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이창무 2021. 4. 25.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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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7 강 / 이창무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말씀 / 요한복음 5:1-29
요절 / 요한복음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저는 삼 년 반 동안 LG 그룹 인사팀의 채용 담당자로 일했던 적이 있습니다. 덕분에 셀 수 없이 수많은 면접 시험에 실무자로 참관을 했습니다. 그때 스펙도 나쁘지 않고 꽤 괜찮은 사람들이 떨어지는 모습을 숱하게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면접관이 하는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잘 듣지 않기 때문에 질문과는 동떨어진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이후로 저는 면접 보는 사람들에게 “준비한 말을 하려고 하기보다 먼저 두 귀로 잘 들어보라. 듣는 자는 합격하리라” 늘 같은 조언을 합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살아나고 귀를 막으면 죽습니다. 우리 가운데 듣고 살아나는 역사가 풍성하게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갈릴리 가나에 계셨던 예수님이 이제 절기를 맞아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1). 절기가 되면 전 세계로부터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 듭니다. 예루살렘은 그들로 인해 북새통을 이루며 들 뜬 축제의 분위기에 젖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전세계 유대인들로부터 신성한 도시로 추앙을 받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밝고 화려한 예루살렘의 이면에는 어둡고 우울한 예루살렘이 있었습니다. 그곳의 이름은 양문 곁 “베데스다 연못가”였습니다(2). 이곳에는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있었습니다(3). 대학 병원의 중환자실에만 가 봐도 사람을 짓누르는 무거운 분위기가 있습니다. 하물며 이 곳의 분위기가 얼마나 어둡고 우울했을까요? 절망과 분노, 죽음과 고통의 그림자가 그곳을 덮고 있었습니다.

어디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던 이곳의 병자들은 이제 스스로 희망을 제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진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간헐 온천이었던 것 같습니다. 과거 어느 날 피부병을 앓던 병자 한 사람이 마침 온천물이 올라오는 시점에 연못에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온천 물 덕분에 피부병이 싹 나았습니다. 이 사건은 얼마 뒤 천사가 가끔 연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이때 가장 먼저 들어간 사람이 낫게 된다는 전설이 되었습니다(4). 이 소문을 듣고 전국의 불치병 환자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동병상련이라고 그들은 평소에는 서로의 딱한 처지를 동정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연못의 물이 조금이라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는 순간부터 아비규환이 펼쳐졌습니다. 친구가 친구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지고 친구가 친구의 그런 손을 짓밟았습니다. 베데스다는 본래 자비의 집이란 뜻이지만 이곳에 자비는 없었습니다.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연못이었습니다. 경쟁에서 낙오되어 떠밀려온 사람들이 모인 이곳에서는 더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나마 덜 아픈 사람, 힘이 남아 있는 소수의 사람만 바늘귀를 통과해 일등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다음에는 내가 일등을 할 수 있으리라는 실낱 같은 희망 하나를 붙들고 오늘도 비루한 삼류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실패한 인생들이 모인 이 베데스다 못가에서 가장 가망이 없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병을 앓은 지 38년이 된 병자였습니다(5). 지금부터 38년 전이면 1983년입니다. 1983년 우리 나라에서는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첫 전파를 타고 방방곡곡에 눈물과 감동을 만들었던 시기입니다. 미국에서는 마이클 잭슨이 <빌리진>이라는 대 히트곡을 발표했던 해입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병자 신세라니 상상이 되십니까? 이런 사람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저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사회에서는 이미 이 사람을 잊은 지 오래였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서도 그는 늘 같은 자리에 누워있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투명 인간이었습니다. 다들 성전이나 시장으로 갈 때 예수님은 거절 당한 자들, 잊혀진 자들이 모여 있는 베데스다 못가로 향하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망이 없던 38년 된 병자를 찾아 가시고 그를 주목하셨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를 포기하고 잊으려 할 때, 심지어 그 자신마저 자신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접을 수밖에 없을 때, 그를 잊지 않으신 분이 계십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유일한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6)?” 왜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너무 대답이 뻔한 질문 아닙니까? 웬만한 보통 사람에게 던진 질문이라면 하나마나 한 질문인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38년 된 병자에게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사람이 반복해서 절망을 하다 보면 그 절망 상태에 적응을 하게 됩니다. 병든 상태가 자연스러운 상태가 되고 맙니다. 이런 사람에게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으라는 것은 사실상 그를 고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말씀하십니다. 변화를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삶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능력이 있고, 회복의 희망이 현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병자의 대답이 어떻습니까? “주여 이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 병자의 말투가 심드렁합니다. 그의 말은 이런 뜻입니다. “이보시오, 혹시 나를 놀리는 것 아닙니까? 내 꼬라지를 보면 모르겠소? 이미 낫고자 하는 희망을 접은 지 오래 되었수다. 관심 가져주어서 고맙기는 한대 난 사양하겠소. 정 그렇게 날 생각해 준다면, 물이 동할 때 내가 먼저 들어갈 수 있게 도와주시구려. 저 싸가지 없는 것들 선후배도 없이 지들만 먼저 간다니까요?” 그는 자신 앞에 계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을 먼저 연못에 던져 줄 사람, 이 경쟁에서 이기게 해 줄 도우미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병자의 이 말에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베데스다 연못 가장 가까운 쪽으로 그를 데려다 주셨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대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8).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람이 곧바로 나았습니다(9). 38년 동안이나 한 번도 스스로 일어나 본 적이 없던 사람이 자리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은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만 그를 긍휼히 여기셔서 고쳐 주신 것입니다. 일방적인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진정한 베데스다는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베데스다 못가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우리 나라는 과거에 비해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한국 영화가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을 타고 한국의 가수가 빌보드 차트 일 위를 하고 한국의 회사의 스마트폰과 자동차가 전 세계 시장을 휩쓸고 있습니다. 유튜브에 보면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이 제일 살기 좋은 나라. 코로나 방역도 제일 잘하는 나라”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밝고 화려한 대한민국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 그늘에는 오늘 좌절과 절망을 곱씹고 있는 청년 세대가 있습니다. 취업 문은 바늘 구멍이 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부동산 값이 너무 폭등해서 내 집 마련은 언감생심 꿈도 꾸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부모를 잘 만난 소수 금수저들이야 문제 없겠지만, 대다수 흙수저들은 기댈 곳이 없습니다. 흙수저는 흙수저끼리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겨우 그럴듯한 한 자리를 얻을까 말까 합니다. 그들은 가끔 천사가 내려와 주식 시장이나 암호 화폐 시장을 동하게 하는데 그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대박이 난다는 신화를 믿고 있습니다. 알바로 모은 돈을 비트코인에 털어 넣습니다. 하지만 대박 신화의 주인공은 언제나 내가 아니고 남입니다. 치열한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점점 잊혀집니다. 어느새 낫고자 하는 희망도 없이 무기력과 절망에 찌든 38년된 병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잊지 않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심장에 꿈틀거리는 긍휼과 자비 때문에 예수님의 눈과 발은 그들에게 향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당신의 몸인 교회가 자비의 집, 은혜의 집, 명실상부한 베데스다가 되길 원하십니다. 지금 우리 눈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함께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화려한 성공 신화를 뒤쫓고 있습니까? 우리의 발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발이 향하는 그곳에 함께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근사하고 세련되고 멋진 곳만 찾아다니고 있습니까? 우리가 희망 없는 세대에게, 절망하는 이들에게, 앞만 보고 달리는 이들에게 예수님이 없으면 우리는 다 38년된 병자요 걷지 못하는 자에 불과하다고 가르쳐 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님 안에 희망이 있고 회복이 있고 일어나 걸을 수 있다고 선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9). 유대인들은 병 나은 사람을 붙들어 놓고 따져 물었습니다.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10)” 세상에 이 말이 38년 만에 처음으로 일어나 걷게 된 사람에게 할 말입니까? 그들은 이 사람이 낫거나 말거나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이 사람을 겁박해서 예수님을 잡아넣을 구실을 만드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를 누가 고쳐주었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13).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름도 안 가르쳐 주시고 재빨리 피신하셨기 때문입니다. 이후 예수님은 성전에서 은밀하게 그를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4)” 얼핏 들으면 죄를 지으면 이전보다 더 건강이 나빠질 수 있으니 죄를 짓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런데 38년 동안 병을 앓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생길 수 있을까요? 여기서 죄를 범하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부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더 심한 것이 생긴다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부인함으로써 영생을 얻지 못하고 심판에 이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질병이 고침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그는 경고를 무시하고 곧바로 유대인에게 조르르 달려가 고자질을 했습니다(15). “나 보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은 예수라는 사람입니다. 난 그저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요.” 그 결과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안식일법을 여겼다는 죄목으로 거센 공격 받게 되었습니다(16). 다 죽어가던 사람을 살린 일이 이렇게 욕 먹을 일입니까? 병 나은 사람이 도로 가서 자리를 펴고 누워야 그들의 직성이 풀릴까요? 자비를 베풀고 선을 행한 것의 결과가 칭찬과 포상이 아니라 배신과 정죄라니 참 씁쓸하기만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자신을 변호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 내 아버지는 물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 일하실까요? 쉬실까요? 당연히 일하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안식일이라고 쉬시면 세상은 그 즉시 엉망진창이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유대인들도 인정하는 바였습니다. 안식일에도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을 보며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과 심판하시는 일을 쉬지 않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표현하신 것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하나님이 아버지라서 아버지라고 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홍길동도 아닌데 무슨 문제입니까? 하지만 유대인들은 안식일법을 어긴 것으로도 모자라 감히 하나님을 친 아버지라고 하다니 신성모독이라며 길길이 날뛰었습니다(18). 저런 자는 당장 돌로 쳐죽여야 한다며 씩씩거렸습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날 가장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감시 추적하느라, 병 나은 사람 추궁하느라,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느라 하루 종일 정신이 없습니다. 안식은 자신들이 다 깨트리면서 거꾸로 한 병자에게 38년 만에 안식을 주신 예수님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것 만이 아닙니다. 누가 신성을 모독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비난하고 방해하고 있는 바로 그들 아닙니까?

참된 안식이란 무엇일까요? 재독 철학자인 한병철 교수는 대한민국 사회를 가리켜 ‘피로 사회’ 라고 규정했습니다. 정말 대부분 사람들이 반복적이고 누적된 피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부터 노인들까지 다 피로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만큼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남들보다 앞서 가려면, 적어도 뒤쳐지지 않으려면 달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쉬어도 쉬는 것이 아닙니다. 불안과 두려움 속에 쉬기 때문에 쉼이 되지 못합니다. 또 쉬는 것도 경쟁이 치열합니다. 모처럼 쉬려고 어디를 가면 교통 체증, 주차 전쟁, 자리 경쟁으로 더 피곤할 때도 많습니다. 이런 세태 속에서 우리는 어디에서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참된 안식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을 받아 누릴 때 비로서 안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경험할 때 안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비의 집”이며 동시에 “안식의 집”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일을 대신할 대리자로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대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고자 하시는가?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가를 아들에게 다 알려주셨습니다(19,20). 예를 들어 아주 유명하고 오래된 식당이 있습니다. 그 집만의 비법 레시피가 있는데 주인이 이제껏 그 누구에게도 그 비법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딱 한 사람에게만 레시피를 알려 주었다고 합니다. 바로 식당을 가업으로 물려 받을 아들입니다. 그 이유야 당연히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다 알려 주고 싶어집니다. 사랑하면 비밀이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들을 사랑하사 아들에게 모든 것을 알리시고 보여주십니다. 그러면 아들은 어떻게 하십니까? 아들이신 예수님은 자기 뜻대로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께서 일러 주신대로 아버지의 뜻대로 모든 일을 행하십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까? 현실 부자 관계도 이런 모습을 닮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둘째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유 권한을 아들에게 위임해 주셨습니다(21-23). 직장 생활을 해 보면 권한 위임이 얼마나 중요한 지 금방 깨닫게 됩니다. 위에서 쫀쫀하게 권한을 위임을 해 주지 않으면 아래 사람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두 가지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는 사람을 살리는 권세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하는 권세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권세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두 가지 권세는 본래 하나님의 것이었는데, 하나님이 이제는 예수님의 손에 다 맡기셨습니다. 잘 난 사람, 못난 사람, 부유한 사람, 가난한 사람,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들의 영원한 운명이 예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인생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심판에서 구원으로, 어둠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사탄의 종 노릇하던 데서 하나님의 자녀로 옮기는 것입니다(24). 달리 말하면 이것은 죄와 죽음에 매여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에 자유와 해방을 주어 참된 안식에 이르게 하는 일입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은 이 안식일 프로젝트를 성취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앞으로 예수님은 사망의 형벌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이 일을 다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안식이 우리에게 찾아와 현실이 될 수 있을까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가는 역사가 무엇을 통해 일어나게 될까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25)”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통해서” 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38년된 병자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났습니다. 죽어서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도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무덤 문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30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시름시름 않던 왕의 신하의 아들도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진 바로 그 순간에 살아났습니다. 깊은 허무와 어둠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저도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듣고 생명과 빛의 세계로 나아왔습니다. 한 선교사님은 첫 일대일 하는 날 창세기 1장 31절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이 한 말씀으로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코로나 이후 일 년이 넘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죽어가고 있다. 예배가 죽어가고 있다. 영성이 죽어가고 있다. 20대 30대 청년 세대가 죽어가고 있다.” 아우성입니다. 어떻게 살아날 수 있을까요? 무슨 신박한 프로그램이 좀 없을까요?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그 해답은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아날 것입니다. 달리 무슨 뾰족한 길은 없습니다. 비대면이지만 귀 기울여 말씀을 들읍시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통해 아들의 음성을 들읍시다. 길을 갈 때, 지하철 안에서 성경 낭독 앱을 이용해서 말씀을 들읍시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이 소생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아들의 음성을 들려줍시다. 그러면 그들도 살아날 것입니다. 한참 후에 누군가 우리에게 이렇게 물을 지 모릅니다. “어떻게 그 어려운 코로나 시대를 극복하셨어요?” 그 때에 이렇게 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뭐 특별한 비결은 없고, 다만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었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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