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창무 2021. 3. 28.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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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4 / 이창무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말씀 / 요한복음 3:1-10

요절 / 요한복음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넘사벽이라는 말 아시죠? 성경에 넘사벽 같은 인물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의 주인공이 니고데모입니다. 그런데 어떤 넘사벽도 넘을 수 없는 고차원의 세계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거듭남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거듭남의 진리를 발견하고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1)”

 니고데모는 바리새인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율법 교육을 받고 철저한 율법 준수를 서약하고 평생 이를 실천에 옮겨왔습니다. 또한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였습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라는 말은 72명으로 구성된 유대의 최상위 자치기구인 산헤드린의 공회원이었다는 말입니다. 10절에 보면 니고데모는 또한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란 직업이 교사라는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세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만 얻어도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이 세 가지 모두를 한 몸에 성취했습니다. 니고데모라는 이름은 아무래도 본명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니고데모는 헬라어로 백성의 정복자라는 뜻입니다. 마치 조용필 씨를 가왕이라고 부르듯, 니고데모는 주위 사람들이 그에게 헌정해 준 이름일 것입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

 이런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왜 하필 밤에 왔을까요? 예수님은 이미 유대 성전 당국자들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낙인 찍힌 상태였습니다. 니고데모가 이런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스캔들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니고데모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밤에 찾아올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굳이 밤이라는 시간대를 언급한 것은 무언가 암시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니고데모는 누구보다도 밝은 대낮 같은 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화려하고 반짝 반짝 빛나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실상 깊은 어둠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종종 누구나 다 아는 유명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할 때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장국영의 죽음이나 최진실의 죽음이 그런 경험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순간이 겉으로 드러난 밝음 이면에 숨겨져 있던 깊은 어둠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니고데모 역시 그의 영혼에 남들은 모르는 어둠이 드리워져 있던 것 아닐까요?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유대교에는 랍비가 되는 정규 코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정규 코스를 밟으셨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고데모가 왜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을까요? 이는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표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니고데모도 랍비였습니다. 그것도 유명한 랍비였습니다. 하지만 선생이라고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때로는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해줄 선생님의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니고데모가 체면이 구겨지는 것을 무릅쓰고도 예수님을 찾아올 수밖에 없게 만든 그 질문이 무엇이었을까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니고데모의 고민은 분명 하나님 나라였을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인생 목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을까요? 바리새인이였으니 당연히 율법 준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만약 율법 준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아갈 수 있다면 니고데모는 그 누구보다도 일순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니고데모라면 하나님 나라에 가장 먼저 누리고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떻습니까? 니고데모는 하나님 나라의 평안과 기쁨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과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도 없었습니다. 이 길이 과연 맞는 길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다른 길이 있을까? 그 길이 무엇일까? 아무리 고민하고 씨름해 봐도 영 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출구 없는 막다른 골목에 갇힌 느낌, 이것이 니고데모의 현 주소였습니다.

 요한복음 안에서는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영생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의 고민은 다음과 같은 말로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또는 “어떻게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더 일반화한다면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까?”라는 말로도 바꿀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사람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답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름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답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 답을 이루어 내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선행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선을 행하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이름을 남기고 싶었지만 무명으로 사라지고 돈을 많이 벌고 싶었지만 일생 실패만 거듭하기도 합니다. 오직 극소수만이 이 답을 성취해 냅니다. 그런 사람은 정말 자신이 원하고 바라던 대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천국을 맛볼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룰 만큼 이룬 것 같은데 바라던 것과는 여전히 멀게만 느껴집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니고 별것이 없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답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답이란 말인가?” 묻지만 뾰족한 해답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흔히들 아직 이루지 못한 사람의 갈증보다 이미 이룬 사람의 허무가 더 고통스러운 법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해답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예수님의 해답은 거듭남이었습니다. 거듭남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은 한 번의 출생을 통해 이 세상에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 한 번의 출생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한 번 더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 한 번의 출생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거듭나기 전 인간의 상태는 육은 살아서 움직이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영적 감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세계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영적인 세계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이 증언하고 있는 충만한 은혜와 진리의 세계가 전혀 다가오지 않습니다. 빛이 없는 어둠의 세계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영적 생명이 새롭게 그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이 영적 생명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난다 하는 말은 “위로부터 난다” 라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연적인 생명은 땅에서부터 온 것이라면 영적인 생명은 위로부터 즉 하늘로부터 주어진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한 니고데모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4)”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첫번째 출생과 똑 같은 육적인 출생으로 잘못 이해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거듭남이 무엇인지 부연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

 이 말씀을 통해 거듭난다는 것이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물 따로, 성령 따로”가 아니라 물과 같은 성령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에스겔서 36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게서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거듭난다는 것은 물처럼 씻으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한 사람의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거듭나야 하나님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영적인 감각이 생깁니다. 들리지 않던 말씀이 들리고 찬양과 기도가 즐겁습니다. 캄캄한 어둠에서 나와 밝은 빛으로 들어갑니다. 거듭나기 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집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 자연적인 출생을 한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합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재탄생인 거듭남이야말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놀라운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포스터 헌팅턴’이라는 사진 작가 있습니다. 이분의 사진 세계가 매우 독특합니다. 그는 아무 집이나 찾아가서 집 주인에게 “만약 집에 불이 나서 수 분의 시간 밖에 주어지지 않는다면 무엇을 가지고 나오겠습니까?” 묻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 가지고 나와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집주인 가지고 나온 물건들을 사진 작품으로 찍어 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래 된 낡은 악보들을 챙겨 나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야구 글러브를 챙겨 나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노트북과 카메라를 가지고 온 사람도 있고 두툼한 편지 묶음을 들고 나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불타는 집에서 당신이 들고 나온 것이 바로 당신의 정체성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도 가능할 것입니다. “만약 내 인생이라는 집이 불에 타 없어진다 해도, 이것 하나만큼은 절대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니고데모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니고데모는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까 궁금합니다. 바리새인이라고 했을까요? 산헤드린 공회원이라고 했을까요? 이스라엘의 선생 칭호라고 했을까요?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게 하지 못하고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지도 못하는데,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약 이 질문은 나에게 한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할까요? 누가 저에게 묻는다면 저는 “거듭남”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만약 제가 부자가 되고 권력도 얻고 명예를 얻었다 할지라도 거듭나지 못했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설령 부자도 아니고 권력자도 아니고 이름도 없다 하더라도 거듭 났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 말씀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인생은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거듭남 하나를 건질 수 있다면 하나도 잃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삶에서 잃어버린 기회가 남은 기회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조건이 더 나아질 지 나빠질 지 잘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절대 실수하지 않고 잘 살 자신이 있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저는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맞이하고 내일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에게는 거듭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 동창들이 아무리 잘 나간다고 해도 별로 부럽지 않은 것은 제가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가의 아파트가 없으면 어떻습니까? 주식 대박이 터지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우리 안에는 위로부터 임한 영적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를 거듭 나게 하사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적 생명을 우리 안에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가 이 생명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나는 것 없이는, 즉 우리 스스로의 힘과 자원을 의지하고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6, 7절에서 설명하십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6,7)”

 육은 육이고 영은 영입니다. 육의 세계에서 진화해서 영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 사이에는 사람이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육의 세계 속에서 탑 클래스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육의 세계 속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에 이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봐야 여전히 육의 세계 속에 갇혀 있습니다. 영의 세계 속에서 바라보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일 뿐입니다.

 제가 어릴 때 주산 학원을 열심히 다녀서 5단까지 올라갔습니다. 학원 대표로 전국 주산 대회에 갔다가 한 번에 두 문제의 정답을 적는 희한한 사람을 한 명 봤습니다. 어떻게 된 것인가 물었더니 눈으로 암산하여 한 문제를 푸는 동시에 손으로 주판알을 튕겨 다음 문제도 푼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연마하여 어느 수준에 이를 수 있는지를 보고 경악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래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주산이 아무리 빨라봐야 엑셀에 넣고 돌리는 것보다 빠를 수는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지금까지 자기가 쌓아왔던 것을 바탕으로 하여 여기에 무언가를 하나 더 얹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 무언가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지금까지 늘 그래왔던 것처럼 나의 의지와 성실과 노력으로 감당할 용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새 출발을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니고데모의 모든 삶은 아무리 그 성취가 탁월하다 할지라도 모두 자신을 중심으로 한 육에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전혀 유익이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여기셨던 것일까요?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지 보충 설명해 주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8)”

 바람의 특징은 임의로 분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바람을 자기 뜻대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21세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봄철마다 중국에서 불어오는 서풍을 타고 황사가 한반도를 덮칩니다. 만약 우리 나라가 바람을 통제할 수 있다면 서해 바다 위에서 중국으로 바람을 되돌려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황사나 미세먼지에 시달릴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바람은 오늘도 제 멋대로 불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도 이와 같습니다. 성령님은 주권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아무도 성령의 역사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 안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령의 역사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맡겨야 합니다. 내 삶을 내가 원하고 내가 기대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가겠다는 고집을 포기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이끄시는 대로 성령의 바람의 부는 대로 기꺼이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니고데모에게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일생 자기 인생을 계획하고 그 계획대로 차근차근 밟아온 그에게 성령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은 너무나 위험천만한 일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반발합니다.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9)”

 이쯤 되면 몰라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꾸짖으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10)”

 이후에 니고데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거듭났을까요? 아니면 끝끝내 거부하고 거듭나지 못했을까요? 3장에서 니고데모의 반응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그 즉시 거듭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니고데모가 두 번 더 등장합니다. 7장에서 산혜드린 공회에서 예수님에 대한 논쟁이 있을 때 예수님을 변호합니다. 19장에서는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등장합니다. 사실 이것은 자칫 사형수와 한 패로 몰릴 수 있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니고데모가 가진 모든 지위와 타이틀을 한 번에 잃어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고데모가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거듭났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내 인생에 쌓아 놓았던 것이 다 불타 없어지더라도 거듭남 하나만큼은 잃을 수 없다고 그가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도 니고데모는 예수님과의 대화 후 그 말씀을 마음 속 깊이 간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랜 자기와의 씨름 끝에 마침내 하나님께 항복했던 것이 아닐까요? 성령님께서 마침내 그를 거듭나게 하시고 그가 그토록 바라고 원했던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그 안에 들어가 누리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영적인 눈을 새롭게 뜨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경험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강한 자기를 깨고 바람 같은 성령의 역사에 우리 자신을 맡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로 날마다 거듭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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