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목마른 자에게 주시는 생수의 강

이창무 2021. 5. 23.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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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10-2 강 / 이창무

목마른 자에게 주시는 생수의 강

말씀 / 요한복음 7:25-39 
요절 / 요한복음 7:37,38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런 재미있는 기사가 신문에 난 적이 있습니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 의회에서 연설을 마친 뒤, 장내가 어수선한 틈을 타서 교황이 마시던 물이 담긴 컵을 훔친 한 국회 의원이 있었습니다. 밥 브래디라는 공화당 의원이었습니다. 그는 컵을 훔친 뒤 자기가 한 모금 마시고, 아내와 사무실 직원 두 명에게도 주어 마시게 했습니다. 나머지 물은 손자들을 위해 남겨두었는데 그들에게 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놀라운 점은 그가 초범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밥 브래디 의원은 2008년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 때도 연단에 있던 오바마의 물컵도 슬쩍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번지수를 잘못 찾고 있습니다. 정말 하늘의 복을 받기를 바란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컵을 훔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목마른 자에게 주시는 생수의 강”을 마셔야 합니다. 혹시 오늘 우리도 우리 밖에 있는 어떤 물을 찾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 안에서 생수의 강이 터질 수 있음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앞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24). 말씀을 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제서야 종교 지도자들이 찾아서 죽이려고 안달하던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았습니다(25). 그러고는 당국자들에 대해 약간 비꼬는 투로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26)” 

예수님을 가만 놔두는 것을 보니 당국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한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를 한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도 예수님의 출신과 소속을 알고 있는데 종교 지도자들이 모를 리가 없고, 그러므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 리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이면 다 알고 있었습니다. 당장 갈릴리 사투리를 쓰시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만약 메시아가 온다면 아무도 어디서 온 줄 모르는 미스테리한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27).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이런 신비주의 컨셉이 전혀 없었습니다.

자신의 출신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을 아신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28,29)”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딱 해당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고 아버지가 목수 요셉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을 충분히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본래 어디서부터 왔고 또한 예수님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외모로 판단하고 공의로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디로부터 오신 분인가?” 이 질문은 정말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에 따라 사람들을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는 오직 예수님의 인간적인 기원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나사렛에서 성장하셨고, 목수 일을 하시다가 서른 살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셨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을 압니다. 또 예수님의 어머니는 마리아이며 동생들이 여럿 있었다는 사실도 압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사역은 놀라웠고, 그분의 가르침이 매우 신선하고 탁월했다는 사실도 잘 압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본받을 것이 많은 성인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위대한 선지자로 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로 믿지는 않습니다. 더욱이 영원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아들로는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예수님은 믿고 의지할 대상이 아닙니다. 경외심을 가지고 예배할 대상도 아닙니다. 내 기준으로 평가해서 인정할 수도 있고 비판할 수도 있는 분입니다. 이런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인도에서 불교를 배워왔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여 유럽에 정착했을 것이라는 둥 별의별 말들을 다 합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예수님을 나름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예수님이 진짜 누구인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헛똑똑이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진정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계셨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심을 압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메시아 곧 그리스도로 고백합니다. 또한 이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수님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며, 예수님의 행동 하나하나가 다 하나님이 원하신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 예수님이 삼위 하나님 중 한 분인 성자 하나님으로 믿고 그분을 의지합니다. 예수님께 경배 드리며 그 이름을 소리 높여 찬송합니다. 바로 이렇게 예수님이 본래 하늘 아버지께 속한 분이심을 아는 사람, 그를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속한 분이시라면, 그리스도인은 어디에 속한 사람일까요?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와 교제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힘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나와 같은 소속을 가진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가족처럼 귀하게 여기고 섬기며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내게 주신 사명에 충성스럽게 헌신하려는 사람입니다. 

제가 엘지에 근무할 때 부서 전원이 엘지 대 해태 프로야구 단체 관람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전 부서원이 목이 터져라 응원한 덕분인지 엘지가 경기 내내 앞서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해태가 연속 안타를 치고 순식간에 경기를 뒤집어 버렸습니다. 그 순간 고향이 전라도인 제 일년 선배가 자리를 벌떡 일어나더니 “해태, 파이팅!”을 외치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모든 부서원들이 얼음장처럼 굳어지고 정적이 흘렀습니다. 잠시 소속이 헷갈렸던 그 선배는 이 일로 말미암아 두고두고 괴롭힘을 당해야 했습니다. 우리도 소속을 좀 더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소속은 어디입니까?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입니까? 당연히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면 목이 터져라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높이는 일 또한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28절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셨음을 선포하실 때 외쳐 이르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메시지 성경에는 이 부분을 “격앙되어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아닌 것이 진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에 심령이 상하셨습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사실을 사람들 앞에서 숨기야 할 정도로 부끄러운 일입니까? 우리가 아무 말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역시 내 말이 맞으니까 아무 말도 못하는군.” 이렇게 해석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땅에 속한 분으로만 알고 있는 이 세상을 향해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라고 큰 소리로 외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물론 크게 외친다고 다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조롱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핍박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수가 많든 적든 진리를 영접하고 예수님을 믿게 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답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있는 담대함과 용기를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증언에 대해서도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려는 사람들도 있었고(30), 예수님께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31). 이 둘 중에 현실 권력을 가진 쪽은 예수님을 잡으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 둘은 각각 유대교의 보수파와 진보파로서 평소 서로 앙숙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랫사람들을 보내어 예수님을 체포하려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보내는 자가 둘 나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시고, 다른 하나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시고, 종교 지도자들은 아랫사람들을 보냅니다(32). 흥미롭게도 둘의 종착점이 같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을 운명을 지워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도 예수님을 죽일 목적으로 체포하라고 아랫사람들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통해 이루려는 목적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은 뭇사람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을 죽음에 내주려 하시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가 살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나서서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33,34)”

여기서 예수님은 “돌아가겠다” 라는 말을 이중의 의미로 사용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장소의 이동이라는 의미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때 예수님을 찾아도 발견할 수 없고, 따라가려 해도 따라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사용하신 이중적인 의미를 간파하지 못하고 이렇게 오해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35)”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해외에 선교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신 줄 착각했습니다. 당시에도 유대교 선교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낯선 개념은 아닙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마음 먹기에 따라 찾을 수도 있고 따라갈 수도 있을 텐데 그럴 수 없을 거라고 하시니 유대인들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36).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아이러니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한 것에 나온 소리이지만, 자기도 모르게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인까지 미치게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자신을 만나러 찾아온 헬라인 몇 사람이 있다는 말씀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왜 이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이 구원을 이방으로 확대하는 결정적인 분수령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시면, 그 후에 성령님께서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교회를 인도하시고 힘을 주시고 역사하셔서 이방인 선교를 이루실 것입니다.

5월 30일에 세계선교 보고대회가 있습니다. “바울이 셋집에서”라는 제목으로 윤모세 선교사님이 전하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또 CIS, 아시아, 오세아니아, 중남미, 아프리카, 북미, 유럽을 각각 대표하는 일곱 분의 강사들의 인생 소감 발표가 있을 예정입니다. 우리는 이 보고대회를 통해서 이방인 선교를 통해 맺혀진 많은 열매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열매가 맺히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알처럼 자신을 희생하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 모임의 선교사님들 세계 각 곳으로 보내셨습니다. 그곳에서 선교사님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내가 죽음으로 양들을 살리고자 하셨습니다. 세계 선교는 이렇게 십자가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역사입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님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바람이 불자 독일로, 미국으로, CIS로, 중남미로 선교사가 파송되었습니다. 우리 선교사님들이 말씀을 가르치고 증언하실 때마다 성령님께서 이방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말씀을 영접하도록 감동 감화시켜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변화된 주님의 제자들이 이번에 자신에게 임한 은혜를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세계선교 보고대회는 단지 5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의례적인 행사로 치부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능력, 복음의 능력,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듣고 볼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 세계선교 보고대회를 통해서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아들 예수님, 사람들을 아들에게 이끄시는 성령님, 이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때는 초막절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초막절이 시작되면 7일 동안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 금 주전자로 옮겨서 성전 제단 옆에 있는 은그릇에 붓는 의식이 행해졌습니다. 이때 백성들은 이사야서 12장 3절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라고 찬양했습니다. 7일 동안 물을 길어다 붓는데 마지막 날에는 이 의식을 치르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드렸습니다. 바로 그날 예수님께서 회중을 향해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37,38)”

예수님이 약속하신 생수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4장과 달리 이번에는 요한복음 저자가 이를 친절하게 설명해 줍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39a)”

생수는 성령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생수의 강이라고 표현하셨을까요? 물이라고 해서 다 같은 물이 아닙니다. 샘물도 있고 시냇물도 있고 강물도 있습니다. 깊은 산속 옹달샘은 어떻습니까? 토끼가 세수하러 왔다가 겨우 물만 먹고 갈 정도입니다. 시냇물은 세수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강물이 되면 스케일이 전혀 다릅니다. 강물은 한 국가의 산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지금도 한강 물은 유람선을 띄우기도 하고, 천만 서울 시민의 식수가 되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성령의 역사가 있기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헐적으로 나타나고 선별적으로 임하고 오래 지속되지도 않았습니다. 샘물이나 시냇물 같은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강물과 같은 성령의 역사를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앞으로 성령을 강물이 넘치듯 충만하게 받을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이름과 같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 역사가 이미 구약 성경에 예언된 일이었다고 하십니다. 어떤 예언들이 있을까요? 스가랴 14장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또 에스겔 47장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부터 흘러나온 물이 사람이 능히 건너질 못할 강물이 되는 환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됩니다. 예수님이라는 새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 곧 성령님이 강물처럼 넘치게 됩니다. 그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까? 때로 성령님께서 폭포수처럼 쏟아져서 우리 모든 죄를 씻어냅니다. 때로 성령님께서 넘어져 쓰러져 있던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고 새 힘을 얻게 하십니다. 때로 성령님께서 마음이 상한 자를 위로하시고 어루만져 주사 치유가 일어나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신령한 복을 누릴 수 있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언제 예수님이 성전이 되시고 또 성령이 풍성하게 임하십니까?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39b)”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라고 답이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는 항상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때를 의미합니다. 왜 성령이 오시기 전에 십자가가 먼저 와야 합니까? 왜냐하면 성령님은 말 그대로 거룩한 영이시라 죄인들 안에 임재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맞는다면 사실 아무도 성령 충만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죄인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사람 안에는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거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충만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해야 합니다.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 나는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 이미 가진 것을 다 가지고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목마르지 않는 사람은 성령 충만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목마른 것이 아니라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에 목말라 하는 사람은 성령 충만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누가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내가 얼마나 소망 없는 죄인인가를 아는 사람, 내 안에 선한 것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십자가만을 의지하는 사람, 예수님께 목마르고 성령에 목마르고 하나님의 임재에 목마른 사람입니다. “주께 가까이 날 이끄소서. 간절히 주님만을 원합니다. 채워 주소서. 주의 사랑을. 진정한 찬양 드릴 수 있도록” 이렇게 주님께 매달려 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럴 때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유혹의 뿌리치고 죄를 이길 힘을 주실 것입니다. 아픔과 슬픔을 겪지만 그 아픔과 슬픔을 이길 만한 힘과 기쁨이 자기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이 특별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나도 성령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내 영혼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그때 빈 들에 마른 풀 같이 시들었던 우리 영혼에 성령의 단비가 내려 새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믿고 간절히 주님 앞에 나아가 성령충만을 구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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