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이창무 2020. 10. 12.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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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31 강 / 이창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말씀 / 마태복음 21:1-17
요절 / 마태복음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집에 있는 컴퓨터가 고장이 나 잘 되지 않을 때 애타게 저를 찾는 전화가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제가 집에 가서 컴퓨터를 열기만 하면 문제가 말끔히 사라진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그때 컴퓨터도 자기 주인을 알아보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1장 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소도 나귀도 심지어 컴퓨터도 주인을 알아보지만 오직 인간만이 제 주인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주인이 누구인가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근처 벳바게라는 마을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1). 예수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너희는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2)” 두 가지 점에서 이 말씀이 놀랍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거기에 나귀가 있는 줄 어떻게 아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어떻게 나귀를 풀어 끌고 오라고 명령하실 수 있을까?’하는 점입니다. 둘 다 보통 사람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요?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3)” 당연히 나귀 주인이 무슨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에게 누가 무슨 이유와 목적으로 나귀를 빌려 달라 하는지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단 한 마디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나귀에게 나귀 주인이 있듯이 나귀 주인에게도 나귀 주인의 주인인 예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나귀 주인이 나귀를 탈 때 내가 지금 어디로 갈 예정이고 소요 시간은 얼마이며 행차하는 목적이 일일이 다 설명해 주고 타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귀는 주인이 너를 쓰겠다고 하면 쓰임 받을 뿐입니다. 나귀도 이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두 말없이 주인을 태우고 길을 나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생들의 주이시며 모든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에게는 필요하실 때 무엇이든 가져다 쓰실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이에 나귀 주인은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나귀를 내어 주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영접하게 되었을까요? 그가 살던 건너편 마을의 이름은 베다니였습니다. 베다니는 예수님께서 죽은 지 사흘이나 되어 시체 썩는 냄새가 나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곳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나귀 주인도 그때 나사로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주 예수님께서 쓰시고자 하실 때는 선한 일을 위해 꼭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라 믿고 자신의 나귀를 기꺼이 내어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나귀는 온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타신 나귀가 되었습니다. 이런 가문의 큰 영광이 어디 있습니까? 이 나귀는 본래 흔하디 흔한 수많은 나귀 중 한 마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쓰임 받았기 때문에 세상 모든 나귀들 중 가장 존귀한 나귀가 되었습니다.

저는 2 주전에 ‘포도원 품꾼의 비유’ 말씀을 전하고 나서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저는 오후 5시에 온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젊은 시절 내내 헤매다가 다른 분들에 비해 뒤늦게 풀타임 목자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본부에 스탭 목자로 들어온 사람들 중에 제가 최고령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는 이렇게 글을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베다니 마을의 나귀 새끼입니다.” 왜냐하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풀타임 목자가 되기 전에 사실은 미국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실리콘 밸리의 IT 회사에서 일하기로 하고 2년 동안의 준비 과정을 거쳐 미국 취업 비자를 받았습니다. 백일 된 막내의 여권까지 만들고 살던 아파트도 부동산에 내놓았습니다. 오직 비행기 티케팅만 남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김모세 목자님이 양수리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자고 하셨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목자님은 저에게 한국에 남아 목자로 섬기면 어떻겠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으면 하는지 이유도 설명도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자리에서 바로 ‘Yes’ 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이 있기 얼마 전 주님께서 제 마음에 네 자신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린 나귀의 등에 예수님이 타셨듯이, 어리고 부족한 제 등에 예수님이 타셔서 저를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중종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쓰시겠다는 것인지, 모든 자초지종을 다 설명해 주시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이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겠습니까? “기다려 보세요” “싫어요” “왜 하필 납니까” 이런 대답은 굴러들어 온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Yes, Lord’ 하고 주님께 내어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드린 그것을 주님께서 쓰셔서 가장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최고의 인생들은 남들보다 잘 나가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 쓰임 받는 인생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쓰시고자 하실 때 기꺼이 자신을 내어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필이면 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려 하셨을까요?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4,5)” 장차 오실 메시아에 관해 예언한 스가랴 9장 9절 말씀의 성취를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바로 그 영원한 왕이심을 나타내기 위해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나귀 새끼였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고대의 왕들은 두 종류의 탈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나귀입니다. 전쟁터에 나갈 때 왕은 말을 탔습니다. 반면 평화의 때에는 나귀를 탔습니다. 말을 탄 왕을 보면 사람들은 걱정하고 불안했습니다. 그러나 나귀를 탄 왕을 보면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으로 무력이 아니라 평화로 다스리시는 왕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십니다. 나귀 새끼를 탄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새끼 나귀는 너무 작아서 예수님의 발이 땅에 질질 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아직까지 한 번도 안장을 지우지 않았던 나귀라 사람을 태우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흔들리는 나귀를 따라 좌우로 뒤뚱거렸습니다. 솔직히 너무 우스꽝스럽지 않겠습니까? 너무 위엄이 없고 폼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심으로 무장해제시키는 분이십니다. 나귀 새끼를 탄 예수님은 왕은 왕이시되 섬기러 오신 왕이요 스스로 종이 된 왕이십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무리의 대다수는 겉옷과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고 주님께 복종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습니다(8).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9)”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백성들은 오랫동안 전쟁에 미친 왕들과 거만한 왕들에게 시달려왔습니다. 언제 전쟁터에 끌려 나가서 죽을 지 몰라 불안했습니다. 변덕스러운 왕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에게서 평화의 왕, 겸손의 왕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제 이 왕은 말만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희생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이 참된 왕이심을 직감하고 뜨겁게 환영했습니다. 반면 예루살렘 주민들은 온통 소동했습니다(10).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아무나 살 수 없었습니다. 크나큰 특권과 지위를 누리던 사람들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모토는 ‘이대로 쭉’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새로운 왕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나귀 새끼를 탄 예수님의 모습이 그저 초라하고 궁색해 보였을 뿐이었습니다. 눈이 높은 그들은 도저히 이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당당히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왕은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이 땅 위의 통치자들은 무엇으로 다스려 왔습니까? 대부분 물리적인 힘으로 다스려 왔습니다. 로마 제국부터 시작해서 대영 제국, 그리고 현재 유일한 슈퍼 파워인 미국을 떠 받쳐 주었던 힘은 강력한 군사력이었습니다. 한 나라 안에서도 강력한 경찰력과 사법권이 없이는 통치가 불가능합니다. 굳이 무력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고개를 숙이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실의 위엄을 높이 세우고 화려하게 꾸며서 주눅이 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길을 따르지 않은 유일한 왕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무력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무력하게 체포 당하신 후 끌려 가셨고 결국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힘이 있지만 그 힘을 사용하기를 포기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그 무력해 보이던 십자가가 온 세상을 무장해제 시켰습니다. 그 십자가가 세상을 정복했습니다. 힘을 내려놓음으로 도리어 적대자의 힘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평화의 왕,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통치 방식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힘으로 사람들을 굴복시켜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설령 그 나라가 이루어졌다 해도 그 나라는 더 이상 하나님 나라가 아닐 것입니다. 다스리는 사람만 바뀌었을 뿐 다스리는 방식은 그 전과 전혀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그 나라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방식 그대로 평화의 길, 겸손의 길을 따라가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가진 힘을 제대로 한 번 보여주겠다. 힘으로 반드시 너희들을 굴복시키고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고 말겠다. 너희들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기를 죽여 놓겠다.’ 이런 식은 예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힘의 논리가 판 치는 세상 한복판에서 십자가의 사랑과 섬김만이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힘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힘을 내려 놓는 곳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힘으로 누르고 윽박질러서 무언가를 이루려는 시도를 포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왕 예수님은 겸손의 왕, 평화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마음으로 깊이 영접하고 져야만 승리하는 놀랍고 신비한 그 십자가의 길을 가기를 기도합니다.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은 가장 먼저 예수님은 성전으로 가셨습니다(12). 이때 성전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성전이 본래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자 마자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곳에 있었던 이유는 외국에서 오는 순례객들의 편의를 위해서였습니다. 멀리서 제물을 들고 올 수 없으니 파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또 성전세를 내기 위해서는 아무 초상도 그려지지 않은 동전으로 바꾸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다 필요해서 있는 사람들인데 예수님은 왜 쫓아내셨을까요? 안 그래도 코로나로 힘든 자영업자를 두 번 죽이시는 것 아닙니까? 그 이유를 예수님은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13)” 이 장사꾼들이 있던 곳은 성전 안 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이곳은 성전을 찾은 이방인들이 기도하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려고 하면 온 사방에서 호객하는 소리, 흥정하는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도저히 기도를 할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는 터무니 바가지 요금이 기승을 부리고, 수익금의 일부는 제사장들의 뒷배를 두둑하게 채우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강도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내 집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오셨는데 그 집 종들이 자릿세를 왕창 뜯어가고 있으니 어떻게 예수님이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둘째, 성전은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당시 성전에는 순례객들에게 구걸하기 위해 모여든 맹인과 저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 입구에서 이리 저리 쫓겨 다니며 구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들을 회복시켜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성전은 본래 이렇게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는 곳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인간이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성전은 본래 주님을 향한 찬미 소리로 가득차야 할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 계실 때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크게 외쳤습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불같이 화를 내며 어린이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16)” 성전은 본래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 소리로 가득한 곳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전에 있던 어른들은 아무도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향한 찬미의 노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라도 성전 곳곳에 찬미 소리가 울려 퍼지게 하셨습니다.

지금은 건물로서 성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곧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성전의 본래 기능과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고 우리 가운데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야 하고 우리 가운데 찬미 소리가 충만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면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으로터 책망을 듣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코로나 때문에 잘 모이지 못하고 합심 기도도 여의치 않고 마음껏 찬양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어서 빨리 코로나 문제가 해결되어 자유롭게 기도하고 성경 공부하고 찬양하는 그날이 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날까지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있는 지점들을 온라인 상에서 기도와 말씀과 찬양의 끈으로 얼마든지 연결할 수 있습니다. 이번 온라인 가을 수양회가 그렇게 학생과 학사 모든 요회원 함께 모여 기도하고 말씀 공부하고 찬양하는 복된 수양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비대면 예배는 없습니다. 모든 예배는 우리 주님의 얼굴을 뵈옵는 대면 예배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만유의 주님이시요 평화와 겸손의 왕이시요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드려지는 기도와 찬미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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