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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
    설교/골로새서 2016.04.27 21:36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


    말씀 : 골로새서 2:1-3

    요절 : 골로새서 2:2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얼마 전에 그룹 성경 공부를 하다가 좀 당황스러운 일을 겪은 적이 있었습니다. 말씀 공부를 다 끝내고 페이스북을 열어 보았습니다. 방금 전에 말씀 공부를 같이 했던 사람이 페이스북에 댓글과 좋아요를 누른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보니 한참 말씀 공부하고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으면서 실제로는 페이스북을 서핑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 없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자꾸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되었습니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기는 했지만 속으로 참 씁쓸했습니다. 일차적으로 인도자인 저의 책임이 큰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고 인터넷을 더 찾아다니는  모습을 보며 우리들은 어디에서 지혜와 지식을 찾고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담고 있는 하나님의 비밀에 대해 말해 줍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얻고자 하는 열망을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여기서 너희는 골로새서의 수신자인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에 의해 개척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두란노 서원에서 양성한 제자 중에 에바브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에바브라의 고향이 바로 골로새였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바로 이 에바브라에 의해 개척되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골로새에서 불과 15킬로미터 정도 밖에는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역시 바울에 의해서 개척된 곳이 아니라 에바브라에 의해 개척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사람들을 가리켜서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한번도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사도 바울은 왜 이렇게 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까? 바울은 편지 뿐만 아니라 평소에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또 기회가 있다면 한 번 직접 방문해 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이미 바울 자신이 개척한 교회만 해도 감당하기가 벅찰습니다. 그런데 굳이 개척하지 않은 교회까지 돌아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이 2절에서 핵심은 마지막 부분에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여기에 있습니다. 지난 번 금요 소감 발표 모임 때 나눈 '사도행전 공부를 위한 신약 배경 이해, 헬라와 로마의 철학과 종교' 시간에 제가 당시 유행하던 신비 종교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당시 지중해 근방에서 유행하던  신비 종교에서는 일정한 가입 절차를 따라 입교한 사람들에게 신적 비밀을 공유하는 신비스러운 의식에 참여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신비 종교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침투했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앙 생활이 답답하지 않습니까? 심령이 메마르고 딱딱하진 것 같지 않습니까? 방법이 있습니다. 이제 저를 따라 오십시오. 제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바울은 이런 소식을 듣고 마음에 근심 걱정이 생겼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비밀은 다른 곳에 있는데 성도들이 거짓과 이단의 속임수에 넘어가게 될까봐 염려가 되어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진짜 하나님의 비밀은 어디에 있는지 하루 빨리 전해 주고 싶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을 골로새 성도들과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전달해 주기 위해 어떤 모양으로든지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과 관계성을 맺고 사귐을 갖기 원했습니다. 


    이 세상에 비밀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모든 사람이 저마다 적어도 한 두 가지 씩 비밀은 다 있을 것입니다. 폴 투르니에 라는 스위스 출신의 기독교 작가가 있습니다. 투르니에의 저서 중에 '비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한 사람이 비밀을 갖게 된다는 것은 독립된 인격체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자녀를 키워보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어릴 때 비밀이 없던 아이들이 사춘기에 들어서고 나니까 자기만의 비밀이 생긴 것 같습니다. 요즘 큰 아이가 자꾸만 자기 방의 방문을 걸어 잠급니다.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안에서 도대체 뭘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섭섭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어찌 보면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성장해 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폴 투르니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비밀을 드러내고 고백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서로 비밀을 조금씩 드러냄으로 관계성이 더욱 깊어지고 비밀 고백을 통해 친밀해 질 수 있다고 합니다. 내가 누군가의 비밀을 알고 있다면 나는 그 대상과 그만큼 친밀하고 가까운 사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지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고등학교 때 배운 조선 시대 정철이라는 문인이 지은 관동별곡이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저자가 강원도 관찰사 지금으로 말하면 도지사로 임명을 받은 후에 강원도 지방을 다니며 그 풍경에 감탄하여 읊은 시입니다. 그런데 이 길지 않은 시 안에 조물주라는 말이 무려 세 번이나 나옵니다. 금강산을 보고는 조물주의 재주가 야단스럽구나 라고 감탄을 하고 비로봉을 본 후에는 조물주의 뜻이 깃들여 있다고 노래합니다. 읽다보면 찬송가 40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조선 시대 버전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 창조주가 계시다는 사실과 그 분의 창조의 권능과 지혜가 위대하시다는 사실을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알고 있습니다. 칸트나 헤겔과 같은 철학자들은 절대적인 영원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였던 전 고려대 총장이셨던 김준엽 총장님은 역사를 보면 불의를 응징하고 선을 이루어가는 신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말을 남기셨습니다. 몰론 이분은 기독교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기는 하지만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비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피상적으로 아는 것일 뿐 하나님과 친밀하고 깊은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비밀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만큼 하나님과 친밀해질 것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성을 맺고 사랑의 교제 속으로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비밀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베리칩은 말세지말에 일어날 사단의 음모이며 장차 유럽 연합이 적그리스도가 될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비밀일까요? 아니면 황홀경에 빠져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 듯한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일까요?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어떤 체험이나 특별한 지식을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비밀입니까?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하나님의 비밀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빌립은 예수님께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달라고 떼를 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빌립에게 말씀하십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직접 대면하여 본다는 말은 비밀까지 다 아는 친밀한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길은 곧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신 것을 알고 절대자이시며 영원한 분이신줄 안다 하여도 그리스도를 모르면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은 구약 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골수파 유대인들은 아직도 모세 오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줄줄줄 외울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모르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의 원어를 알고 성경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졌는지를 꿰차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경을 지식적으로 잘 알아도 그리스도를 모르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직통으로 계시를 받는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안다 자부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리스도를 모르면 그분의 인격과 십자가와 부활을 모르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다이아몬드 목걸이 보다 더 빛나고 금시계보다 더 반짝거리는 보배로운 지식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감추었던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풍성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천국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은 자기의 전 재산에 비교해 보아도 더 고상하고 가치있는 보배로운 지식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길 정도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453장은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내 평생의 소원이라고 노래합니다. '내 평생의 소원 내 평생의 소원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소원으로 충만해 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는 오늘 본문에 언급된 라오디게아 교회가 등장합니다. 골로새 교회는 계시록에 등장하지 않지만 라오디게아 교회와 거의 같은 상황 속에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들은 이 정도 신앙 생활 잘 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의 모습은 영적인 곤고함 그 자체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요? 이 같은 결과는 바로 오늘 말씀에서 바울이 강조한 대로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열망에 식어져 버린 것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회복의 시작은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주 한 번의 성경 공부를 하고 한 편의 소감을 씁니다. 이는 우리 모임의 자부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성경 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깨닫고 있는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 지고 깊은 사랑의 관계성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지 물어야 할 때입니다. 솔직히 저는 요즘 성경 공부를 하고 나서도 허전할 떄가 종종 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동역자에게서도 종종 같은 소리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왜 이렇게 허전할 때 생각해 보니 말씀 공부를 하지만 이를 통해 그리스도를 깨닫는 것이 없을 때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없이 시작한 성경 공부는 자꾸 배가 산으로 가기 쉬운 것 같습니다. 말씀 공부하다가 서로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늘어 놓기에 바빠서 정작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본문 속에서 아주 지엽적인 문제 한 가지를 놓고 대토론이 벌여져서 서로 배틀을 벌이다가 대충 마무리하고 끝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잘 가다가도 한번 삼천포로 빠지기 시작하면 다시 돌아오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답도 없는 이야기를 붙들고 제자리를 맴맴 돌 때도 있습니다. 물론 성경 공부를 하다 보면 토론도 필요하고 삶을 나누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경 공부 시간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알고 그 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발견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 공부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그런데 말씀 공부에서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한다면 어디에서 힘을 얻고 위로를 얻고 영적 자양분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 여기저기 다른 곳을 기웃거리다가 이상한 건전하지 못한 것에 꽃혀서 미혹될 위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 공부에 임하는 우리의 목적과 자세부터 새롭게 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우리가 성경 공부를 하되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 대한 목마름으로 시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경 공부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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