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골로새서

그 안에서 행하라

이창무 2021. 1. 24.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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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신년 제 4 강 / 이창무

그 안에서 행하라

말씀 / 골로새서 2:6-15
요절 / 골로새서 2: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이번에 나온 안암 1부 소식지 ‘크로스’ 3호를 보셨습니까? 그 중 첫번째 글이 박준은 목자님이 쓰신 ‘삶의 여정’이라는 글입니다. 목자님이 안암동 고려대로 돌아오게 되면서 1985년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삶의 여정을 담담하게 쓰신 글입니다. 오늘 말씀 역시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길을 어떻게 가야 할까요? 그 길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경험하게 될까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6)”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주님이시라는 고백은 신앙 고백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고백에서부터 신앙의 길을 출발합니다. 그러면 그 길을 어떤 자세로 가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라” ‘행하라’는 말의 원어는 본래 ‘걸어가라’라는 말입니다. 왜 하필이면 걸으라고 했을까요? 걸으라는 표현은 지속성과 일관성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만화 영화 ‘스머프’에 보면 스머프들이 파파 스머프를 따라 길을 떠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참 가도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자 스머프들이 묻습니다. “파파 스머프, 얼마나 남았나요?” 파파 스머프가 인자하게 대답합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그런데 이후 스머프들과 파파 스머프는 이런 대화를 몇 번이나 계속 합니다. 마침내 파파 스머프가 이렇게 화를 냅니다. “아직 멀었다. 한참 가야 하니까 조용히 좀 해라” 걷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래 걷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계속 걷다 보면 지칠 때가 있습니다. 걷는 것이 지겹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목적지가 아직도 멀리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매주 같은 시간에 말씀 공부를 하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 모임을 합니다. 가끔씩 은혜가 파도처럼 밀려올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늘 고만고만 합니다. 지치고 지루하고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얼마나 남았나요?” 하나님은 어떤 답변이 주실까요?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7)” 여기서 바울은 나무와 건축을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길의 첫번째 단계는 그 안에 뿌리를 받는 단계입니다. 건축으로 치면 기초 공사에 해당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는다는 것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의 모든 근거가 예수님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렌즈로 나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두번째 단계는 세움을 받는 단계입니다. 나무가 뿌리를 내린 후에는 줄기가 자라듯, 기초 공사를 마친 후 건물이 한 층 한 층 올라가듯 성장하는 단계입니다. 전에 해보지 않은 새로운 일들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가운데 믿음이 한 단계 성장합니다. 세번째 단계는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는 단계입니다. 시련과 어려움을 통해서 단단하게 내실을 채워가는 단계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성장하는 모습은 없을지 모르지만 내면이 강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마지막 단계는 넘치는 감사의 열매를 맺는 단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과 성숙을 이루게 된 사람의 특징은 비교의식, 원망, 불평이 없다는 점입니다. 좋은 일이 있어도 감사, 안 좋은 일이 있어도 감사, 그의 삶에는 늘 감사가 넘칩니다.

이처럼 신앙 생활은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성장 과정을 거칩니다. 뿌리를 내리지 않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기초 공사 없이 튼튼한 집을 지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한국 사람은 무조건 빨리 빨리 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앙 생활도 빨리 열매를 맺고 나도 빨리 변화되고 너도 빨리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세상으로 달려나가 당장 모든 것을 확 뒤집어 놓아야 속이 시원할 것 같습니다. 특히 신앙 생활 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열정은 넘칩니다. 하지만 신앙이란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성장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 나가야 한다는 것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걸어가지 않고 뛰어 가려고 합니다. 문제는 계속 뛸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순간 탈진해서 아예 멈추어 버립니다. 한 때 누구보다 뜨거웠던 사람이 무슨 일이든 차갑고 시큰둥한 사람으로 변해 버리기도 합니다. 열광주의와 냉소주의는 무척 다른 것 같지만, 둘 다 조급함이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조금 더 전진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보다 조금 더 성장하면 충분합니다. 심지어 크게 성장이 없는 것 같아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실은 속으로 내실을 단단히 다져 가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풍성한 열매를 맺은 나무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튼튼하고 아름다운 믿음의 집을 지어져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까지 그리스도인이 가야할 길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가지 말아야 할 길은 무엇일까요?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8)” 여기서 철학은 헛된 속임수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로 보아야 합니다. 곧 내용이 없이 공허하지만 그럴 듯하게 잘 포장된 철학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사람의 전통에서 나왔습니다.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사람에게서 나온 철학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복음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알고 보면 세상의 초등학문에 불과합니다. 초등학문이란 말은 본래 우리가 어릴 때 배우는 ‘가나다라’을 가리킵니다. 이런 초보적이고 유치한 내용을 가지고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으려는 약탈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주의해야 합니다. 왜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까?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도자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놓치게 되고 그러면 길을 잃고 미아가 되기 때문입니다. 골로새 교회 성도들 중에 이단 풍조에 빠졌던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어떤 이단 풍조가 있었는지는 다음 주 말씀에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골로새서를 읽고 정신을 차리고 다시 돌아온다면 참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참 많습니다. 그러므로 헛된 속임수에 속아 넘어 가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헛된 속임수로 영혼을 약탈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가장 먼저 신OO을 비롯한 이단 세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이단까지는 아니더라도 불건전한 가르침으로 신앙을 병들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요즘에는 이런 사람들이 주무대를 유튜브, 페이스북, 카카오톡 등의 SNS로 옮겼다고 합니다. 이런 곳에서 베스트 셀러 저자라고 해서, 구독자 수와 좋아요 수가 엄청나게 많은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 중에는 아무 근거도 없는 음모론,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주장, 그럴 듯해 보이는 각종 가짜 뉴스들을 생산해 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최근 미국에는 ‘큐어넌’이라는 음모론 집단이 많은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딥 스테이트’라고 불리는 미국과 전세계를 주무르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배후에는 파충류를 닮은 외계인인 ‘렙틸리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과 맞서 싸우는 트럼프를 구한답시고 큐어넌의 추종자들은 지난 달 미국 국회 의사당 점거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일으켰습니다. 미국의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이 사람들에게 동조하고 있다니 참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중에 이런 류의 헛되고 속이는 유치한 철학에 빠질 분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방심할 일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한 때 우리와 함께 믿음의 길을 가다가 이런 불건전한 가르침에 미혹되어 딴 길을 간 사람들을 여러 명 보았습니다. 다시는 그런 가슴 아픈 일을 겪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헛된 속임수와 철학으로부터 온전히 지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9, 10)” 이 두 구절은 듣자 마자 의미가 쏙 들어오기 조금 힘든 구절입니다. 바울 당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둘러싼 논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지닌 인간이신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신성이 완전히 다 담길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예수님도 알아야 하지만 예수님 말고 다른 것들도 더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질문에 대해 바울은 사람이신 예수님 안에 신성이 충만하게 거하신다고 아주 분명하게 못을 박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 알면 하나님을 다 알 수 있고 다른 무엇이 필요하지 않다고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제가 어릴 때 동아출판사에서 나온 참고서 ‘완전정복’ 시리즈가 있었습니다. 백마를 탄 나폴레옹이 표지 모델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완전정복이라는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교학사에서 나온 ‘필승’ 시리즈도 같이 보았습니다. 완전정복도 찔끔 보고 필승도 찔끔 보고 결국 시험을 망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바울의 말을 달리 표현하면 예수님 안에서 신성을 완전정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필승 시리즈는 안 봐도 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예수님 한 분에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인격과 성품, 하나님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을 수 있을까? 참 머리로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엄연한 진리이고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동거동락 했던 제자,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 진리를 믿고 고백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에는 그리스도로 충분하지 않고 비밀스러운 영적인 지식을 더 알아야 한다는 영지주의자들이 침투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충만한 인생을 살고 싶다면 우리에게 와서 영적인 지식을 전수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분명한 어조로 선포합니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골로새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진리를 포도나무 비유를 들어 아름답게 표현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함을 누릴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을까요?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1,12)” 여기에 할례와 세례라는 두 가지 의식이 나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습니다.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는 육의 몸을 벗고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세례 역시 비슷한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침례)를 받은 때 먼저 물 속에 머리까지 푹 잠급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육의 몸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음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물 밖으로 몸을 꺼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을 누리기 위해서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부패하고 타락한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이 부패하고 타락한 자아가 꿈틀꿈틀 살아서 움직이는 한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자기 중심적인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이것이 너무 힘들어서 말 그래도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자아가 탄생합니다. 이 새로 태어난 자아는 옛 자아와 달리 죄를 미워하고 거룩을 사모합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 상태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가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길은 이렇게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 길, 오직 이 길 밖에 없습니다. 

충만한 삶을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공허한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충만한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자아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자아가 죽지 않고 충만에 이르고자 하는 것, 여기서부터 모든 문제가 발생합니다. 심지어 자아가 죽기는 커녕 자아를 확대하고 자기를 더 강하게 해야 충만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정반대의 믿음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것이 주로 돈을 많이 번 사람이 되는 것, 외모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과연 이 두 가지가 우리를 충만하게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제 주위에 돈을 많이 번 사람이 없어서 그런 사람에 대한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영대학원을 다니면서 우리 나라에서 상위 1 퍼센트 안에 들어갈 법한 사람들을 접해 본 적이 있습니다. 어쩌다 그런 분들과 한 팀이 되었습니다. 첫 팀 모임 때 거의 두 시간 내내 새로 출시된 외제차 트렁크에 골프백이 세 개까지 들어갈 수 있느냐 네 개까지 들어갈 수 있느냐를 놓고 논쟁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다음 모임에도 거의 비슷한 대화가 되풀이되었습니다. 저는 돈을 많아도 별 거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동차와 골프 외에 할 말이 없는 삶이 참 공허해 보였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외모 탑인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연예계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얼마나 공허했으면 연예계에 마약 사건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겠습니까? 아무리 이렇게 말해도 나는 그 공허감을 꼭 경험해 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우리 삶의 진정한 충만은 어디에서 옵니까? 내가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다시 사는 것에서 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을 이루는 것에서 옵니다. 이것이 정도입니다. 만약 충만에 이를 수 있는 또 다른 지름길이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다른 길은 전혀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른 길을 말하는 자들이 바로 헛되이 속이는 철학과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사람의 영혼을 약탈하려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정도를 따라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을 누리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함을 누릴 때 우리는 무엇을 경험하게 될까요? 
첫째, 죄사함과 새 생명을 경험하게 됩니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13)” 죄사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오는 은총입니다. 새 생명은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오는 은총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 이 두 가지 은혜와 축복을 생생하고도 풍성하게 누리게 됩니다. 
둘째,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14, 15)” 여기서 법조문은 율법을, 증서는 채무 증서로서 죄에 대한 책임을, 통치자들과 권세들은 사탄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율법 아래에서 우리는 수많은 범법 행위들을 저질렀습니다. 그것이 고스란히 우리에게 죄책으로 계속 쌓이게 됩니다. 사탄은 이 죄책이 적혀 있는 채무 증서를 들고 우리를 고발합니다. 우리는 이 채무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너무 많은 빚을 지었기 때문에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었습니다. 장기를 팔아도 갚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채무 증서를 다 찢고 불태워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죄책을 짊어지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채무로부터 자유로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결과 사탄의 세력은 무력화되었습니다. 사탄은 더 이상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신다는 말은 승리한 로마 장군의 개선 행렬에 적군의 포로들을 끌고 가는 모습에서 따 온 표현입니다. 곧 사탄의 세력은 조롱거리, 구경거리로 전락했다는 뜻입니다. 만약 사탄이 우리의 죄문제를 가지고 참소한다면 우리는 그를 마음껏 이렇게 조롱해 주면 됩니다. “나는 이제 네가 하나도 두렵지 않다. 그리스도께 처참하게 패배한 사탄아! 내 앞에서 썩 꺼져라.” 이처럼 우리에게 죄사함과 새 생명, 죄로부터 자유, 사탄의 권세로부터 자유를 주신 그리스도께 감사를 드립니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박준은 목자님의 ‘삶의 여정’이란 글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저는 가끔 예수님께서 몇 걸음 떨어져서 저에게 ‘나를 따라 오려거든…’ 하고 조용히 말씀을 꺼내시는 것 같이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잠시 주춤하게 됩니다. 내 삶의 여정 동안 알게 된 주님을 신뢰할 뿐, 특별한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어느덧 이런 대답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 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걸어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특별한 요령도 남들이 모르는 비결도 없습니다. 다만 단순하게 주님을 신뢰하고 따라가는 길입니다. 그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짐으로 자아가 죽는 길입니다. 그러면 그 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내가 타시 태어납니다. 부디 우리 가운데 이 길에서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샛길로 빠지는 사람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 길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을 경험하고 참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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