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골로새서

위의 것을 찾으라

이창무 2021. 2. 7. 13:50
반응형

2021년 신년 제 6 강 / 이창무

위의 것을 찾으라

말씀 / 골로새서 3:1-17
요절 / 골로새서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014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를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를 신뢰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19.4%에 불관했습니다. 그러면 신뢰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로는 무엇을 꼽았을까요? 24.8%가 기독교인들의 말과 행동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꼽았습니다. 안타깝지만 우리들도 신앙 생활에서 믿음과 삶이 불일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당연히 나타나야 할 삶이 뒤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욕심 많고 거짓된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나만 예외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믿고 변한 것 같지만 잘 변하지 않는 부분도 참 많습니다. 변한 것 같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적도 여러 번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다가 변화에 대한 기대 자체를 접는 경우도 있습니다. “원래 믿음은 믿음이고, 삶은 삶이다. 둘은 별개다” “나나 너나 변화되는 것을 포기하자. 그래야 서로 속 편하다.” 이런 신념이 생기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약2:17)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믿음을 강조한 사도 바울 역시 기독교인의 윤리적인 삶을 소홀히 취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바울은 늘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 해답이라는 사실을 힘주어 선포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기독교인다운 삶과 윤리적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만약 믿는 사람에게 믿음과 삶이 분리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먼저 교회가 무너지게 됩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윤리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윤리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관계가 파괴되고 결국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도 함께 무너지게 됩니다. 더 나아가 윤리적인 삶이 뒤따르지 않으면 선교가 크게 지장을 받게 됩니다. 믿는 사람이 부도덕한 삶을 살게 되면 그만큼 전도의 길이 막힙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 벌어진 정인이 사건, 모 선교회의 코로나 집단 감염 사건 등이 전도와 선교에 얼마나 큰 악영향을 끼쳤을 지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편지의 절반인 3장과 4장에 걸쳐 골로새 성도들에게 기독교 윤리에 대하여 가르치며 실천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말씀은 기독교 실천 윤리의 기본 원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1-4)

우리는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인가요? 세례를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인가요? 신앙 고백의 내용에 동의를 표한 사람인가요? 물론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는 표지 중에 하나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좀 부족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이다(1,3).” 여기서 죽은 것은 우리의 옛 사람입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 죄가 죄인줄도 모르며 함부로 죄를 짓고 하나님께 반역하던 옛 사람은 죽었습니다. 심판과 저주를 받아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밖에 없던 옛 사람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으로 거듭 났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심판과 저주 아래 있지 않습니다. 새 사람 안에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을 소유했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3절에 보면,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영생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이 은폐되어 있다고 합니다.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겉모습을 보고 ‘당신 안에 영생이 있군요.’라고 알 방법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우리 안에 영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만약 세월이 흘러도 전혀 늙지를 않는다면 사람들은 우리가 영생할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가 어떤 병에도 걸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영생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믿는 사람도 똑같이 늙어 갑니다. 형제 목자님들은 점점 머리 숱이 사라져 가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자매 목자님들은 화장품으로 아무리 덧 칠을 해도 눈 가의 자글자글한 주름을 피하지 못합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병에 안 걸리는 것도 아닙니다. 코로나가 신자라고 피해가지 않습니다. 똑같이 아프고 똑같이 질병으로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감추어져 있던 생명이 분명히 나타나는 때가 옵니다. 그 때가 언제일까요?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4)” 바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입니다. 그때가 되면 늙지도 않고 병에 걸리지도 않고 영원히 죽지 않을 새로운 몸, 신령한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우리가 영생을 가진 사람임을 누구나 다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까지는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이 꽁꽁 감추어진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을까요? 우리 안에 영생이 있음을 드러낼 방법이 없을까요? 아니요. 있습니다. 믿는 사람의 삶을 통해서, 말과 행실을 통해서 드러낼 수 있습니다. 분명 땅에 발을 딛고 서 있지만 하늘의 향기가 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느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서 영원한 생명의 그림자를 만납니다. 그 사람 안에서 꿈틀거리고 약동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역사하여 공동체가 세워지고, 복음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이 한 분 계십니다. 부모님께서 없는 살림이었지만 그래도 안 할 수 없어 이 선생님에게 촌지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2주 후 집으로 커다란 상자 하나가 배달되었습니다. 안에는 책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선생님이 촌지로 받은 돈으로 고스란히 책을 사서 저희 집으로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 금박으로 된 성경책도 있었고 편지가 한 장 끼워져 있습니다. 선생님의 친필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와 우리 가족을 위한 축복 기도가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은 뭔가 다른 구석이 있구나 하는 것을 처음 느꼈습니다. 이외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몇 번 더 있었습니다. 만약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대학교 1학년 때 선뜻 성경 공부 초청에 응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목자님들로부터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능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의 것을 찾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나타내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쉽게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이 땅의 중력이 우리를 끌어 당겨 위로 향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우주선이 대기권을 벗어나 우주 공간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거대한 추진체의 연료를 소모해야 하듯이, 우리가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는 열정과 끈기를 가지고 힘써 위의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아무리 이 일이 어렵더라도 이미 우리가 가진 영원한 생명 때문에 결코 포기할 수 없습니다. 

둘째, 우리가 벗어야 할 옷이 무엇인가(5-11)

바울은 먼저 믿는 자들이 반드시 버려야 할 땅의 것이 무엇인지 언급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5)”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은 모두 다 우리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삶과 행동에서 문제가 드러나기 앞서 마음 속에 가득한 우리의 욕망과 탐심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욕망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욕구나 욕망이 없이 우리가 어떻게 삶을 영위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선을 넘은 무제한의 욕망 추구가 문제입니다. 그 욕망의 대상이 성이 될 수도 있고, 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는 필요를 넘어 욕망 그 자체에 질질 끌려 다니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욕망의 지배를 받는 욕망의 노예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땅에 있는 지체로 표현했습니다. 지체란 몸의 일부라는 뜻입니다. 왜 굳이 지체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이런 정욕과 탐욕이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고 늘 우리를 따라다닌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바울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너무 극단적인 표현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 몸 안에 있는데 반드시 제거해야 할 것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바로 악성 종양, 다른 말로 암입니다. 의사가 암세포를 항암 요법으로 죽어야 한다고 했을 때 ‘너무 과격하네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죽여서 뿌리까지 다 없애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땅에 있는 지체 역시 반드시 철저하게 죽여야 합니다.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 때문입니다(6). 

교부 어거스틴은 한 때 사생아를 낳고 이단종교를 추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암브로시우스 주교를 만나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방탕했던 옛 생활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원에 나갔다가 이웃집 아이들이 노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집어라! 읽어라!’ 즉시 집에 들어가 성경책을 펴고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곳을 읽었는데 로마서 13:13,14절이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는 이 말씀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후 방탕과 술취함, 음란과 호색의 죄악된 옷을 훌훌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로 옷 입고자 애쓰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길 가다가 이전에 사귄 적이 있는 한 여인이 어거스틴에게 윙크를 했습니다. 이때 그는 본 체도 하지 않고 지나쳐 버렸습니다. 여인이 쫓아와서 말했습니다. “어거스틴, 왜 모른 체 해요?” 그러자 어거스틴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어거스틴은 이미 죽었소” 어거스틴이 이렇게 말한 것은 주님께서 이미 옛 사람에 대해서 사망선고를 내렸다는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땅의 지체를 죽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방사선으로 암세포를 죽이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빛이 우리 내면에 임하면 땅의 지체를 죽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힘 있게 역사할 때, 우리는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옛 사람을 벗지 않으면 어떤 결과를 낳게 될까요? 8절에는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을 언급합니다. 9절에는 거짓말을 언급합니다. 둘 다 언어 생활과 관련이 있습니다. ‘새 사람을 입었는가 아니면 아직 옛 사람을 벗지 못했는가’는 그 사람의 언어 생활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욕심이 많으면 많을수록 마음은 늘 욕구 불만 상태에 놓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 되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납니다. 그래서 분노와 비방의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또한 원하는 것을 반드시 얻기 위해서 거짓말도 서슴지 않게 됩니다. 이런 말들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이 다 깨어지게 만듭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들을 함부로 주고받습니다. 댓글을 읽기가 두려워집니다. 누군가 내가 없는 곳에서 나에 대한 험담을 하고 있지는 않은 지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게 됩니다. 거짓말에 질려서 누구의 말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런 말들이 넘쳐 나는 공동체는 제대로 설 수 없고 곧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노와 비방의 말, 거짓말이 성도 간의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을 파괴하고, 교회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말을 입에 담을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말들은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은 우리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감정적인 말, 비난의 말을 삼가고 오직 서로에게 진실을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지키고 온전히 세워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우리가 입어야 할 옷이 무엇인가(12-17)

옛 사람을 벗었으니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새 옷을 입을 차례입니다. 우리가 입어야 할 새 옷이 무엇일까요?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12)”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이렇게 다섯 가지는 앞에 나온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 이 다섯 가지와 대조가 됩니다. 단순히 열거만 해도 향기가 나고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은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마음을 덧입을 수 있습니까? 이는 우리가 하나님이 택하시고 거룩하고 사랑 받는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택함 받을 자격도 없고 거룩하지도 않고 사랑 받을 구석도 하나 없는데 하나님은 일방적인 은혜로 우리를 택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사랑하여 주십니다. 이 한량 없는 은혜로부터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의 마음이 흘러나옵니다.

그러면 이런 마음은 어떠한 삶을 살게 합니까?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13,14)” 한 마디로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분노와 비방의 말이 갈등과 분열을 일으킨다면 용서의 말은 불만을 잠재우고 화합을 이루어 냅니다. 거짓말이 불신을 심고 서로 거리를 두게 한다면, 사랑의 말은 이질적인 사람들까지도 하나로 묶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죄사함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모인 교회야말로 이런 용서와 사랑이 풍성한 곳이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각 사람의 마음 속으로 주님께 받은 용서와 사랑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용서와 사랑이 흘러 넘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새 사람을 입기 위해 구체적으로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어디를 가나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15)” 우리는 평화를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불평과 불만을 유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감사하는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 늘 감사가 넘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모여서 예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16)” 성도가 말씀 안에 거하고 가르침을 받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간이 언제입니까? 바로 예배 시간입니다. 왜 예배가 중요할까요? 예배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는 예배를 통해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예배 시간은 옷을 갈아 입는 시간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옷을 오래 동안 갈아입지 않으면 나중에는 몹시 더러워지고 냄새가 납니다. 이처럼 예배를 통한 갱신의 경험이 중단되면 우리 마음이 죄로 오염되어 더러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예배 가운데 말씀 안에 충만하게 거하는 것은 마치 목욕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이 깨끗해지고 새로워집니다. 성도의 교제로 새 힘을 얻습니다.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 우리 영혼은 하늘에 닿게 됩니다. 그런 차원에서 지난 주 유튜브 영상에 달린 댓글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주일 저녁 씽크대 안에 한 가득 쌓인 그릇, 냄비들을 씻는 일이 전혀 힘들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귀한 말씀도 감사하고 은혜로운 찬양도 감사하고 예배 후 목자님들 사이에 서바나바 목자님 섬김에 감사하는 대화를 듣는 것도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만 오롯이 드러나는 주님의 사람들로 또 주님의 몸으로 안암골이 든든히 세워지는 한 해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목자님들 한분 한분을 인해 큰 은혜입는 한나블레싱 올림”
셋째로 흩어져서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17)” 예배를 드린 후 우리는 가정으로 직장으로 세상 속으로 흩어집니다. 이때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우리 목에 걸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 보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 판단합니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 우리의 말 한 마디에 예수님의 명예가 걸려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추락이 어디까지일까 했는데 최근 지표면을 뚫고 멘틀까지 들어갈 기세입니다. 이때 우리가 비난하고 남 탓만 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부터 먼저 복음의 합당한 삶, 믿음과 실천이 일치하는 삶,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삶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반응형

'설교 > 골로새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0) 2021.02.21
주께 하듯 하라  (0) 2021.02.14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들라  (0) 2021.01.31
그 안에서 행하라  (0) 2021.01.24
이 비밀의 영광  (0) 2021.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