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골로새서

만물의 으뜸이신 그리스도

이창무 2021. 1. 10.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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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신년 제 2 강 / 이창무

만물의 으뜸이신 그리스도

말씀 / 골로새서 1:15-23
요절 /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지난 주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고 그의 나라로 옮겨졌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말하고자 합니다. 깊이 들어가다 보니 오늘 말씀이 조금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적어도 한 번은 반드시 다루어야 할 중요할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깊이 아는 만큼 우리의 믿음도 분명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 예수는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15a)”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는 분이십니다. 반면에 감각 기관에 의존해서 살고 있는 우리는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이해하기 힘들어 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물리학이 너무 어려운 이유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너무 작은 세계나 볼 수 없는 너무 큰 세계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려고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여기서 ‘형상’이란 말의 원어는 ‘에이콘’입니다. 영어의 아이콘이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컴퓨터 바탕화면에서 아이콘을 더블 클릭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아이콘과 연결된 프로그램이 떡 하니 나타납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더블 클릭하면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의 인격과 권능, 은혜와 진리가 다 나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것에 기웃거리거나 한 눈을 팔 필요가 없습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유지하는 분이십니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15b-17)”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십니다. 이 말이 예수님이 시간 순서 상 가장 먼저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이 모든 피조물 위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만물이 예수님에게서 창조되었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았고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창조의 근원이시고 창조의 통로이시며 창조의 목적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 함께 서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만물은 다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만물을 유지하고 계십니다. 그 만물 중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크게 둘로 나누면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보이는 것들이란 물질 세계를 가리킵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 천사와 같은 영적인 존재들을 가리킵니다. 
바울 시대 사람들은 인간 세상의 각 영역을 다스리는 영적인 권세들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본문 속에 등장하는 왕권들, 주권들, 통치자들, 권세들이 그들입니다. 골로새 교회의 이단 중에는 이런 영적인 권세들을 받들어 섬겨야 한다는 천사 숭배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영적인 권세들 또한 그리스도가 만드신 피조물 중 하나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심부름꾼이지 결코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권세들이 인생의 길흉화복을 주관하다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 대신 근대 이후 사람들에게는 과거에 영적인 권세들이 있던 자리에 과학적인 원리가 들어와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자연 세계는 자연 법칙과 인과율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고 믿습니다. 또 인간 세계는 사회 과학의 원리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천사를 숭배했던 것처럼 요즘 사람들은 자연 법칙 자체를 절대적인 것처럼 숭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후 세상을 자연 법칙에 의해 돌아가도록 맡겨 놓으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이를 가리켜 이신론이라고 부릅니다. 이신론자의 주장대로 정말 하나님은 세상에서 손을 떼시고 감정도 인격도 없는 자연 법칙이 만물을 지배하도록 하셨을까요? 만약 이 말이 다 맞는다면 우리는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인과율에 의해 다 결정되어 있는데 뭐 하러 쓸데없이 기도합니까? 또한 법칙이 왕 노릇하는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우연의 산물일 뿐이고 어떤 의미도 목적도 있을 수 없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천사 위에 그 천사를 지으신 그리스도가 계시듯이 자연 법칙 위에는 만물을 만드시고 그 법칙을 제정하신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자연이 일정한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 자연을 만드신 그리스도께서 우주가 질서와 조화와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창조된 세상이 그리스도와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물은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있고 그리스도께서 만유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골로새 교회를 위협하던 대표적인 이단 중에는 영지주의가 있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적인 세계는 선하지만 물질 세계는 악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셨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만약 물질 세계가 본질적으로 악하다면 그리스도께서 악한 것을 창조하셨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만물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또 선을 향해 가도록 만물을 유지하고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놓치면 자칫 이원론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원론(Dualism)이 영적인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을 엄격하게 분리하는 것입니다. 이원론자는 예수님은 교회 생활, 신앙 생활에 있어서는 주님이시지만 세상에는 세상을 다스리는 원리가 따로 있다고 믿습니다. 이에 따라 두 가지 모습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 생활 따로, 사회 생활 따로 이 두 가지를 분리시켜서 이중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철저하게 세상 원리를 따라 세상에 완벽하게 적응한 모습을 살다가, 교회에 와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세상은 무조건 추하고 무의미한 곳으로 여기고 세상과 담 쌓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직장 생활은 부득이한 알바 정도로 여기고 대충대충 일하곤 합니다. 기도는 열심히 하는 반면 청소, 빨래, 요리 같은 집안일은 신경 쓰지 않으려 하기도 합니다. 두 모습 다 복음보다는 영지주의에 더 가까운 모습입니다. 네덜란드의 개혁주의 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바 있습니다. “세상 모든 영역 가운데 만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실 부분은 단 한 뼘도 없다” 정치계도 그리스도의 것이고, 경제계도 그리스도의 것이고 학계도 예술계도 전부 다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가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내가 속한 곳이 어디든 이 곳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고백하고 선포해야 마땅합니다. 회사에서 기안을 올릴 때도 집에서 설거지를 할 때도 학교에서 과제물을 제출할 때도 어떻게 이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고 그리스도의 뜻을 성취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합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원론자로 사는 편이 깔끔하고 더 속 편합니다. 그리스도의 주권을 의식하며 사는 한 긴장과 갈등은 피할 수 없습니다. 또 피해서도 안 됩니다. 피하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가 만물의 창조주요 존재 목적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낼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골로새 교회를 위협했던 거짓 사상은 오늘날 이신론과 이원론으로 옷을 갈아 입고 교묘하게 신자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인도하시고 주관하시는 통치자이심을 믿습니다.” 우리가 이 고백을 삶의 현장에 적용하며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18)” 만물 가운데 그리스도와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단 하나의 기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머리와 몸처럼 예수님과 교회는 서로 떼어내려 해도 뗄 수 없는 유기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으로부터 왔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탄생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왜 교회를 만드셨을까요? 이는 교회를 통해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만물의 으뜸이 되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첫째, 하나님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님 안에 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19)”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창조의 근원이자 통로이며 목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모든 권세와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아들이신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로부터 경배와 찬송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만 홀로 높임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세상을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20)” 세상의 현재 모습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과 일치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하나님께 거역하고 반기를 들었습니다. 창조주를 부인하고 마치 자신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처럼 주인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창조 질서가 어그러지고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상태가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화 상태를 해결하여 화목하게 하시고 창조 질서를 온전히 회복하시고자 하셨습니다. 무엇으로 이 일을 이루고자 하셨습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만물이 다 하나님과 화해하는 역사를 이루는 것, 곧 만유의 회복을 이루는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거대한 프로젝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시급하고 주목을 많이 받고 있는 프로젝트는 코로나 백신 개발 프로젝트일 것입니다. 현재 아스트라제네카, 화이자, 모더나 등에서 개발한 백신이 가장 앞서 나가고 있으며 긴급 승인 후 배포가 시작된 곳도 있습니다. 이 백신이 효과가 있고 부작용이 없다면 우리는 오랫동안 견뎌 온 비정상의 삶을 정상으로 돌리게 되는 날이 곧 오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백신 개발 프로젝트와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스케일로 진행되어 온 우주적인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이루시고 완성에 이르게 하실 만유의 회복 프로젝트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죄가 세상에 들어와 온 세상을 망가트렸습니다. 인간은 창조되었을 때 선한 상태를 잃어버리고 비정상적인 삶, 죽음에 지배당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세상을 회복하고 정상으로 돌려 놓기 위해 백신을 만드셨습니다. 그 백신은 예수님의 피로 만들어진 복음이라는 이름이 백신입니다. 가장 이 백신을 택하신 성도들에게 투입하셨습니다. 그들이 모인 공동체를 교회라고 이름하셨습니다. 백신을 맞고 살아난 사람들은 비로서 제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배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교회를 통해서 주변 세계에 백신을 보급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선교라고 부릅니다. 예배와 선교, 이 두 가지가 교회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거대한 회복 프로젝트의 중심 기관인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코로나 백신 개발팀의 핵심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만유 회복 프로젝트 팀의 팀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고 벅차오르는 일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예배 드리고 선교하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만유 회복 역사의 디딤돌이며 마중물이며 첫 단추를 다는 일입니다. 2021년 우리가 해야 할 일들,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일들 중에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사명 두 가지, 예배와 선교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높여 경배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역사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만유의 회복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1)”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 맺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이 악한 행실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악한 행실이란 부도덕한 행실만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사는 일체의 삶의 모습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22)” 이제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를 청산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우리와 화목하게 하신 것은 더 큰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바울 당시 헬라 종교의 특징은 각 사람의 인격이나 성품의 변화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헬라의 신들은 시시때때로 불륜을 저지르고 변덕스럽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등 부도덕하기 짝이 없습니다. 막장 드라마의 원조가 그리스 신화입니다. 헬라의 종교는 오직 신들로부터 복을 받거나 재앙을 면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골로새 교회에 들어온 이단들도 이런 시대 정신에 영향을 받아 복을 받고 황홀한 체험을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에는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못을 박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구원하신 목적은 분명하고 확실하다. 바로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빚어 가시기 위해서이다.”

이 말씀이 골로새 성도만을 향한 말씀이겠습니까? 바로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마땅히 그래야 할 뿐 아니라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변화를 받아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사람으로 설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23)” 여기서 사용한 ‘거하다’ ‘터 위에 서다’ ‘흔들리지 않는다’ 등의 은유는 전부 건축과 관련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한 마디로 거룩한 사람이 잘 되려면 집을 잘 지어야 합니다. 어떤 집입니까? 아파트인가요? 전원주택인가요? 믿음의 집입니다. 믿음의 집을 짓고 거기 눌러 앉아 살아야 합니다. 이 집은 어떤 기초 위에 서 있습니까? 바로 복음의 터 위에 서 있습니다. 복음 안에 믿음을 깊이 뿌리내려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복음의 소망을 붙들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점점 더 성장하고 인격과 성품이 변화하여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서게 되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집에 관심이 많습니다. 대한민국에는 ‘부동산 불패 신화’가 있다고 합니다. 집을 사 놓으면 실패할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최근에 수도권 집값이 너무 폭등해서 이런 신화가 더욱 강화된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중에도 진작에 돈을 굴려서 집을 사 놓을 것 그랬다며 후회하는 분들이 생겼습니다. 이미 집이 있던 분들도 영혼까지 끌어 모아 집 한 채를 더 사둘 것 그랬다면 아쉬워하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가 거주할 집을 마련하는 일은 정말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워야 할 집은 그런 집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집이 있습니다. 바로 복음의 터 위에 세워진 믿음의 집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이웃 나라 일본에도 한 때 부동산 불패 신화가 있었습니다. 동경의 부동산을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90년대 버블 경제의 거품이 꺼지면 부동산이 대폭락했습니다. 불패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불패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불패인 것은 믿음의 집입니다. 이것은 신화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약속하고 보증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믿음의 집을 건축해 오셨습니까? 정말 잘 하셨습니다. 가장 확실한 투자를 하신 것입니다. 결코 후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와서 믿음의 집을 짓다 말고 미완성인 상태로 두시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복음의 소망 안에서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맙시다. 우리가 끝까지 믿음의 집을 건축하여 완성에 이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설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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