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언약의 피

이창무 2020. 12. 27.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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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39 강 / 이창무

언약의 피

말씀 / 마태복음 26:1-30
요절 / 마태복음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오늘 말씀은 2020년 마지막 주일 말씀이자 마태복음 마지막 강의입니다. 저는 몇 달 전부터 이 메시지를 전하는 주일에 반드시 성찬식을 하리라 마음을 먹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상황 때문에 성찬식을 하지 못하게 되어서 너무 아쉽습니다. 결국 올해 우리는 한 번도 성찬식을 하지 못하고 한 해를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지 못한 만큼 사모하는 마음은 더욱 커져만 갑니다.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조만간 대면 예배를 회복하고 성찬식이 가능한 주일이 올 것입니다. 그날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어느 때보다 더욱 더 감격스럽게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나눌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과 종말에 관해 가르치신 후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1).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2)” 이번에 예수님은 네번째로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이전과 다른 점은 죽음의 때를 구체적으로 유월절로 언급하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하필 유월절에 죽고자 하셨을까요? 이는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나타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죽음의 사자가 애굽의 모든 장자를 칠 때 이스라엘 백성들도 심판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백성들은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습니다. 죽음의 사자는 그 피를 보고 그 집을 심판하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처럼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이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대제사장의 관정에 비밀리에 모여 예수님을 죽이려는 모의를 하고 있었습니다(3,4). 단, 민란이 날까 두려워 유월절 기간 중에는 죽이지 말자고 했습니다(5).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뚜렷한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둘 다 예수님이 죽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의견 일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월절에 죽고자 하셨던 반면, 종교지도자들은 유월절에는 죽여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납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정반대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희생으로 보시는 반면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이 정적의 제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서로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무엇입니까? 남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 길입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길은 무엇입니까? 반대로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죽이는 길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 두 가지 길이 존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길을 선택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자를 밀어내려 합니다. 이들의 모토는 ‘다 죽어도 좋아. 나만 살면 돼’입니다. 이들은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의 길을 가셨습니다. 남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토는 ‘나는 죽어도 좋아. 너희를 살릴 수만 있다면’ 이었습니다. 누군가의 강요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 이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이 예수님의 길을 뒤따라 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처럼 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와서 죽으라는 명령과 같다” 물론 이 길은 죽음으로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예수님과 함께 부활합니다. 결국에는 이 길은 남도 살리고 나도 사는 길입니다.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혹시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침묵하고 있는 본문의 제자들처럼 속으로 갈등만 계속하고 있지 않나요? 어떤 선택을 해야 마땅한 지는 다음에 나오는 향유를 부은 여인과 가룟 유다, 이 두 사람의 엇갈린 행보를 보며 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였습니다(6).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7). 예나 지금이나 향유(또는 향수)는 조금만 뿌려 은은한 향기가 나게 하는 것이 바른 사용법입니다. 또 이 향유 옥합은 여인이 오랫동안 결혼을 준비하기 위해 모아온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그 비싼 향유를 통째로 예수님의 머리에 들이부어 버렸습니다. 누가 봐도 지나친 행동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이 여인은 왜 이렇게 했을까요?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을 표현할 길이 이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내 결혼의 꿈보다 내 장래 남편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분이라는 사실을 주님께 전달해 드리려는 마음이 너무 간절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앞뒤 재지 않고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9,10)” 제자들은 여인의 행동을 경제적 관점, 실용적 가치를 중심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일리 있는 해석이고 합리적인 대응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을 경제적 가치, 실용적 가치만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사랑은 본래 낭비의 요소가 있습니다. 제가 학창 시절에는 짝사랑하던 이성에게 종이학 천 마리를 접어서 유리병에 담아 선물하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시간 낭비, 종이 낭비입니다. 그럴 시간에 공부하는 편이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당사자에게는 경제적 가치, 실용적 가치를 뛰어넘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을 몰라주면 상처를 입습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자를 괴롭게 하지 말라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점에서 좋은 일입니까? 가난한 사람은 늘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도와줄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며칠 후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를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12)” 유대에는 시신에 향유를 붓는 장례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장례를 급하게 치르느라 향유를 부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이 미리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셈이 되었습니다. 물론 여인이 이 모든 일을 미리 다 알고서 이렇게 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행동을 자신의 죽음과 연결시켜 주셨습니다. 아울러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왜 여인의 행동이 길이길이 기억되어야 할까요? 이 여인이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으실 예수님께 가장 모범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 나 대신 죽어 주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생명의 은인에게 향유 한 옥합을 깨트려 부어 드린 것이 과연 과한 행동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도리어 이것 밖에는 드릴 것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여인을 대신해 잠시 후 십자가에서 죽으실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이 헌신은 전혀 낭비가 될 수 없습니다. 지극히 합당하고 적절한 행동을 했을 뿐입니다.

반면 정반대의 행동에 나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가룟 유다였습니다. 유다는 대제사장들을 찾아 예수님의 몸값을 흥정했습니다. 그들은 은 삼십을 제안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노예 한 사람의 몸값이었습니다. 유다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팔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습니다. 유다는 왜 삼 년 반이나 따랐던 스승을 팔아 넘기려 할까요? 그것도 겨우 은 삼십이라는 헐값에 팔려고 할까요? 예수님의 지명도를 고려해 보면 적어도 몇 배는 더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이를 보면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우리는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했다고 생각하지만 유다는 거꾸로 예수님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잘 되고 성공하고 출세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결국 남이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이런 선택에 분노했습니다. 내 인생을 망친 원흉에게 은 삼십은 충분한 몸값이라고 여겼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예수님은 뻔히 다 알고 계셨습니다. 이제까지 동고동락해 온 제자의 오해와 배신에 얼마나 마음이 괴로우셨을까요? 당장 멱살을 붙잡고 네가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냐 따져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유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유월절 만찬을 시작하기 앞서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들은 제자들은 너도 나도 근심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나는 아니지요”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신할 생각을 추호도 한 적이 없다면 이런 말을 굳이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 모두 한 번쯤 도망칠 궁리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뜨끔해서 이런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가룟 유다는 물타기를 하기 위해 다른 제자들과 똑같이 ‘나는 아니지요’라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과 한 가지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호칭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주님이라고 말했지만 오직 유다만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누구나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 배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만난 사람은 차마 그 선을 넘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단지 좋은 선생 정도로만 알았던 사람은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면 언제든지 배신자로 돌변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가룟 유다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를 위해 돈, 명예, 권력보다 훨씬 더 귀한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결국 예수님 대신 은 삼십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향유를 부은 여인과 가룟 유다는 공통점과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공통점은 두 사람 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그 죽음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가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이해는 전혀 달랐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 나를 대신한 죽음, 나를 살리기 위한 죽음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구원을 이루기 위한 위대한 사랑의 성취임을 알았습니다. 이 때문에 여인의 심장은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예수님을 향한 사랑으로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마침내 향유를 쏟아 부어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반면 유다는 예수님의 죽음을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자기도 망하고 자기를 따르던 자들의 인생도 망쳐 버린 처절한 실패로 받아들였습니다. 가룟 유다의 가슴에는 절망감, 후회, 원망과 저주가 부글부글 끓어 올랐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은 삼십이라는 푼돈에 팔아 넘기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담긴 의미를 아느냐 모르느냐가 이렇게 어마어마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주님을 향한 헌신과 사랑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이고 대책 없는 광신이라고 비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죽으심이 바로 내 죄 때문이고 주의 못 박히심이 바로 내 허물 때문임을 아는 사람은 여인의 헌신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여인의 행동을 본받고자 하고 여인처럼 헌신하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합니다. 주님의 은혜에 비하면 나의 감사와 사랑은 늘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내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내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시고 내 대신 죽으신 주님이십니다. 그분께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드린다도 해도 아까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영국 캠브리지 출신으로 콩고 선교사로 헌신했던 찰스 스터드가 남긴 말을 기억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분이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그분께 드리는 어떤 희생도 결코 크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 앞에서 너무 큰 희생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무한한 가치를 기억하고 감사하고 드러내기 위한 어떤 헌신, 어떤 희생도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이 담고 있는 의미와 그 한량 없는 사랑을 더 깊이 그리고 더 풍성히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이 여인처럼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의 무한한 가치를 우리 삶으로 온전히 드러내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과 가룟 유다 이 두 사람의 딱 중간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여인처럼 예수님의 죽음이 담고 있는 의미를 깊이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다처럼 예수님께 분노하거나 배신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면 여인과 같이 용광로만큼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끝까지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얼음장처럼 차가워져서 예수님을 배반하게 될지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위해 유월절 만찬을 통해 자신의 죽음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6-28)” 이 유월절 만찬에는 이상하게 양고기가 없었습니다. 그 대신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나누어 주시는 떡과 포도주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받은 떡 조각은 십자가에서 찢기신 예수님의 몸을 상징합니다. 떡을 먹는다는 것은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새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마시는 포도주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나타냅니다.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내 더러운 죄를 속하여 죄 사함을 받게 하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장 19절에 보면 예수님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념하라는 말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더 나아가 이를 놓치지 않도록 계속해서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성만찬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영화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993년에 나온 ‘얼라이브’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다음과 같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1972년 10월 13일 우루과이를 떠나 칠레의 산티아고로 가는 비행기가 악천후를 만나 안데스산맥에 불시착했습니다. 눈 덮인 안데스 산맥에서 추위와 굶주림과 싸우면서 67일간 끝까지 견디어 구출 받은 자는 탑승객 45명 중 16명 뿐이었습니다. 이들이 두 달 동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죽은 사람의 살을 뜯어 먹고 연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상으로 앓다 죽어간 니코리치는 아버지 앞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아버지도 전혀 믿기 어려운 일이 이곳에서는 벌어지고 있습니다. 죽은 친구의 살을 쪼개어 내는 일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길이 없으니까요. 저도 이제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는 나의 살이 친구들을 구원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살아남은 청년 호세는 후에 로저스 신부에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학생시절에 교회에 빠져본 일이 없습니다. 부모님이나 동네 어른들은 저를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죽음의 산위에서 새로운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교회는 다녔으나 하나님의 집에서 살지 않았고 신자란 이름을 가졌으나 참 신자는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눈 덮인 산 위에서 죽음과 싸우면서 비로소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교회에서는 수없이 성만찬 예식에 참석했으나 기계적으로 빵과 포도즙을 든 것뿐이며 그 뜻이 전혀 내 가슴에 전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산위에서 죽은 친구의 살 조각을 손에 들었을 때 그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알았으며 정말 십자가가 무엇이며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했습니다. 주여! 우리의 육을 산 위에 장사하고 새 사람으로 이 산을 내려가게 하소서. 새 생명을 얻은 우리는 이제 주만을 위하여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영원히 주의 백성으로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호세처럼 예수님과의 이 최후의 만찬을 결코 영원히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역시 예수님의 죽으심을 결코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예수님이 죽으시면서 찢으신 그 몸을 먹고 흘리신 그 피를 마셔야 살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우리 몸과 마음이 예수님으로 가득차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케 되길 기도합니다. 나를 위해 살을 떼어 주시고 피를 흘려 피의 언약을 맺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께 감사드리며 주님을 더욱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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