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주는 그리스도

이창무 2020. 8. 16.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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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24 강 / 이창무

주는 그리스도

말씀 / 마태복음 16:13-17
요절 / 마태복음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만약 아내가 남편에게 ‘나를 누구라고 생각해요?’라고 물었을 때 남편이 ‘그야 밥 해주고 애나 키우는 여자로 생각하지’라고 답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심각해 집니다. ‘당신은 나에게 있어서 세상에 둘도 없는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라고 고백해야 정답이 아닐까요? 그런데 구원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인 질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던지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베스트의 정답이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가셨습니다. 이 지방의 옛 이름은 파네아스였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목축의 신인 판을 섬기던 신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분봉왕 빌립이 로마 황제에게 이 도시를 바치겠다며 자기 이름과 황제를 합쳐 빌립보 가이사랴로 명명했습니다. 아울러 황제를 신의 아들로 숭배하는 신전도 건축했습니다. 이곳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에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14)” 사람들의 견해는 다양했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공통점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시 사람들 대부분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위대한 선지자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인정하고 존경했습니다. 이 일이 작은 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이 정도면 예수님이 흡족하게 여기실만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견해에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견해는 틀린 것은 아니지만 핵심이 빠진 부족한 대답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 원어를 보면 ‘너희’라는 말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 질문은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바로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부터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고백을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째서 제자들은 사람들과는 다른 대답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셨을까요? 왜냐하면 제자들은 뭇 사람들보다 더 많이 더 가까이 더 오래 예수님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24 시간 예수님 곁에 붙어 있었습니다. 함께 길을 걷고 함께 식사도 하고 함께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볼 때 존경하던 사람을 가까이서 경험하게 되면 보통 어떤 인식의 변화가 생깁니까? 대부분 멀리서 볼 때보다 평가가 깎이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가까이서 보면 잘 몰랐던 허물도 보게 되고 실망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두번째 질문은 좀 위험한 질문이었습니다. 만약 여기서 제자들이 ‘우리가 겪어보니 예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 정도는 아닌데요… 우리에게는 그냥 괜찮은 스승님 이시죠.’ 이렇게 대답하면 큰 낭패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그렇게 될 분이 아닙니다. ‘파파미’라는 말이 있습니다. ‘파면 팔수록 미담 밖에 안 나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파파미입니다. 예수님은 파면 팔수록 더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알면 알수록 더 놀라운 분이십니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 사랑할 수밖에 없는 분이십니다. 당신이 무엇을 상상했던 예수님은 언제나 상상 이상의 것을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답변을 내놓았을까요?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 시몬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내놓은 대답은 출제자의 의도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정답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예수님이 진정 누구인가’에 관해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고백이 이 순간 베드로의 머리 속에 갑자기 불현듯 떠올라서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 대한 경험이 차곡차곡 쌓인 것을 종합하여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듯이 베드로에게서 주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나오기까지 예수님은 제자들을 오랫동안 양육해 오셨습니다. 만약 이 고백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라는 이름은 그저 위대한 선지자의 계보를 잇는 또 한 명의 선지자나 탁월한 유대교 랍비 중 한 사람의 이름으로만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이 고백이 없었다면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이 고백은 인류 역사의 분기점이 이루는 중대한 고백이었습니다.

그 고백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란 히브리어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한 말입니다. 메시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왕을 세울 때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the Christ)라는 말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즉 여러 왕들 중에 한 명이 아니라 특별한 한 왕을 가리킵니다. 곧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바로 그 왕을 뜻합니다. 결국 베드로는 ‘저에게 있어 예수님은 구원자이시며 왕이십니다.’ 이렇게 고백한 셈입니다. 이 고백을 한 장소가 ‘빌립보 가이사랴’라는 점이 의미심장합니다. 이 도시의 이름에 왕의 이름이 연달아 등장합니다. 또한 당시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별칭이 세상의 구원자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있어서 로마 황제는 진정한 왕도 아니고 구원자도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구원자는 오직 그 앞에 서 계신 예수님 뿐이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는 본래 ‘판’이라는 희랍의 신을 숭배하던 파네아스라는 지명으로 더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판’이 살아 계신 하나님입니까? 판은 죽은 신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로부터 경배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이십니다. 베드로의 고백에는 이런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저는 헛된 우상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섬기며 예배하겠습니다.”

이제까지 예수님과 제자들과 관계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습니다. 이 관계 속에서는 익히고 배우는 것이 핵심입니다. 제자는 스승을 롤모델로 삼아 배우고 닮고자 합니다. 기본적으로 스승을 존경합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세상에서 가장 탁월한 윤리라고 인정했습니다. 산상수훈 말씀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저는 방글라데시에서 온 무슬림인 바삐(Bappi) 형제님에게 성경을 가르쳐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가리켜 알라가 보낸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크게 존경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스승에게 자기 인생을 온전히 다 맡기고 의지하는 제자는 거의 없습니다. 스승을 존경하지만 예배하지는 않습니다. 간디는 죽을 때까지 힌두교도였고 바삐는 지금도 무슬림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스승이긴 하지만 스승 이상이신 분이십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으로 깨닫고 고백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거기까지 가지 못하면 예수님의 진면목을 놓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이며, 또 우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구원자이시고 우리는 구원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내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내 인생을 온전히 맡기고 의지할 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주님이시고 우리는 주님께 예배 드리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엎드려 경배하고 목소리 높여 찬송할 분이십니다. 우리가 따르고 순종해야 할 분이십니다. 이 고백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자 기초입니다. 이 고백을 한 사람에게 교회는 세례를 베풀고 성찬에 참여할 자격을 부여합니다. 마음으로 이 고백을 하고 나면 그 후에 인생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예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고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만난 사람의 심정을 찬송가 288장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 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 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스가우라 리타라는 작가가 쓴 ‘결혼 후에도 사랑을 지속시키는 노하우 5 가지’라는 칼럼이 있습니다. 5 가지 중 5위는 ‘주기적으로 둘만의 시간을 보내라’ 였습니다. 그렇다면 대망의 1위는 무엇일까요? 바로 ‘매일 사랑 고백을 주고 받으라’였습니다. 많은 부부들이 사랑 고백은 연애 시절이나 신혼 때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합니다. 매일 사랑 고백을 주고 받는 것이 부부의 사랑을 더 깊어지게 하고 행복 지수를 높여 줍니다. 또 사랑 고백을 자주 주고 받으면 받을수록 사랑이 샘솟고 관계에 금이 가는 것을 막아줄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 받은 이후에도 믿음을 지속시키는 노하우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마찬가지로 ‘매일 신앙 고백을 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주는 그리스도’ 말씀을 여름 수양회 단골 메뉴라고 생각합니다. 초신자에게나 필요한 말씀이고 나는 이미 고백했으니 이제는 나와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자주 신앙 고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믿음을 샘솟게 하고 예수님과 관계에 금이 가는 것을 막아줄 수 있습니다.

예전에 한동안 제가 일용할 양식을 먹고 나서 항상 마지막에 ‘아멘 한 마디’로 ‘예수님은 나의 OOO 입니다.’로 끝맺음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보물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친구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노래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영웅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커피입니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한 마디를 기억하고 하루 종일 틈틈이 묵상을 했습니다. 그 덕분에 정말 내 마음 속에서 믿음이 샘솟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한참 이렇게 하다 보니 어느 날 소재가 다 떨어졌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날 이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시리즈를 마감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모든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잊고 있었던 이 시리즈의 시즌 2를 다시 시작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시즌 2의 첫 한 마디는 ‘예수님은 나의 부동산입니다.’로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날이 갈수록 값어치가 끝도 없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일 예수님께 나아가 새롭게 신앙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이 자라고 예수님과 더욱 깊은 인격적 관계성을 맺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어떻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게 되었을까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바요나란 요나의 아들이란 뜻이고 시몬은 베드로의 본명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베드로가 혈육 곧 아버지 요나에게서 배워서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워낙 똑똑해서 스스로 깨우쳐 알게 된 것도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게 해 주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은혜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베드로에 대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네가 복이 있도다” 베드로가 받은 복은 어떤 복일까요? 로마서 10장 10절은 말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베드로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모든 사람은 구원의 복을 받습니다. 구원의 복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구원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상속자가 됩니다. 장차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믿는 사람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인도하심과 돌보심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닮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품을 지닌 사람으로 빚어지게 됩니다. 구원의 복은 너무 많아서 다 일일이 열거하기가 벅찰 지경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선포하는 것이 이렇게 복을 가져다 주는 소식이기 때문에 복음이라고 불립니다.

우리가 왜 복음을 알아야 하는지, 왜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쳐야 하는지, 그 이유가 여기에 다 들어 있습니다. 일단 가까이 있는 우리 자녀와 양들에게 복음이 필요합니다. 그들에게 ‘사람들이 예수님을 누구라 하더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교회 사람들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더이다’ 이렇게 대답할 지도 모릅니다. 정작 ‘너는 예수님을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는 막연하게 좋은 분, 훌륭한 분이라 하면서 제대로 대답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자녀와 양들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신앙고백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캠퍼스를 비롯하여 세상에 복음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헛된 구원자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돈, 쾌락, 권력과 같은 현대판 우상들 앞에 절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복음을 그들에게 힘써 전파하고 가르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그들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여 구원의 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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