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창무 2020. 11. 8.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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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34 강 / 이창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 / 마태복음 22:15-40
요절 / 마태복음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지난 주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 뉴스에 따르면 바이든 후보가 당선을 확정지은 상황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부정 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승복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혼란한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 모르겠습니다. 이와 비슷한 대립과 갈등을 우리는 정치만 아니라 종교와 학문까지 거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크게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대립했고, 바리새파 안에도 수많은 분파들이 난립해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그들은 자신들의 갖가지 난제를 고스란히 예수님께 가져와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해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15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께 왔습니다. 평소 바리새인과 앙숙 관계인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오다니 별 일입니다. 게다가 웬 일로 예수님을 장황하게 칭찬하기까지 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거리끼는 말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다(16)” 평소 안 하던 행동을 하면 동기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15)” 아니나 다를까 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한 장치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머리를 맞대고 준비했던 함정이 무엇입니까?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17)” 만약 이 질문에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답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금 납부에 거부감이 큰 일반 백성들과 바리새인들을 모두 적으로 돌리게 됩니다. 반대로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답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납세 거부를 선동한 죄목으로 로마 당국에 체포를 당할 빌미를 주게 됩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외통수로 내몰린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대답에 앞서 예수님은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데나리온은 당시 로마의 은화로서 ‘신의 지존하신 아들 디베료’라는 글과 함께 황제의 흉상의 새겨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려 주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1)”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란 무슨 뜻일까요?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은전은 가이사에게 돌려주라는 의미입니다. 로마가 세금을 거두어 황제가 호위 호식하는 데에만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세금은 로마 제국 내에서 질서와 안녕을 유지하고 복지 정책을 펼치는데 쓰였습니다. 유대인들도 그 혜택의 상당 부분을 누리는 만큼 세금을 납부하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진짜 핵심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말 속에 담겨 있습니다. 가이사의 형상이 데나리온에 새겨져 있다면 하나님의 형상은 어디에 새겨져 있습니까? 창세기 1장 27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너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돌리는 것도 거부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가이사에게는 가이사의 정당한 몫으로 은전 하나만 바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바로 나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내 안에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예수님의 첫번째 해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네 자신을 하나님을 드리라’ 입니다. 세금 납부 문제는 예수님 당시 친로마냐 반로마냐를 가르는 최대의 정치적 이슈였습니다. 예수님은 친로마도 반로마도 아니었습니다. 로마에게는 합당한 몫을 주고 다만 너희는 하나님께 네 자신을 드리기에 힘쓰라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신자들 가운데도 진보냐 보수냐 하는 정치적 이슈가 참 민감한 주제입니다. 왜 이렇게 서로 입장이 갈리는 것일까요? 타고난 성향도 있을 것이고 서로 경험한 바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자기가 서 있는 입장이 다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서로 내 편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진보일까요? 보수일까요? 예수님은 진보 편도 보수 편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늘 하나님 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받을 딛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고 있는 한 정치에 무관심할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기에 앞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대한민국이 정말 좋은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가슴 속 깊이 바라는 것은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 하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하나님의 왕권에 충성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이자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우리가 서로 어떤 노선, 어느 후보를 지지하느냐 등을 놓고 싸우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저 시민의 의무를 다하면 그만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면 됩니다. 우리가 정말 힘써야 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치적 이슈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을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실패하고 떠난 후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왔습니다(23). 사두개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사두개인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대제사장 그룹과 귀족층 인사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에 부활에 관한 교리가 없다며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최후의 심판도 믿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 것을 전부로 여겼습니다. 이런 그들이 예수님께 까다로운 질문 하나를 던졌습니다(24~28). 이 질문은 신명기 25장에 나오는 형사취수법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형사취수법이란 형이 아들이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후사를 남기도록 한 법입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만약 부활이 있다면 이 법 때문에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칠 형제가 있었습니다. 장남이 아내를 얻었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었습니다. 둘째가 형수와 결혼했지만 역시 상속자 없이 죽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셋째, 넷째… 일곱째까지 다 죽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자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일곱 명의 형제와 여자가 모두 부활했을 때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있을 것 같지 않지만 없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29)”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짚어 주셨습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리나(30)” 여기서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이 된다는 말씀을 부활하면 육체가 없이 영혼만이 존재하거나,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사라져 중성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부활하면 현재의 몸과는 다른 새로운 몸을 입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 몸을 가리켜 신령한 몸이라고 했습니다. 그때에는 죽음이 없을 뿐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탄생도 없어집니다. 따라서 더 이상 장가가거나 시집 갈 일도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부활 이후의 삶은 부활 이전의 삶과는 질적으로 다른 삶이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의 성경에 대한 무지를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32a)" 이 말씀은 사두개인들도 정경으로 인정하는 출애굽기 3장 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 말씀을 하셨을 때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모두 죽어서 무덤에 묻힌 뒤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고 이삭의 하나님이었고 야곱의 하나님이었노라'고 하셔야 옳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은 모두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곧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현재도 살아 있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32b)" 예수님의 결론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사두개인들을 은근히 디스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산 선진들은 죽었지만 현재 살아 있습니다. 또 장차 새로운 몸을 입고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도 영생도 심판도 믿지 않고 부와 권력을 의지하며 사는 사두개인들은 살았지만 사실상 죽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성경을 진리의 말씀으로 믿고 사는 자들에게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는 지금부터 영원토록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두번째 해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믿으라’ 입니다. 부활이 있느냐 없느냐는 예수님 당시 최대의 교리 논쟁이었습니다. 현재에도 치열한 교리적인 논쟁들이 많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유아 세례 문제입니다. 장로교에서는 유아 세례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침례교에서는 유아 세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누구 말이 맞을까요? 이 외에도 종말론에 대해서도, 교회 제도에 관해서도, 구원의 과정에 관해서도 여러 서로 대립되는 논쟁들이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들이 생겨날까요? 이것 역시 각자 경험의 차이, 성향의 차이, 입장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이 왜 부활을 부정했을까요? 부활이 성경에 나오지 않아서가 아니었습니다. 부활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활하지 않아도 이 땅에서 이미 충분히 잘 먹고 잘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은 자기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어떤 입장을 고수하면서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 하기 쉽습니다. 그러다 서로 얼굴을 붉히며 싸우게 됩니다. 그러나 나와 너의 생각은 언제나 틀릴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언제나 참되고 옳습니다. 논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설령 내 머리로 잘 이해가 안 되고 내 경험 상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대로 다 이루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나이 들어 잉태할 능력을 잃었는데도 하나님이 아들을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축복해 주실 것을 믿고 계속 우물을 팠습니다. 야곱은 가나안을 약속의 땅으로 주실 것을 믿고 막벨라 굴에 묻혔습니다. 이들을 가리켜서 예수님은 ‘살아 있는 자’라고 부르셨습니다. 논쟁에서 이긴다고 살아 있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사람이 살아 있는 자입니다. 우리가 서로 신앙관이 조금 다르고 성경을 보는 시각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 가지고 불필요한 논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 약속의 말씀을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다 넉다운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새인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그들은 한편 통쾌하기도 하고 한편 예수님의 실력이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하시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실력을 확실히 테스트해 보기 위해 한 율법사를 보내 자신들이 오랫동안 풀지 못했던 난제 하나를 던져 보았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36)” 구약 성경에는 총 613가지나 되는 계명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이 많은 계명들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큰 계명인지를 놓고 오랫동안 치열하게 논쟁을 벌여 왔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논쟁을 벌여도 쉽사리 결론을 낼 수 없었습니다. 이 해묵은 난제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37-40)” 예수님이 언급하신 첫번째 하나님 사랑에 관한 계명은 신명기 6장 4절과 5절에서 두번째 이웃 사랑에 관한 계명은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 두 계명만 중요하고 나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말은 이것이 모든 율법의 기초이며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율법의 기초요 본질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기만 한다면 당연히 613개의 모든 율법을 다 지켜 행하지 않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어떤 계명이 더 큰 계명이냐를 놓고 논쟁하고 서로 각을 세우고 비판하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힘을 쏟지 않았습니다. 강도 만난 이웃이 길에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도 토론회에 늦으면 안 된다는 핑계를 대고 그냥 지나쳐 버리고도 남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명을 주셨을까요? 계명의 말씀을 가지고 평론하라고 주셨겠습니까? 논쟁하고 싸움 하라고 주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라고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예수님의 세번째 해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랑하라’ 입니다. 학문의 기본은 조사하고 분류하고 정의를 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사들도 그렇게 율법을 체계화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작업을 어떤 기준으로 할 것이냐를 놓고 수많은 학파가 생기고 그 학파들끼리 논쟁을 벌이느라 숱한 밤을 샜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율법을 실천하는 일은 등한시했습니다. 율법이 학문이 되면서 점점 순종은 더 이상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체계적인 성경 공부로 나름 유명한 모임입니다. 그 덕분에 국민일보에서 수여하는 큰 상을 여러 번 타기도 했습니다. 감사한 일이고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체계적인 성경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노트북에 말씀 공부 문제 풀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더라도 한 말씀도 순종하지 않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말씀에 대한 순종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한 목자님이 저에게 와서 십일조를 할 때 기준을 세전으로 해야 하느냐 세후로 해야 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답해 드렸습니다. “목자님, 세전이냐 세후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해 보세요. 그리고 이웃을 내 몸과 사랑해 보려고 애를 써 봅시다. 그러면 목자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으실 수 있을 거에요.” 우리가 인생을 마치는 날에 무엇이 아쉽고 후회가 될까요? 아직 깔끔한 해답을 찾지 못한 문제들이 아쉬울까요? 나와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을 확실하게 이겨주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될까요? 그보다는 사랑할 수 있었는데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한 것이 아쉽고 후회스러울 것입니다. 사랑하며 살기에도 인생은 짧습니다. 불필요한 시시비비와 논쟁으로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당장 오늘부터 싸우는 시간은 줄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시간을 조금씩 늘려 가면 어떨까요? 그래서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 사랑하기에 열심이었던 사람들로 기억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지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종교 지도자들이 들고 온 문제들은 하나 같이 오랫동안 풀지 못하고 논쟁만 벌여 왔던 난제들이었습니다. 영역도 정치, 종교, 학문에 이르기까지 두루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질문에 막힘이 없이 척척 답변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논쟁과 다툼, 분열과 갈등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해답도 없이 서로 평행선만 달릴 때도 많습니다. 이런 소모적인 논쟁이 우리를 지치게 하고 소중한 우리 삶을 허비하게 하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로 가면 해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는 우리 삶의 본질과 핵심으로 직행하는 한 차원 높은 해답이 있습니다. 모든 삶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 되어 주시고 지혜가 되어 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우리가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언약을 믿는 믿음으로 살며,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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