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영생을 얻으려면

이창무 2020. 9. 20.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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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28 강 / 이창무

영생을 얻으려면

말씀 / 마태복음 19:16-22
요절 / 마태복음 19:21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오늘 말씀에는 영생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온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재물이 많은 청년이었습니다(22). 누가복음에 보면 이 사람이 관리라고 했습니다. 아직 젊은 나이에 남들보다 빨리 부와 사회적 지위를 동시에 거머쥐며 크게 성공한 청년이었습니다. 보통 이런 청년들은 기고만장해서 청년의 정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향락과 방탕에 빠지곤 합니다. 이 여자 저 여자를 수시로 갈아치우며 돈을 물 쓰듯이 쓰고 다니기 쉽습니다. 요즘 같으면 마약 중독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부자 청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나와서 영생에 대하여 질문을 할 정도로 문제 의식이 있고 영적인 소원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자부할 정도로 윤리적인 삶을 지향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엄마 친구 아들 아닙니까? 마치 젊은 시절의 니고데모를 보는 것 같습니다. 만약 아들이 있다면 누구나 아들이 이런 청년으로 성장해 주길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이 사람에게 도대체 어떤 고민이 있었을까요?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6)” 이런 질문을 한 것을 보면 그는 아직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생명에 들어간다(17)’, ‘천국에 들어간다(23)’, ‘구원을 얻는다(25)’는 표현과 다 같은 의미입니다. 이 청년은 선한 일을 많이 하여야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구원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착하게 살면 천국 간다’는 구원관은 이 청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구원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런 식의 구원관에는 허술하고 애매한 구석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도대체 얼마나 착하게 살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마더 테레사만큼 선행을 많이 해야 합니까? 아니면 가끔씩 불우 이웃 돕기에 성금을 보낼 정도로 선행을 하면 충분합니까? 천국에 들어갈 정도의 선행의 양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문제는 일단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은 선하다 믿고 나중에 생각해 보니 선하지 않은 일이었던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똑같은 사안에 대해 어떤 사람은 선하다 보고 어떤 사람은 악하다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선입니까?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들의 주장처럼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선입니까? 아니면 칸트가 말한 것처럼 변하지 않는 도덕법이 선입니까? 수백 년 동안 이런 저런 논쟁을 해왔지만 아직도 이런 질문에 대한 일치된 견해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선한 행실로 천국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결국 지금까지 열거한 이 질문들을 만나고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그 벽을 더듬어 봐도 출구가 없습니다. 작년에 황 안드레 목자님께서 전도 특강 말씀을 전하셨을 때 보았던 ‘무명의 전도자 프랭크 제너’라는 제목의 영상을 기억하십니까? 한 무명의 전도자가 호주 시드니 조지 거리에서 40년 동안 노방전도를 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매일마다 그 거리에서 만나는 열 명의 사람에게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실례합니다. 선생님은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만약 오늘 밤 선생님께서 죽는다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복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합니다. 저는 제 동생에게 이 질문을 던져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동생이 갑자기 버럭 화를 내어 깜짝 놀랬습니다. 아마도 제가 그의 영혼 안에 잠재되어 있던 근원적인 불안감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자 청년도 과연 오늘 밤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충분히 의롭고 선하게 살았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나름 최선을 다해 살아왔지만 2퍼센트 선행이 부족해서 천국 문턱에서 쫓겨날 것만 같아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그때 청년은 갈릴리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유대 땅에 방금 들어오신 젊은 랍비가 한 분이 계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분이라면 자신에게 부족한 2 퍼센트의 선행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실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청년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17)” 예수님께서는 답을 주시기에 앞서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핏 들으면 예수님께서 스스로에 대해서 나는 선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선한 분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것은 이 청년이 가지고 있는 구원과 영생에 관한 틀을 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머리 속에는 가장 선하지 않은 사람부터 가장 선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계단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자기는 거기서 상당히 높은 계단까지 겨우 올라왔지만 아직 더 올라야 할 계단이 남은 것 같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그 하이 레벨의 계단으로 자기를 이끌어 줄 선한 선생님으로 여겼습니다. 지금까지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1등만 했던 것처럼 더 노력해서 그 계단의 꼭대기에 올라서게 되면 영생의 문이 활짝 열릴 줄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로마서 3:10-12에서 이렇게 선언한 바 있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사람 사이에는 상대적으로 더 선한 사람, 덜 선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 중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선하고 의로우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이 청년은 자신이 선하지도 의롭지도 않다는 자기 발견부터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계명들을 더 철저히 완벽하게 지킬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을 하라는 뜻으로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계명들을 온전히 지킬 수 없도록 만드는 네 안에 있는 죄와 부패와 타락의 현실을 직시하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합당한 반응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 24절에서 외쳤던 바로 그 탄식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런데 이 청년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18a)” 청년은 예수님의 의도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대신 ‘이제까지 내가 잘 알지 못했던 숨겨진 계명이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제가 놓치고 있었던 계명이 무엇일까요?’ 이런 뜻으로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18b,19)” 예수님의 대답은 청년이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십계명이었습니다. 마지막에 말씀하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십계명 중 하나는 아니지만 십계명 후반부의 정신을 농축하여 담아낸 것이었습니다. 겉으로만 행위 측면에서만 십계명을 지켰던 것에 만족하지 말고 이웃 사랑이 동기가 되어 지켰는지를 돌아보도록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영생에 들어가기 위한 첫번째 단계는 자신의 참모습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헛된 망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출발점입니다. 복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생명에 들어가려면 죽음을 통과해야 합니다. 달콤한 천국의 만찬을 맛보려면 자기 발견의 쓰디쓴 맛부터 먼저 맛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기쁨의 찬송이 터져 나오려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하는 절망적인 탄식이 앞서 나와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분들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 청년급은 아니어도 상당히 수준 높은 분들이 많습니다. 헤어 코리아 미용실 사장님은 종종 이 제기동 바닥에서 그래도 인텔리로 보이는 사람들은 다 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시곤 합니다. 대부분 사춘기 시절 방황하지 않고 성실하게 공부했습니다. 늘 우등생이고 모범생이었습니다. 생활기록부에는 ‘품행이 방정하여 타의 모범이 됨’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전과는 물론이고 경찰서에 불려간 적도 대부분 없습니다. 직장 생활도 교회 생활도 큰 문제 일으키지 않고 잘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인 선에 만족하면서 생긴 자기 의가 참된 자기 발견의 길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어느새 복음의 길에서 멀어져 버릴 수 있습니다. 선행을 포인트를 적립하듯 쌓아서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력 구원의 길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의 말씀으로 자기 발견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당신은 마음과 성품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사랑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안에 선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선하십니다.” 구원과 영생은 죄인 된 자아를 깊이 발견하고 인정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면 이 청년이 예수님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청년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리이까(20)”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습니다.’ 누가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역시 그는 엄마 친구 아들이었나 봅니다. “십계명이 제일 쉬웠어요” 이런 대답을 볼 때 청년은 예수님의 의도를 여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살인 행위를 한 적 없고 간음 행위를 한 적도 없으니 다 지켰다고 자부했습니다. 분명 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도 구제에 관한 계명 정도로 이해했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십계명 정도는 어릴 적부터 기본적으로 잘 지켰으니 되었고 그런 초급 과정 말고 상급 과정을 좀 알려 달라고 예수님을 졸랐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어떤 답을 주셨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21)” ‘온전하고자 할진대’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계명을 지키는데 있어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이 청년에게 부족했던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얼핏 보면 ‘구제가 너무 부족했다. 전재산을 기부해서 구제를 하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실제로 중세 시대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전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것을 입증한 사람만에게만 수도사가 될 자격을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의 강조점은 앞부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뒷부분에 있는 하늘의 보화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있습니다. 이 청년에게 있어서 부족한 것은 바로 하늘의 보화가 아닌 땅의 보화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라는 우상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22)”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청년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근심하며 돌아가는 모습으로 자신이 진정 바라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냈습니다. 처음에 청년에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질문하며 영생 얻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 ‘네 소유를 버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영생의 길을 제시해 주시자 이를 외면해 버렸습니다. 이를 통해 이 청년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과 영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재물이라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청년은 ‘십계명을 잘 지켜왔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부족함이 없다’고 자부했지만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마태복음 6:24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부자 청년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주인 곧 재물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자신만만한 대답과는 달리 십계명 중 가장 첫번째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계명부터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를 회개하고 영생에 들어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결국 천국의 문턱에서 주저 앉고 말았습니다.

영생에 들어가는 두번째 단계는 내 안에 숨겨진 우상을 발견하고 여기에서부터 돌이키는 것입니다. 왜 숨겨진 우상이라고 표현했는가 하면 이 시대는 드러내 놓고 우상 숭배를 하는 시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절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껏해야 등산하다가 돌무더기를 발견하면 거기에 나도 돌 하나 더 얹고 장난 삼아 소원을 비는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상이 없는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정체를 숨기고 있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을 지배하고 있는 우상의 힘은 막강합니다. 그런 우상들 중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우상이 바로 재물의 신입니다. 얼마나 그 힘이 큰지 가수 이승환은 ‘돈의 신’이라는 노래까지 만들었습니다.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늬들은 고작 사람이나 사랑 따윌 믿지 난 돈을 믿어 고귀하고 정직해 날 구원할 유일한 선” 

‘내가 정말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 하나님인가? 재물인가?’를 알아볼 수 있는 자가 진단법이 있습니다. 이런 질문들을 자기에게 던져 보는 것입니다. “내가 실질적으로 의지하는 대상이 누구인가? 하나님인가? 돈인가?” “내가 어느 때에 불안해지는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올바르지 못할 때인가? 돈이 없을 때인가?” “나를 가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복음 안에서 새롭게 얻게 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인가? 내가 소유하고 있는 집과 자동차의 크기인가?” “내가 최근 가장 기뻐했던 때가 언제인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을 때인가? 기대하지 않았는데 큰 돈을 벌게 되었을 때인가?” 만약 이 질문에서 솔직하게 뒤에 나온 보기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면, 실제적으로 우리가 섬기는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을 섬기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물질이 내 마음과 영혼을 지배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여기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살아 계신 참 하나님만을 섬기며 영생의 복락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하늘의 보화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의 보화가 시시해 보이기 시작해야 합니다. 하늘 보화를 가진 사람은 땅의 보화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에 간직한 영원한 유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하늘 보화를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세상 모든 것을 다 소유하신 부요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자신의 부요함을 다 버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죽으심으로 우리가 부요해졌습니다. 우리를 보배 삼으시기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가 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보배로 삼은 만큼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 그분의 은혜를 아는 만큼 우리 안에 역사하는 재물(Mammon)이라는 우상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재물의 우상으로부터 해방시키셔서 하늘에 있는 영원하고도 참된 보화를 발견하게 하시는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들 역시 예수님처럼 낮은 곳을 향해 가고 그곳에서 섬기는 사람,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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