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골로새서

주께 하듯 하라

이창무 2021. 2. 14.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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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신년 제 7 강 / 이창무

주께 하듯 하라

말씀 / 골로새서 3:18-4:1
요절 / 골로새서 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3장 전반부에서 우리가 배운 그리스도인의 실천 윤리의 대원칙이 무엇일까요? 바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이 원리에 기초해서 가정 생활과 직장 생활에서 우리가 입어야 할 새 사람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아내와 남편에 대한 권면입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18)” 바울은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합니다. 복종이라는 단어는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하는 단어입니다. 조선 시대나 남존 여비 사상이 팽배하던 가부장적인 구시대를 연상시키는 단어입니다. 지금은 여성 해방의 시대, 심지어 여성 해방 정도가 아니라 여성 상위의 시대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니 이 시대에 될 법이나 한 소리인가’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어진 복종하라는 명령은 결코 끽소리도 내지 말고 무조건 시키는 대로 다 하라는 군대식의 복종을 뜻하지 않습니다. 남편이 아내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복종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류의 복종은 기독교의 것이 아니라 비기독교적인 문화의 특징입니다. 철학자 플라톤은 남자가 비겁한 인생을 살면 다음 생애에는 여자로 환생한다고 했습니다. 유대인 남자는 기도 중에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했습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여자는 남자보다 앞서 걸으면 안 되며 유일한 예외는 앞에 지뢰가 있을 경우라고 합니다. 

그런 주류 문화를 처음부터 완전히 뒤집어 엎은 것이 기독교입니다. 인류 역사나 우리 나라 역사에서도 남녀 차별을 철폐하고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는데 앞장선 것이 기독교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선포했습니다(갈3:28).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격적으로 근본적으로 남자와 여자 사이에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둘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동등합니다.

그러면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복종하다의 원어는 ‘아래에 두다’라는 뜻입니다. 즉 아내가 자발적으로 하나님이 남편에게 두신 권위 아래 자기 자신을 두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복종의 아주 좋은 사례를 보여주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고 하나님께 복종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나요? 억압에 의해서 억지로 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복종하라는 명령은 ‘아내들이여 남편을 사랑하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 거부감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남편에 대한 사랑을 자발적인 존경과 복종으로 나타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존경과 복종으로 표현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가정 내에서 질서와 역할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실 때부터 이미 남편을 가정의 머리로 세우셨습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해서가 아니라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질서와 조화 가운데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평등하지만 각각 머리와 돕는 베필로서의 역할이 다릅니다. 아내는 돕는 베필로서 남편이 옳은 판단을 내리도록 지혜롭게 조언을 해 주어야 합니다. 조언을 하되 최종적인 결정을 가정의 머리인 남편의 몫으로 남겨 두어야 합니다. 

만약 아내가 자기가 주도권을 쥐고 남편을 찍어 누르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싸움 밖에는 더 하겠습니까? 그래서 이겨봐야 남편은 의기소침해지거나 밖으로 돌면서 가정에 무관심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부모에게서 정체성을 배운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권위가 없고 어머니가 주도권을 쥐는 가정에서 성장하는 자녀들은 정체성의 큰 혼란을 겪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게 됩니다. 결국은 아내가 남편을 쥐고 흔들려고 해 봐야 자녀에게도 좋지 않고 아내에게도 좋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이 주도권을 쥐고 앞장 서 가도록 잘 밀어 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남편은 신이 납니다. 아내의 지지와 존경에 감동해서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남편이 될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의 권위가 있을 때 자녀들은 권위를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가정에 에덴의 기쁨과 행복이 충만하게 됩니다.

그러면 남편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19)” 아내의 의무가 복종이라면 남편의 의무는 사랑입니다. 

여기서 사랑의 원어는 ‘아가페’입니다. 육체적인 사랑을 뜻하는 에로스가 아닙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유효 기간이 길지 못합니다. 남자에게 콩깍지가 벗겨지기까지 길어야 3년이라고 합니다. 콩깍지가 벗겨지면 이내 아내의 허물과 약점만 눈에 들어오기 십상입니다. 

이때부터 진짜 사랑의 시작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남편들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남편들도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보면 아내입니다. 어떤 아내입니까? 완전한 아내입니까? 아주 약점과 허물이 많은 아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자기 몸을 내어 주시기까지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또 그 사랑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 남편들도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아내의 행복을 위해 사랑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이렇게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곧 나를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내는 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먼저 사랑을 주어야 아내의 존경이 따라옵니다.

남편의 두번째 의무는 아내를 괴롭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남편이 아내를 괴롭게 합니까? 남편이 자기 중심적으로 아내를 함부로 대하여 괴롭게 합니다. 특히 남편의 말이 깊은 상처를 줍니다. 남편들은 자기 아내는 씩씩해서 상처를 받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철처럼 강할지 몰라도 아내는 깨어지기 쉬운 유리그릇과 같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힐난하는 말, 경멸조의 말, 얼음처럼 차가운 말에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이렇게 아내를 괴롭게 해 봐야 돌아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밥상부터 ‘먹기 싫으면 굶든지’ 밥상으로 변하기 마련입니다. 아내의 은근하고 집요한 복수에 시달리다가 결국 자기만 괴롭게 됩니다. 이렇게 젊을 때 아내를 괴롭게 하면 나이가 들어 크게 후회하게 될 지 모릅니다. 자녀들은 언젠가 우리 곁을 떠나 독립할 존재들입니다. 나와 한 몸을 이루어 영원히 내 곁에 있을 존재는 아내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에게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부부들이 배우자가 어떻게 나오는가를 보고 나도 거기에 맞춰서 행동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내들은 말합니다. “존경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것은 나도 안다. 그러나 남편에게서 존경스러운 구석이 있어야 존경을 하지. 그런데 어떻게 복종을 하라는 말이냐?” 남편들은 말합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나도 안다. 그러나 아내에게서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어야 사랑을 하지. 그런데 어떻게 사랑을 하라는 말이냐?”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18b)’ 성경은 상대방이 하는 것을 보고 내가 어떻게 할 지를 결정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 안에서 남편의 역할과 아내의 역할에 충성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 안에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아내는 남편이 좀 부족해도 기쁨으로 복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편도 아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 주며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들이 남편에 대한 존경과 아내에 대한 사랑이 충만하여져서 행복이 깃드는 아름다운 가정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로 자녀와 부모에 대한 권면입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20)” 바울은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권면합니다. 

사실 순종을 전혀 안 하는 막장 자녀는 거의 없습니다. 순종을 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순종을 가려서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순종하고 싫은 것은 안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든 일에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자녀는 성장 과정에서 부모로부터 독립하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욕구는 건강한 성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문제는 이 독립에 대한 욕구가 인간 속에 내재된 죄악된 본성과 결합하게 될 때입니다. 이때 자녀는 아무에게도 간섭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내 멋대로 살고자 하게 됩니다. 내 마음대로 내 멋대로 사는 게 좋을 것 같지만 그러나 알고 보면 사실 망하는 지름길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생각에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서도 잘 될 줄 알았는데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도 먹지 못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부모에게는 자녀에게 없는 경험이 있고 지혜가 있습니다. 부모는 자기의 경험과 축적된 지혜 속에서 최선을 다해 자녀에게 무엇이 유익이 되고 무엇이 해가 될지를 사랑으로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가 성년이 될 때까지 부모에게 맡겨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고, 옳은 길, 생명의 길을 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면 부모는 자녀에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21)” 재미있는 점은 사도 바울이 어머니는 빼고 아버지만 언급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부모 중에 가정에서 주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들의 문제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이 무조건 자녀가 원하는 대로 다 주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자녀를 망치는 길입니다. 노엽게 하는 것은 자녀로 하여금 분노와 원한을 갖게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분노와 원한을 갖겠습니까? 아버지가 자녀를 권위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이해와 설득보다는 권위를 내세우며 무조건 하라고 윽박지르기 쉽습니다. 또한 아버지는 자녀가 아버지의 권위에 반항하는 것을 잘 참지 못합니다. 그럴 때 감정이 폭발해 막말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는 자기 자녀에 대한 기대 수준이 대단히 높습니다. 자기 자녀는 공부도 잘하고 대인 관계도 원만하고 기도도 잘하고 소감도 잘 쓰고 믿음도 좋기를 바랍니다. 자기가 못했던 걸 자녀가 대신해 주길 기대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자녀는 내 기대를 자꾸 배반합니다. 그러니 자꾸만 쉬지 않고 자녀들에게 잔소리를 합니다. 엄마 친구 아들이나 엄마 친구 딸을 들먹이면서 걔는 하는데 왜 너는 못하냐고 다그칩니다. 나이를 불문하고 사람은 비교 당하면 기분이 나쁩니다. 

부모가 이렇게 자녀를 노엽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자녀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킵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면 자녀는 그 분노를 부모에게 돌려 복수하려고 들게 됩니다. 자녀는 자기 삶을 스스로 망쳐 버려서 부모에게 복수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밥을 안 먹겠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공부를 안 하겠다. 신앙생활도 안 하겠다’는 식으로 극단적으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또 권위적이고 감정적인 부모 아래서 자녀는 쉽게 낙담하게 됩니다. 낙담한다는 말은 주눅이 든다는 말입니다. “너는 왜 그 모양이냐? 너는 그것 밖에 못하냐? 좀 제대로 해 봐라.” 부모도 사람이라 한 두 번은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속해서 이런 말을 계속 들은 자녀들은 기가 죽습니다. 방어적이 됩니다. 의욕을 상실하고 매사에 소극적이 됩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더 못하게 되고 또 다시 부모의 핀잔을 듣게 되는 악순환이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부모는 자녀에게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할까요? 부모는 자녀를 낙담시키는 것이 아니라 격려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그치기보다는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합니다. 자녀들이 상처 입고 쓰러졌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디딤돌과 같은 부모, 최악의 순간에도 희망을 불어 어주는 부모,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을지라도 끝까지 믿어 주는 부모, 우리가 그런 부모가 되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통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바로 그런 아버지시라는 것을 자녀들에게 보여주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종과 상전에 대한 권면입니다. 3장 22절부터 4장 1절까지는 종과 상전에 대한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 종에게는 노예근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주인이 볼 때는 열심히 일하는 척 하지만 보지 않을 때는 대충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인 노예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보든지 보지 않든지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주인이 상과 벌을 내리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을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꾀를 내어 주인 몰래 게으름을 피워서 그냥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다 보셨기 때문에 책망하실 것입니다. 열심히 일을 했지만 주인이 알아주지 않아서 섭섭할지 몰라도 하나님이 다 보셨기 때문에 상을 주실 것입니다. 

반면 상전은 상전이라는 특권 의식에 사로 잡혀서 자기 마음대로 종들을 부려 먹기 쉽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리스도인 상전들은 의와 공평으로 종들을 대우하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상전의 권세는 상전 위에 계신 의롭고 공평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상전이 위임 받은 그 권세를 남용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에게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상전은 자신의 상전이신 하나님의 의로우신 통치를 받고 있으니 자기도 의와 공평으로 종들을 다스려야 마땅합니다. 

지금은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종도 없고 상전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얼핏 보면 지금 우리와는 상관없는 것 같지만 지금도 그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어딜 가나 상하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상사 눈치나 보면서 적당히 대충 일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사와 동료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상사가 부하 직원들을 자기 멋대로 대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부하 직원들에게 누군가 전도라도 할라치면 이가 갈리는 그 상사 생각이 나서 전도의 문이 막히고 말 것입니다. 

반면에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열심히 일을 하고 부하들을 사랑하고 의와 공평함으로 대하면 어딜 가나 예수 믿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확실히 다르구나 하는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요셉이나 다니엘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상급과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임의 제자 양성 목표인 영향력 있는 평신도 목자가 바로 이런 사람 아니겠습니까?

이상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 부모와 자식 관계, 상사와 부하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 배웠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윤리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상호 윤리입니다. 관계를 이루고 있는 양쪽 모두에게 똑같이 각각 실천해야 할 윤리가 있습니다. 아내의 의무를 말하면서 동시에 남편의 의무도 말합니다. 자녀의 도리가 있고 부모의 도리도 있습니다. 종과 상전 모두에게 책임을 요구합니다. 관계성이라는 것이 어느 한 쪽만 잘한다고 해서 형성되지 않습니다. 양쪽 편 모두가 각자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성실히 수행할 때 그 관계가 건강해지게 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주님과의 관계성을 기초로 하는 윤리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는 신랑이고 교회는 그의 신부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를 이해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 이 땅에서 자녀와 부모 관계를 맺는 법을 배웁니다. 하나님은 주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가운데 직장생활의 원리를 배우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 속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골로새 성도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내 곁에 있는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녀, 상사와 부하를 어떻게 대하느냐가 곧 내가 주님을 어떻게 섬기고 있느냐를 드러내 줍니다. 역으로 내가 주님을 어떻게 섬기고 있느냐가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녀, 상사와 부하를 대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관계 속에서 우리는 경건을 훈련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게 풍성하게 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주님을 중심으로 맺은 관계 속에서 교제의 기쁨과 참된 행복이 꽃피게 될 것입니다. 복음은 단순히 영혼이 구원 받고 천국에 가는 것으로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 생활, 사회 생활 속에서 관계를 아름답고 건강하게 함으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가정과 사회 속에서 새 사람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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