 중요하게 사용됩니다. 때를 둘러싸고 요한복음 전체에 긴장감이 흐릅니다. 사람들 혹은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자신들의 때를 따라 움직이실 것을 요구합니다. 예를 들어 마르다와 마리아가 오라비 나사로가 중병에 걸렸으니 예수님께 당장 와서 고쳐 주실 것을 기대하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틀을 더 머무십니다. 왜냐하면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고 나서야 움직이기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필요에 따라 끌려 다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때를 향해 가시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때에 대해 무지한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 도무지 예측이 안 되는 분, 심지어는 냉정한 분, 무심한 분이라는 인상을 갖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주님이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 대해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단다” 라고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기어이 수치스러운 그 자리에 계속 그대로 머물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합격이나 진급을 위해 기도했지만 계속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자녀를 위해 부르짖어 기도했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 이러다가 다 망하게 생겼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묻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은 오늘도 냉정하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단다”는 대답만 하십니다. 냉정한 대답조차 듣지 못하고 그저 침묵만 돌아올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원하는 때와 예수님의 때가 어긋나고 있음을 느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마리아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합니다(5). 마리아는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거절 당했다고 여기거나 마음이 상하지 않았습니다.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셨지,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지는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때가 이르면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는 의미로 긍정적인 의미로 마리아는 받아들였습니다. 왜 아직은 때가 아닌지, 그래야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때가 이르러 주님이 일하시기 시작하실 때 무엇이 필요한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하인들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며칠 동안 함께 일하며 친해진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무엇이든 순종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놓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마리아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이런 모습이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하시는 방아쇠(Trigger)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인들로 하여금 돌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가득 채우도록 하셨습니다. 돌 항아리 여섯 개를 채우려면 두 드럼통 반 정도 되는 상당히 많은 양의 물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지금 필요한 건 물이 아니라 포도주였습니다. 피곤하고 바쁜 하인들이 이 명령에 순종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인들은 말씀대로 물을 채웠습니다. 아구까지 채운 것을 볼 때 억지로 순종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드려 순종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로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것은 연회장을 물 먹이는 것 아닙니까?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이번에도 하인들은 말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기적은 하인들의 순종이 없어도 일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순종했을 때 하인들은 가장 실감나게, 가장 극적으로, 그리고 가장 먼저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야 주님께서 일하기 시작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 ‘하나님의 때가 언제인가’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기 쉽습니다. “어느 때에 결혼할 것인가?” “어느 때에 승진할 것인가?” “어느 때에 이 병에서 완치될 것인가?” “내 기도에 하나님께서 언제 응답해 주실 것인가?”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때가 정확히 언제인가 말씀해 주지 않으십니다. 왜 지금은 하나님의 때가 아닌지, 무슨 이유 때문에 당장 응답해 주시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지 않으십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해도 너무 하십니다. 어떻게 저에게 이러실 수 있어요?” 하면서 원망하기 쉽습니다. 또는 “하나님의 때가 언제든 상관이 없어요. 내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면 아무 의미도 없어요.” 하면서 빠르게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증명하는 바가 있습니다. 바로 이 모습이 주님이 일하실 때 내가 함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직 하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일하시는 주님께서 사사로운 요구를 앞세우는 사람과 어떻게 함께 일하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을 위해 예수님은 기꺼이 일하려 하시지만, 여기에 가장 큰 장애물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일지도 모릅니다. 이 사실을 깨우쳐 주시려고 예수님은 처음에는 거절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셨다가, 마리아를 통해 하인들의 순종이 준비되자 잔칫집의 곤란한 상황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떤 처분을 내리시더라도 그대로 따르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하겠다, 결코 주님보다 앞서 가지는 않겠다는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순종할 때 우리가 주님께서 친히 이루시고 만들어 가는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느 때에 이루어질 것인가 보다 더 관심을 기울어야 할 것은 우리가 순종의 사람으로 준비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당장 이루는 것보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 주님이 일하기 시작하실 때 주님께서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는지 여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코로나로부터 우리가 언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올해 안에 될까요? 변종이라도 생겨서 몇 년을 더 끌게 될까요? 누가 알겠습니까? 중요한 건 그 시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가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 새 역사를 창조하시고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실 때 우리가 준비되어 있을까?” 우리가 하인들처럼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할 수 있는 순종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에 동참하여 주님의 영광과 능력을 체험하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9a)” 

분명히 하인들이 갖다 준 것은 물이었는데 연회장이 받아 마신 것은 포도주였습니다. 이어지는 연회장의 말을 들어 보면 포도주의 질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9b,10)” 

어떤 잔치든 시작할 때 최상급 포도주를 내놓습니다. 그러고는 하객들이 포도주를 많이 마셔 미각이 둔감해질 때쯤 질 낮은 포도주를 내놓습니다. 이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 당대의 상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만드신 포도주는 “Made in Heaven”이라는 라벨이 붙어 있는 최상급 포도주였습니다.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것도 놀랄 일이고 질 낮은 포도주면 충분한데 최상급 포도주를 공급해 주신 것도 놀랄 일입니다. 게다가 돌 항아리 여섯을 가득 채울만큼 많은 포도주를 만드신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축복을 넘어서는 필요 이상의 지나친 축복입니다. 이로서 수치를 당할 뻔했던 잔치가 신랑이 칭송을 받는 잔치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두가 풍요롭게 즐길 수 있는 멋진 잔치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아한 일이 있습니다. 연회장의 말에 대한 신랑의 반응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신랑의 반응이 전혀 나오지 않고 갑자기 이야기가 끝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신랑의 반응의 나오지 않은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신랑이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최상급 포도주를 준비한 적이 없으니 자기도 무척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이 혼인 잔칫집에서 최상급 포도주를 준비한 신랑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자기 백성과 새 언약을 맺으러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11)” 

표적이란 의미를 담은 기적을 말합니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심으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영광을 보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이 표적 가운데 예수님의 영광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만물의 창조주로서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앞선 1장 요한복음의 서문 속에서 사도 요한은 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지은 바 되었고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증거하였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분 앞에서 모든 만물은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물을 만드시고 알코올도 만드시고 포도도 만드신 창조주께서는 얼마든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수 있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시인 바이런이 있습니다. 바이런이 캠브리지 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일 때 신학 과목 학기말 고사 논술 시험으로 ‘가나 혼인 잔치’에 대하여 논하시오.’라는 문제가 나왔다고 합니다. 바이런은 답안지에 이 딱 한 문장을 쓰고 제일 먼저 나갔다고 합니다. “물이 자기의 창조주를 보고 그 얼굴을 붉혔도다!” 바이런은 이 한 문장으로 최고점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둘째, 예수님은 우리 존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분입니다. 

사도 요한은 포도주로 변한 물이 담겨 있던 항아리를 필요 이상으로 자세하게 언급합니다.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6)” 

유대인의 정결 예식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몸을 씻어 준비하던 예식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이 예식을 일상 생활에까지 확대하여 당시 유대인들은 외출했다가 집에 들어올 때마다 반드시 손을 깨끗하게 씻도록 했습니다. 단지 위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종교적으로 부정한 것을 씻기 위한 의식이었습니다. 유대교는 이 정결 예식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었다가 바리새인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15:19,20)” 

유대교의 한계가 여기서 잘 드러납니다. 정결 예식은 사람의 겉만 깨끗하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정작 사람을 더럽게 하는 마음의 악한 생각과 탐욕을 씻어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을 결코 깨끗하게 할 수 없는 유대교의 시대를 끝내시고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는 새 시대를 열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듯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교육이나 제도도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나 자신도 나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오직 변화의 능력자 예수님만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셋째, 예수님은 우리에게 최상급의 기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살다 보면 혼인 잔치같이 재미있고 살맛 나는 일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아도 포도주가 있기에 흥이 나는 것이 이 세상의 삶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지면 한순간에 기쁨이 근심으로 바뀌고, 명예가 수치로 바뀌는 것이 이 세상의 즐거움이다.” 포도주 자리에 돈을 놓아도 좋고, 포도주 자리에 사람이 주는 사랑과 애정을 가져다 놓아도 좋습니다. 저는 한동안 막내딸과 노는 것이 즐거움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러나 막내가 사춘기가 되면서 아빠를 데면데면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의 낙이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나를 즐겁게 하던 것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은 세상의 한계와 그 한계가 주는 결핍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우리를 기쁘게 해주던 것들이 사라져 버릴 때 우리는 고통을 받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곤경에 빠진 바로 그 때가 새로운 복의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최상급의 기쁨을 맛보게 될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은 무엇입니까? 구원의 기쁨, 죄사함의 기쁨, 영생의 기쁨,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포도주처럼 붉은 피를 흘리신 십자가로 완성된 최고의 기쁨입니다. 이제 다시는 고갈되는 일이 없을 영원한 기쁨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의무와 관습 찌든 종교행위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겉모습만 물로 씻어내는 정결 예식에 매달리는 유대교와 같은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주시는 천국산 포도주를 마시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술을 안 마셔도 술 마신 사람보다 더 즐겁고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허무한 잔치를 멀리 합시다. 우리 삶에 예수님을 초대합시다. 그래서 우리가 언젠가는 고갈될 수밖에 없는 세상 기쁨에 만족하기보다 예수님 안에 있는 최고의 기쁨을 누리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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