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골로새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이창무 2021. 2. 21.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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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신년 제 8강 / 이창무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말씀 / 골로새서 4:2-18
요절 / 골로새서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사도 바울은 이제까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해 왔습니다. 먼저는 개인 차원에서, 그리고 교회와 가정과 직장이라는 공동체 차원에서 우리가 입어야 할 새 사람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외인 곧 교회 밖에 있는 불신자들에 대할 때 어떤 새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하는지 권면합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직장에서 동네에서 많은 외인들을 접하면서 살아갑니다. 교회 사람들보다 교회 밖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는 분들이 다수일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로서 우리는 이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골로새서의 앞부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요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또한 풍성히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이 비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리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믿지 않는 그들도 하루 빨리 복음을 영접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과 영생을 누리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특히 가까운 가족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다면 더욱 간절해집니다. 얼마전 설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코로나 때문에 하지 못했지만 항상 제가 인도하여 가정 예배를 드려 왔습니다. 그때마다 아직 믿지 않는 제 동생의 가족들이 눈에 밟힙니다. 꼭 구원을 받아서 나와 함께 천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때로는 직장에서 옆 자리에서 일하는 동료에게 그런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새 인생을 살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그 대상은 내 옆 집에 사는 이웃이 될 수도 있고 아들 친구의 엄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아직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께 사람들에 대해 말하기’ 입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2)” 효과적인 전도는 끈기 있는 기도와 더불어 시작됩니다. ‘기도를 계속하라’는 것은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등장하는 자기 동네 재판관을 쉬지 못하게 했던 한 많은 과부와 흡사한 모습입니다. 이 점에서 바울과 에브라는 좋은 본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소식을 듣던 날부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골1:9). 에바브라는 항상 골로새 성도들을 위하여 애써 기도했습니다(4:12). 골로새서에서 사도 바울은 유난히 중보 기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가 이단의 세력에 쉽게 흔들리게 된 이유를 골로새 교회가 기도의 활력을 잃은 것에서 찾은 듯합니다. 깨어 기도하지 못할 때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어떻게 활력을 잃은 기도를 다시 살릴 수 있을까요? 바울은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말합니다. 감사는 기도의 동반자입니다. 감사는 마치 기도의 불이 계속 타오르게 하는 연료와 같습니다. 혹시 기도가 막혔나요? 기도 생활이 죽은 것 같나요? 그렇다면 먼저 감사 제목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찾아보면 감사할 일이 정말 많습니다. 감사하다 보면 우리 마음이 점점 뜨거워집니다. 그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 보십시오. 감사와 찬양과 함께 기도의 말문이 트이는 것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면 골로새 성도들은 특별히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까요?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3,4)”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고 있으니 너희도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뜻은 아닙니다. 기도를 부탁한 이유는 바울이 말씀을 전파하는 일을 맡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바울이 하나님께서 감옥 문을 열어 주셔서 자신이 풀려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부탁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신 전도할 문을 열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바울이 현재 로마에 있는 감옥에 갇히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로마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고자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말씀과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위해 중보 기도하는 것이 왜 이렇게 중요합니까?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진리에 대해 열리려면 말씀의 종이 그것에 대하여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사람의 말을 통해서 전달됩니다. 에바브라가 와서 전하고 가르친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배우고 깨닫게 된 골로새 교회 성도들야말로 이미 이것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중보 기도해야 할 것이 참 많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은 분들에게 빨리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수험생들은 시험에 합격할 수 있도록, 취준생들은 취업에 성공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 가운데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 바로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우리에게 성경에 대해 말해 주는 분들이 계십니다. 메신저일수도 있고 일대일 목자님일 수도 있고 그룹 바이블 스터디의 인도자일 수도 있습니다. 2세 교육을 맡고 계신 교사 목자님들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먼 곳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계신 선교사님들은 두 말할 나위조차 없습니다.  이분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길이 막히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에 눈을 뜰 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빛이 없는 암흑 가운데 계속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분들을 위해서 중보 기도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가 직접 현장에 나가서 전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전도의 문이 열릴 수 있도록, 전하고 가르치는 말씀이 힘 있게 역사할 수 있도록 기도하면 됩니다. 지금은 코로나로 인해서 대면 접촉이 극도로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경계심이나 반감이 극도로 높아진 상태에서 어떻게 전도의 문을 열어야 할지 난감합니다. 그래서 더욱 더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감사함으로 깨어 있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계속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때가 이르면 친히 전도의 문을 여실 것입니다. 우리가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캠퍼스와 전 세계를 마음에 품고 먼저 끈질기게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선교사와 말씀의 종들을 위해 간절히 중보 기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하기’ 입니다. 

우리는 전도하면 직접 찾아가서 말씀을 선포하는 전도만을 전도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 만이 전도는 아닙니다. 직접 찾아가서 말씀을 선포하는 전도가 꼭 필요하기는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지속적으로 이런 기회를 얻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는 직장인의 경우 캠퍼스에 전도하러 갈 시간을 만들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주말에는 휴식이 필요하고, 또 개인이나 가정 단위로 처리해야 할 이런 저런 일들이 많이 쌓여 있기도 합니다. 동역자들에게 전도의 문이 열릴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또 다른 방식의 전도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5,6)”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대답하는 복음 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접하는 되는 교회 밖 불신자에게 너무 성급하게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하다 보면 어떤 일들이 생길 수 있을까요? 시도는 용감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냉담할 때가 많습니다. 자칫하면 카카오톡에서 차단을 당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더 나아가서 그 사람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하면서 우리를 공격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낙심하게 되기 쉽습니다. 용기와 확신이 크게 꺾여 버리고 아예 전도 자체를 포기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대안이 있습니다. 그것은 외인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기회를 포착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인생과 그 의미에 대한 대답을 찾고 있습니다. 각자 자기 나름대로 이것이 인생의 정답이라고 믿는 것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내가 이제껏 정답이라고 여겨왔던 것이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회의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때 주위에서 내게 이 질문에 답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찾아 둘러보게 됩니다. 그 순간 우리가 그 답을 가진 사람으로 여겨진다면 그는 질문하게 되고 우리의 대답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 대답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핵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외인들에게 답을 주어야 할까요? 바울은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고 구체적인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지혜로 행하라는 말은 너무 조급 해하지 말고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서두르다 관계를 그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잡으라는 뜻입니다. 너무 신중하다 보면 복음을 전할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끈질기게 기다리되 하나님이 주신 전도의 기회를 꽉 붙들어야 합니다. 또한 불신자에게 말을 할 때 기본적으로 은혜로운 말을 해야 합니다. 부드럽게 신사적으로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너무 은혜로운 말만 계속 하면 지루하고 임팩트가 부족할 수 있습니다. 약간의 소금으로 음식의 맛을 내듯이 듣는 사람이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감칠맛 나는 말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회사에서 팀장으로 있을 때 한 부하 직원을 눈 여겨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웬 지 언젠가는 그가 예수님을 영접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 잘 대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남몰래 저 혼자 기도만 하면서 이삼년이 지나간 후였습니다. 이 친구가 갑자기 회사에 지각을 하더니 아예 무단 결근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를 옥상으로 데려가 무슨 일인지 물었습니다. 사실은 짝사랑하던 직원이 있었는데 큰 용기를 내어 고백을 했다가 단칼에 퇴짜를 맞았다고 했습니다. 울면서 도무지 마음이 잡히지 않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이 때가 바로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너의 문제의 원인과 해답이 다 들어 있는 책을 하나 알고 있다. 바로 요한복음이라고 한다.” 놀랍게도 순순히 저의 성경 공부에 그는 따라와 주었고, 몇 달 후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고백을 했습니다. 지금은 안양의 모 교회에서 유년부 교사로 열심히 섬기고 있습니다. 카카오 스토리에 그가 이런 글을 쓴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 당장 길 거리 한 복판에 가서 이렇게 외치고 싶다. ‘여러분 왜 이렇게 좋으신 예수님을 믿지 않으시나요?’” 

사도 베드로는 소아시아의 흩어진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벧전3:15)”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며 살아가고자 애를 써 보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누군가 우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이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부드러우면서도 확신이 가운데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준비한 그 대답 한 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하늘 소망을 붙든 사람 답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그 대답으로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의 끝인사(7-18)

이제 골로새서의 마지막 부분에 도달했습니다. 바로 바울의 끝인사입니다(7-18). 끝인사는 의례적으로 하는 말인데 여기에 무슨 얻을 것이 있겠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마치 영화를 보고 나서 나오는 엔딩 크레딧을 보지 않고 서둘러 영화관을 빠져나오려는 심리와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엔딩 크레딧이 끝나면 나온다는 쿠키 영상을 보기 위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라는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다 본 적이 있습니다. 기다리는 것이 지겨울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이름들이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편의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구나!’ 하면서 감탄했습니다. 인류 역사는 한 편의 영화와 같습니다. 이 영화의 제목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로서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십니다(골1:15-17). 그런데 그만 피조물이 죄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게 하심으로 만물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제작하신 놀라운 영화의 줄거리, 곧 복음입니다(골1:18-20).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계획하고 제작하신 ‘하나님의 비밀’에 참여한 일꾼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먼저는 이 편지를 골로새 교회에 전달해 준 사람들이 나옵니다. 두기고와 오네시모가 그들입니다. 두기고는 여행에 특화된 사람이라 골로새뿐만 아니라 여러 교회에 바울의 편지를 전달하는 일에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오네시모는 본래 골로새 교회의 빌레몬의 노예였습니다. 주인에게서 도망쳐 로마까지 왔다가 바울을 만나 회심했습니다. 오네시모는 한 때 배신자요 도둑이었으나 이제는 예수님께 사랑받는 신실한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다음으로는 당시 바울과 함께 하던 선교팀을 소개합니다. 먼저 나오는 세 사람,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유스도는 모두 유대인 출신입니다. 그 다음 세 사람 에바브라와 누가와 데마는 모두 헬라인 출신입니다. 보통 유대인은 유대인끼리 헬라인은 헬라인끼리 어울리기 마련인데 바울의 선교팀에는 이렇게 유대인과 헬라인이 함께 어우러져 동역을 했습니다. 이 중에 복음서 저자인 마가와 누가라는 이름이 주목을 끕니다. 마가는 본래 바울에게 완전히 찍혔던 사람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마가를 동행하는 문제로 절친인 바나바와 결별하기까지 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놀랍게도 바울의 위로자가 되어 있습니다. 반면 누가는 바울을 만난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 바울의 곁을 끝까지 지킨 바울의 주치의이자 역사가였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출신과 각자의 인생 스토리는 참 다양했지만 모두 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동역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골로새 인근에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눔바의 집에서 모이는 가정 교회와 에바브라 대신 골로새 교회를 지키고 있는 아킵보에게 안부를 묻습니다. 이들 중에 아무도 바울을 직접 본 사람은 없습니다. 편지를 통한 비대면 온라인 접촉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한 바울의 관심과 사랑은 바울이 직접 개척한 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비록 자기 자신이 사슬에 매여 있는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골로새 교회를 생각하고 그곳에 은혜가 넘치기를 구했습니다.

골로새서의 끝인사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개인 플레이가 아니라 철저하게 팀 플레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나면 주인공과 기껏해야 감독의 이름 정도를 기억할 뿐인지만 엔딩 크레딧에는 수많은 참여자가 있습니다. 이들이 없다면 결코 한 편의 영화는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복음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방인 선교의 중심에는 사도 바울이 있었지만 결코 바울 혼자서 이루어 낸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함께 동역자들이 팀으로 이루어 낸 역사였습니다. 바울은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끝인사에 보면 동역자들에 대한 칭찬과 감사가 넘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출신 성분에 따라 차별하지도 않았습니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노예이든 의사이든 관계없이 하나님 나라의 깃발 아래 하나로 모았습니다. 과거에 실수와 허물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내치지도 않았습니다. 용서하고 화해하고 회복하여 다시 어깨동무를 하고 앞을 향해 함께 전진해 갔습니다. 

우리 안암1부를 통한 하나님 나라 역사도 어느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역사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감사해야 할 것은 우리 가운데 복음의 일꾼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두기고나 오네시모처럼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 자매들입니다.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며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분들입니다. 에바브라처럼 기도의 종이며 교회를 위해 많이 수고하는 분들입니다. 상황이 좋을 때나 좋지 않을 때나 한결같이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분들이 계십니다. 또 아킵보처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기 위해 애쓰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어떤 이름으로 기억되기를 원합니까? 하나님 나라 복음 역사에 어떤 역할을 담당하기를 원하십니까? 바울처럼 크고 위대한 이름은 아니어도 좋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사람으로 남으면 됩니다. 유스도처럼 유명하지 않아도 신실한 일꾼으로 남기를 원합니다. 마가처럼 넘어진 적이 있더라도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우리 모두의 이름이 그리스도 예수의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영원히 남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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