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용서하라

이창무 2020. 9. 13.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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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27 강 / 이창무

용서하라

말씀 / 마태복음 18:15-35
요절 / 마태복음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태복음 18장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18장 전반부에서는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교만으로부터 나오는 우월의식과 열등감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를 낮추고 작은 사람을 영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인 18장 후반부는 어떤 문제를 다루고 있을까요?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15a)” 공동체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죄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신앙 공동체라고 해서 죄 문제가 없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사람이 인격이 변화되고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부패하고 타락한 죄의 본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죄를 범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소한 죄가 아니라 중대하고 심각한 범죄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불륜이나 성추행과 같은 음행의 죄가 있습니다. 또 공금을 횡령하거나 교인들을 상대로 사기를 칠 수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거친 폭력을 행사하는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죄 문제를 그냥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될까요? 죄 문제를 내버려 두면 이렇게 한 사람에게서 시작한 죄가 공동체 전체로 퍼져 나갈 수 있습니다. 범죄한 당사자에게도 필요합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는 속담처럼 죄 문제를 방치하면 점점 대담하게 죄를 짓게 됩니다. 나중에는 너무 멀리 나가서 돌이키기 힘든 상황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교회와 신자 모두가 영적으로 살아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 문제를 적절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권징’이라고 부릅니다. 권징이란 권면하고 징계한다는 뜻입니다. 권징은 말씀의 선포, 성례의 시행과 함께 교회의 3대 표지 중 하나로 불릴 정도로 교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권징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네 단계를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15b)” 첫번째 단계는 일대일로 권고하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비밀 유지입니다. 만약 처음부터 동네방네 다 알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사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기 앞서 사람들 앞에서 수치심이 더 크게 다가오기 쉽습니다. 자칫 첫 단계부터 마음이 완전히 닫고 어디로 사라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조용히 만나서 진심으로 잘못을 일깨워주고 돌이키도록 권고하면, 죄를 범한 형제는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서 권고하는 것으로 듣게 됩니다. 이렇게 권고를 듣고 돌이키면 잃어버린 형제를 다시 얻습니다.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16)” 두번째 단계는 몇몇 증인들과 함께 권면하는 것입니다. 두세 증인이 왜 필요할까요? 첫번째 단계에서 한 사람이 권고하는 것은 비밀이 유지된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주관적인 의견이나 감정으로 섞일 수 있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세 증인이 한 목소리를 낸다면 객관성에 대해 검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울러 증인은 다음 단계에서 공동체 전체에 상황을 보고할 때 과장이나 왜곡이 없는 진실만을 보고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될 수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의 객관적인 증인의 입회 하에서 주어진 권징에 대해서 죄를 범한 형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돌이키면 교회는 그 형제를 다시 얻게 됩니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17a)” 권징의 세번째 단계는 교회에 공개적으로 범죄 사실을 보고하고 교회의 권위로 회개하도록 권고하는 것입니다. 이런 공적인 책망을 받아들이고 회개하면 그 형제를 다시 얻게 됩니다.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17b)” 마지막 네번째 단계는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과는 교제를 중단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를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공동체를 죄의 오염에서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범죄한 사람이 ‘교회가 이렇게 권징을 하더라도 하나님은 나를 봐주시겠지’ 하면서 끝까지 버티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 풀면 하늘에서도 풀립니다(18). 하나님도 교회의 권징을 그대로 인정하시고 받아들이시기 때문에 이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으로 모든 절차가 다 끝난 것 같지만 아직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합심 기도할 것을 명하셨습니다(19, 20). 교회는 비록 출교를 시켰더라도 범죄한 형제가 죄를 깨닫고 돌이키도록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완악해진 형제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얼마든지 다시 공동체의 일원으로 맞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권징이라는 주제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권징이 교회의 3대 표지 중 하나라니 놀랍지 않습니까? 제가 우연한 기회에 초기 한국 교회의 총회 회의록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보고 놀란 점 한 가지가 거의 매번 권징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와 더불어 회개한 사람을 다시 받아들이는 해벌(解罰)에 관한 기록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 권징은 사실상 힘을 잃었거나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권징을 하면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교회에 위로 받으러 왔지 권징 받으러 왔냐?’ 하면서 그냥 다른 교회로 가버리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교회가 새로운 교인이 왔다고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받아 주기 때문에 그곳에서 과거를 세탁하고 새로 시작하면 그만입니다. 교인이 떠날 것이 두려워서 교회는 감히 권징을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권징을 주저하게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이로 인해 공동체 안에서 분열과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범죄한 사실이 분명하고 누가 봐도 권징이 필요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그 사람을 편드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평소 그 사람과 인간적으로 가까웠던 사이였던 사람들이 이렇게 하기 쉽습니다. 결국 권징해야 한다는 사람들과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반대로 미워하는 사람을 괴롭히고 쫓아내기 위해서 권징을 악용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에서 권징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계모와 간통한 음행을 저지른 사람을 그냥 내버려둔 고린도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5:7)”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의 누룩이 없는 성결한 자로 삼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아들의 피 값으로 사신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권징이 실종되면 교회의 거룩함과 건강함도 함께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묵은 누룩과 같은 죄악을 내버려야 합니다. 사람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을 얻기 위해서 죄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죄가 틈타지 못하도록 진리의 말씀에 기초하여 합심 기도 하면서 신중하게 권면해야 합니다. 

그런데 죄 문제를 다루는 것만큼 두렵고 떨리는 일도 없습니다. 한 영혼과 공동체에 대한 목자의 심정과 사랑이 없이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내지 않는다면 어떻게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을 빼 줄 수 있겠습니까? 가장 좋은 일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범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권징을 할 이유도 사라집니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그 다음 좋은 것은 범죄한 후에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좋은 것은 목자의 권고를 잘 듣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이 단계 안에서 해결이 되는 것이 개인에게나 공동체 전체에게 좋은 일입니다. 다음 단계부터는 외줄타기처럼 위태위태하고 서로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권징이 필요 없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늘 성령으로 충만하여 마귀의 시험과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혹시라도 넘어지더라도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스스로 죄를 고백하고 진심으로 회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심각한 죄를 저지른 사람이 교회의 권징에 받아들이고 회개하면 용납하고 다시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이런 죄를 반복하여 저지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음주 운전에 대해 삼진아웃제가 있는 것처럼 당시 유대교 랍비들은 용서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세 번만 주어져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이렇게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21)” 베드로는 이 질문을 하면서 은근히 자신의 너그러움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용서의 최대치로 여긴 일곱 번을 제안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어떻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도 할지니라(22)” 예수님은 답변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용서에 있어서 베드로와 예수님은 기본적인 출발점 자체가 전혀 달랐습니다. 뱁새와 황새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복수가 기본이었습니다. 용서하는 일 자체가 대단한 일이고 사람 사이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용서가 기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는 용서가 마치 밥 먹는 일처럼 당연한 일, 보편적인 일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하신 셈입니다. 

신앙 공동체가 용서에 인색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날 선 비판과 질책만 난무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실수 안 하려고 늘 긴장하다 보니 분위기가 경직되고 말 것입니다. 교제하고 관계성 맺는 것이 부담스러워 자발적인 심리적 거리두기가 생겨날 것입니다. 결국 모래알처럼 뿔뿔이 다 흩어져서 공동체의 힘은 현저하게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교회 앞으로 닥쳐오는 거센 풍파와 고난을 헤쳐 나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천국의 짠 맛을 나타내는 소금이 되고 복음의 빛을 어두운 세상에 비출 수 있겠습니까? 권징 없이는 교회의 거룩함을 보전할 수 없지만 용서 없이는 교회는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비유를 통해 왜 제자들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떤 임금이 있었습니다. 연말 결산을 해보니 한 종이 일만 달란트를 빚지고 있었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금 340톤, 순금 한 돈 돌반지를 9,000만 개 만들 수 있는 양입니다. 현재 시세로 환산하면 약 24조원 정도 됩니다. 한국인 중에 최고 갑부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총재산 19조원보다 5조원이 더 많은 엄청난 금액입니다. 임금에게 이런 거액을 빚진 사람에 대한 당시 관행은 목을 베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그의 몸과 아내와 자식들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했습니다. 이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간구했습니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물론 다 갚겠다는 말은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말이었습니다. 다만 너무 절박하고 간절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 종의 모습을 본 주인은 불쌍히 여기고 놓아 보내며 그 빚을 모두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거액을 탕감 받은 종은 신나게 춤을 추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때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길에서 만났습니다. 다짜고짜 목을 잡더니 당장 빚을 갚으라 독촉했습니다. 그 동료는 엎드려 ‘내게 참으소서 갚으리이다’라고 간구했습니다. 조금 전에 일만 달란트 빚졌던 종이 주인에게 했던 말과 똑 같은 말이었지만 한 가지 차이가 있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으로 백 데나리온이면 연봉의 1/3 정도되는 금액이었습니다. 적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현실적으로 충분히 상환할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더 큰 차이는 빚진 자에 대해 반응이었습니다. 주인은 불쌍히 여기고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었던 반면에 종은 동료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은 즉시 종을 호출하여 호되게 책망했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32, 33)” 주인은 노하여 이 비열한 종이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에 넘겼습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왜 일만 달란트나 되는 거액의 채무를 탕감해 주었을까요? 큰 손해를 입으면서까지 이렇게 한 주인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이 구절에 나온 대로 주인의 목적은 탕감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눈 감아 줄 테니 이제부터 잘 먹고 잘 살아라 하는 뜻으로 탕감해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비유 속의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이 누구를 가리킬까요? 바로 우리들입니다. 성경에서 죄는 종종 채무에 비유되곤 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속하려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평생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일만 달란트 죄의 빚을 진 자였습니다. 가진 모든 소유와 생명을 내놓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 주셨습니다. 이 일은 거저 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이렇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을까요? 단지 우리가 죄사함 받았으니 이제 구원 받고 천국 가는 것이 전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듯이 우리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그럽게 은혜를 베푸셨 듯이 우리도 관대한 사람이 되고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듯이 우리도 형제 자매들의 죄를 용서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위해서 그토록 큰 희생을 감수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마땅합니다. 용서 받은 사람에게 용서는 더 이상 선행이 아닙니다. 용서는 우리의 의무입니다.

우리가 이 용서의 의무를 저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34절에 나오는 옥졸이라는 단어는 원어에 보면 감옥을 지키는 간수라는 뜻도 있고 고문하는 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 단어가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는 감옥에 갇히는 것처럼 관계성의 단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먼저 사람과의 관계성이 단절됩니다. 소통이 없이 고립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뿐 만이 아닙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성도 단절됩니다. 기도가 막히고 말씀을 들어도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영혼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용서하지 않으면 고문을 당하듯이 지속적으로 우리 마음이 괴롭습니다. 미움과 분노, 복수심으로 가득 차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오래 가면 성품과 인성이 왜곡되고 비뚤어지게 됩니다. 결국 자기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갑니다. 용서는 남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용서의 능력이 없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 아니라 단 한 번도 용서할 힘이 없습니다. 2차 대전 중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전 가족을 잃었던 코리텐 붐 여사가 집회 도중에 우연히 언니를 고문했던 그 전범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손을 내민 그와 도저히 악수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여사의 마음 속에서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애야! 난 그 사람까지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졌단다.” 여사는 그와 용서의 악수를 나누면서 오래 동안 마음을 짓눌러 왔던 짐을 내려놓고 인생의 가장 큰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용서의 능력은 오직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해 주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우리를 용서해 주시려고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야 비로서 우리는 형제를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용서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 가운데 용서하지 못해 생긴 모든 마음의 벽을 허물고 하나되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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