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골로새서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들라

이창무 2021. 1. 31. 13:38
반응형

2021년 신년 제 5 강 / 이창무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들라

말씀 / 골로새서 2:16-23
요절 / 골로새서 2: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를 쓰게 된 목적은 ‘골로새 교회에 침투한 이단 풍조로부터 골로새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그 이단 풍조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는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의식주의, 신비주의, 금욕주의가 혼합된 모습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는 골로새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교회들 안으로 침투하려 했던 거짓 가르침들입니다. 이들에게 흔들리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그림자가 아니라 몸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16)” 여기서 먹고 마시는 것은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음식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무 것이나 먹어서도 안 되고 먹더라도 정해진 규정과 절차를 따라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기는 일 년 중 특별한 날을, 초하루는 한 달 중 특별한 날을, 안식일은 일주일 중에 특별한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유대교로부터 온 것입니다. 유대교는 오랜 세월 동안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를 지키는 것에 있어서 아주 정교하고 체계적인 절차와 의식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이런 유대교에서 때마다 드리는 성전 제사는 장엄하고 위엄이 있었습니다. 유대교 뿐만 아니라 헬라 이방 종교의 제사도 매우 화려했습니다. 반면 초대 교회의 예배는 어떠했을까요?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했습니다. 가정집에 모여 함께 자유롭게 식사 교제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에서 어떤 선생들이 오더니 이 모습을 이렇게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너희 예배는 너무 초라하기 짝이 없구나. 개념도 없이 아무 것이나 먹고 절기도 안 지키고 아주 엉망진창이구나” 골로새 성도들은 이 말을 듣고 기가 팍 죽었습니다. 듣고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았습니다. 저들은 프로페셔널 같고 자기들은 아마추어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유대에서 온 선생들의 비판에는 아무런 정당성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17)” 율법에 기록된 음식법이나 절기법은 장래 일의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몸통이 나타나기 전까지 몸통에 대해 여러 가지 힌트를 준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역할이 있습니다. 마치 영화의 예고편이 사람들에게 영화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것과 흡사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한계도 있습니다. 몸통이 나타나면 그림자는 더 이상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본편이 나왔으면 본편을 봐야지 뭐 하러 예고편을 봅니까? 그러면 몸통과 본편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가 이미 오셨기 때문에 더 이상 음식법이나 절기법은 문자적으로 지킬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더 이상 그림자인 의식과 제도를 붙들고 있을 이유가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우리는 구약의 율법과 예언이 가리키던 예수님을 직접 바라보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미사에 참석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카톨릭의 미사는 장엄하고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의 예전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Holy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스테인드 글라스부터 오르간 연주까지 참여자에게 심미적인 만족을 줍니다. 반면에 개신교 예배는 카톨릭에 비해 대부분 단순하고 소박합니다. 우리 예배는 그 개신교 안에서 더 단순하고 소박한 편입니다. 혹시 이것이 너무 아쉽지 않으십니까? 장엄하고 화려한 예전이 있는 예배에 대한 로망이 있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초대 교회 성도들이 유대교나 이방 종교의 모습과는 다른 단순한 예배를 지향했을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초기라서 그랬을까요? 그러면 왜 종교 개혁자들이 로마 카톨릭의 전통과 예전을 개혁하고자 했을까요? 둘 다 그림자에 불과한 의식이 지나치게 비대해 져서 몸통인 그리스도를 가리게 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입니다. 달을 봐야 하는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게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예배가 단순하고 소박하다고 해서 뭔가 크게 부족한 예배라고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장엄하고 화려한 예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예수님이 중심이 되는 예배, 성령과 진리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단순하고 소박할지라도 그런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찾으시는 바로 그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대면 예배이든 비대면 예배이든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을 경험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본 것이 아니라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합니다.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18)” 이번에 사도 바울은 꾸며낸 겸손으로 천사 숭배를 하는 이들을 언급합니다. 이들은 왜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경배하는 대신 천사를 숭배했을까요? 그들은 자신들이 감히 하나님이나 예수님께 직접 나갈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라 그보다 못한 천사에게 나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겸손해 보입니까? 그러나 이는 진짜 겸손이 아니라 꾸며낸 겸손이었습니다. 그들이 정말 겸손했다면 천사를 숭배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는 말씀에 묵묵히 순종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천사를 숭배한 진짜 이유는 본 것 즉 환상이나 신비 체험을 의지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환상 중에 천사를 보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계시를 주셨다 하기도 하고, 미가엘 천사가 나를 지키고 있는 환상을 보았다 말하기도 했습니다. 과연 이러한 신비 체험이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일까요? 아니면 주관적인 상상의 산물일까요? 둘 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 것을 모두 다 의지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게다가 이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자주 헛되이 과장했습니다. 작은 것도 마구 부풀려 엄청난 것을 본 것인 양 떠벌렸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육신의 생각 곧 사람들 앞에서 돋보이고 싶은 생각, 특별한 체험을 한 특별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싶은 욕망에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기와 경험한 것과 같은 신비 체험이 없는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떤 문제입니까?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19)”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머리시라면 우리는 몸의 지체들입니다. 몸은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할 수 있습니다. 마치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 연합의 관계 속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몸의 지체와 머리 사이에 연결이 끊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은혜가 공급되지 못합니다. 연합이 깨어지고 관계가 멀어집니다. 더 이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 함께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라날 수 없을 뿐더러 점점 신앙이 병들고 죽어 가게 됩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제 대신 신비한 체험만 쫓아다니는 사람, 하나님의 객관적인 계시인 말씀을 붙드는 대신 자기가 본 환상을 더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결국 성장도 성숙도 없고 열매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천국을 보았다. 천사를 만났다. 계시를 받았다.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분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 중에는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온 신비한 체험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그런 체험을 한 많은 사례들이 등장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신비 체험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목사님에게서 이런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가끔씩 자신을 곤혹스럽게 하는 청년들이 찾아오는데, 누구냐 하면 어떤 자매와 결혼을 하라는 하나님의 계시가 임했다는 청년이라고 했습니다. 한번은 한 자매에 대해서 두 청년이 동시에 계시를 받았다고 찾아오는 바람에 목사님이 아주 난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왜 그 계시라는 것이 꼭 교회에서 예쁘다는 자매들만 지목하는지 그게 참 미스테리야.” 그런데 여기서 그 신비 체험이 참이냐 거짓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참이라 하더라도 신비 체험 그 자체를 의존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체험을 의존하면 어떤 현상이 생길까요? 신비 체험의 흥분과 감격이 사라지고 나면 깊은 공허감이 밀려옵니다. 이것을 채우기 오해서 또 다른 신비 체험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전보다 더 큰 신비 현상을 경험해 보고 싶어 집니다. 점점 더 자기가 본 것에 대한 주관적인 확신이 강화됩니다.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점점 극단으로 치우치고, 결국에는 고립되게 됩니다. 우리는 신비와 체험을 결코 배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비주의 영성을 지향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체험보다 하나님의 객관적인 계시인 말씀을 더 앞세웁니다. 우리의 주관적인 체험은 항상 말씀에 의해 검증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체험이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과 상충이 있거나 모순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신비한 체험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말씀에 대한 믿음과 순종입니다. 믿음과 순종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체험은 도리어 독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내가 보고 들은 것을 의지하기보다는 항상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부터 영적인 생명을 풍성하게 공급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규례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20,21)” 여기서 바울은 규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들은 수많은 종교적인 규칙을 만들고 이를 지키도록 요구하는 금욕주의자들입니다. 금욕주의자들의 대표적인 표어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였습니다. 이것도 안 된다, 저 것도 안 된다, 요 것도 안 된다, 온통 안 되는 것 천지였습니다. 삶이 각종 금기와 터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가르침과 삶에 매력을 느끼십니까? 너무 답답하고 힘들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금욕주의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규칙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에서 ‘내가 잘 하고 있다. 내게는 아무 문제도 없다.’는 안정감을 느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나는 보통 사람들이 이루어 내지 못하는 일들을 성취하고 있다는 우월감을 느꼈습니다. 계율을 철저히 지키지 못하는 신자들이 그냥 크리스천 혹은 날라리 크리스천이라면 자신들은 슈퍼 크리스천, 알짜 크리스천이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런 금욕주의자들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22,23)” 먼저 바울은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이라고 했습니다. 한때 쓰인다고 한 것을 볼 때 금기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일정한 공동체적 금기가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 교회에는 금주와 금연이라는 금기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런 금기가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조선 땅을 밟고 들어와 보니 술과 담배 때문에 당시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한 번 술을 마셨다 하면 필름이 끊어질 때까지 마시는 고약한 버릇이 있습니다. 게다가 너무 자주 마시고 마신 후에는 폭력을 행사하고 사고를 너무 많이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이런 악습을 뿌리 뽑기 위해서 신자는 금주 금연하기로 결의를 했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이런 악습과 폐해가 뿌리 뽑힌다면 언젠가 금주, 금연이라는 금기가 없어질 날이 올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상황에 따라 주어진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일 뿐,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이라고 하면 너무 지나친 것입니다. 금욕주의는 유익이 없지는 않지만 한계도 있습니다. 금욕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자의적 숭배란 사람이 고안해 낸 종교적 규범을 말합니다. 이런 규범은 어떤 공동체가 일체감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는 면이 있습니다. 또 금욕을 실천하면 일시적으로 사람이 좀 겸손해지기도 합니다. 마구 날 뛰는 육체의 욕망을 진정시키는데 잠깐 동안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입니다. 금욕주의는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악으로 이끄는 육체의 소욕을 근본적으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금욕주의는 욕망을 잠시 억누를 뿐입니다. 한 쪽을 누르면 다른 쪽으로 부풀어 오르기도 하고 한참 동안 억제되었던 욕망이 분출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금욕주의는 신앙 생활의 중심이 되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 신앙 생활의 중심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야만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금기가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자매님들 경우에는 한 때 긴 머리는 안 된다, 귀걸이, 목걸이 안 된다는 등등의 금기가 있었습니다. 제가 학창 시절에는 가요나 팝송을 듣는 것, 영화관에 가는 것도 금기 중 하나였습니다. 이 외에도 암묵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의 목록과 해야 할 것들의 목록이 줄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 때 있었던 금기들이 많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긴 머리 자매도 많고 귀걸이를 했다고 해서, 가요를 들었다고 해서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율법적인 요소가 사라지고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인가요? 아니면 세속에 물들어 절대성을 잃고 상대적인 된 것일까요? 아직까지 이 질문에 대해서 완전히 일치된 견해는 없는 것 같습니다. 상반되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합니다. 이런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말해 주는 바가 있습니다. 금기는 무조건 좋다 혹은 무조건 나쁘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에게 금기가 많았던 것은 대부분 혈기 왕성한 20대들이 모여 있었고 신앙적으로 아직 초보였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연령대가 다양해지고 연륜이 쌓여 가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금기들이 사라져 갔습니다. 그때는 금기가 있을 필요가 있었고, 지금은 금기가 없어질 필요가 있을 뿐입니다. 또 필요하다면 새로운 규칙이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그 자체에 얽매이기 보다는 우리에게는 금기와 규칙 이상의 것, 더 큰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소방관들이 불을 끌 때 맞불을 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불을 끄러 갔는데 오히려 불을 내다니 참 이상한 일입니다. 왜 맞불을 놓는가 하면 그 불이 주위의 산소를 다 흡수해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원래 있던 불은 산소가 없어 더 이상 타지 못하고 꺼지게 됩니다. 육체의 소욕을 이기는 길이 이와 같습니다. 금욕주의는 불을 끄기 위에 그 위에 물을 뿌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워낙 육체의 소욕이 불처럼 강해서 잘 잡히지 않습니다. 이보다 더 강력한 것은 맞불을 놓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망이 불타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열망이 활활 불타오르게 되면 이 열망이 우리의 생각과 관심을 다 빨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육체의 소욕이 힘을 쓰지 못하고 점점 사그라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근본적으로 죄의 소욕을 이길 수 있는 길입니다. 죄와 싸워 이기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열망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우상들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예수님을 모시어 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이를 통해 복음의 능력, 말씀의 능력, 성령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 본 장엄하고 화려한 의식, 신비한 환상과 체험, 금욕적인 생활, 이 세 가지는 사람들이 종교의 기본 요소라고 여기는 것들입니다. 바울 당시 골로새 교회에 침투했던 이단 세력은 모습은 다양하지만 공통적으로 기독교를 껍데기만 화려한 죽은 종교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흔히 말하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복음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안에 생명으로 이미 들어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생한 만남이고 교제이며 연합입니다. 이 복음의 생명을 경험하고 누리고 있는 사람은 굳이 장엄한 의식도, 신비한 체험도, 엘리트적인 금욕주의도 더 이상 거기에 끌리지 않습니다. 다만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들 뿐입니다. 눈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귀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만족하고, 가슴은 그리스도를 향한 열망으로 타오를 뿐입니다. 신동엽 시인의 시 가운데 이런 외침이 있습니다.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다시 껍데기는 가라.” 우리도 신앙에서 껍데기는 다 버립시다. 그래서 오직 알맹이인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 남아서 우리를 충만하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반응형

'설교 > 골로새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께 하듯 하라  (0) 2021.02.14
위의 것을 찾으라  (0) 2021.02.07
그 안에서 행하라  (0) 2021.01.24
이 비밀의 영광  (0) 2021.01.17
만물의 으뜸이신 그리스도  (0) 2021.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