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

이창무 2020. 7. 26.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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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21 강 / 이창무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

말씀 / 마태복음 13:24-46
요절 / 마태복음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코로나 바이러스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물론 본 적이 없으실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크기는 약 90 나노미터이며 1 나노미터는 천만분의 일 센티미터입니다. 이 정도 크기는 고해상도의 전자 현미경으로만 관찰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 작은 바이러스가 삽시간에 현재 온 세상에 퍼져 우리의 일상 생활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말이 천국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을 크게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첫째, 가라지 비유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때에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 여기서 가라지는 독보리인데 밀과 비슷하지만 독을 가진 식물입니다. 원수가 은밀하게 가라지를 뿌린 것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싹이 나고 결실할 때가 되자 가라지가 보였습니다. 종들이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은 원인을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다시 종들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저 괘씸한 가라지를 당장 뽑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가라지는 곡식과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또 가라지의 뿌리는 곡식의 뿌리와 얽혀 있었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행여 곡식을 뽑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소수의 곡식의 희생을 감수하고 못된 가라지를 시원하게 뿌리뽑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이 하나라도 뽑히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곡식 하나 하나가 다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그냥 두도록 했습니다. 이제 가라지는 신이 났습니다. 양분을 팍팍 빼앗아 가면서 곡식을 괴롭혔습니다. 하지만 어떤 운명의 날이 찾아옵니까? “추수할 때에 내가 추순꾼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30)”

이 비유에서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예수님이며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자녀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천국의 자녀들을 뿌리셨습니다. 반면에 원수 마귀는 은밀하게 악한 자의 아들들을 심었습니다. 천국의 자녀들은 악한 자의 아들들에게 이리저리 치이고 괴롭힘을 당합니다. 이런 악한 자들을 당장 심판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야 의인들이 고통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종들에게 ‘가만 두라’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처럼 심판을 유보하실까요? 악한 자의 아들들을 뽑다가 천국의 자녀들까지 뽑힐까 염려하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곡식이고 가라지인지 정확하게 판단할 안목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과거에 누가 봐도 가라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알곡도 보통 알곡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초대 교회 당시 신자들 중 누군가 바울을 암살하기라도 했다면 기독교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가라지를 계속 뽑다 보면 점점 모든 것이 다 가라지로 보이기 쉽습니다. 조금이라도 수상해 보이면 또 뽑게 됩니다. 결국에는 다 뽑히고 남아 날 사람이 없게 됩니다. 그러기 전에 남은 사람들에 의해 자기가 먼저 뽑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는 누가 가라지인지 누가 곡식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현재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뽑지 말고 가라지를 그냥 두어야 합니다. 분명 가라지는 기고만장해 더욱 날뛰게 될 것이 뻔합니다. 거리낌 없이 못된 짓을 저지르고 남을 속입니다. 그러면서도 잘 먹고 잘 삽니다. 천국의 자녀들이 이런 악한 자들 틈 바구니 속에 고생을 합니다. 마음에 받은 상처를 묵묵히 속으로 삼켜야 할 때가 많습니다. 천국의 자녀로 살려 하니 늘 손해만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닙니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43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세상 끝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입니다. 참고 기다린 것이 헛되지 않게 하나님께서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영광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그 날에 악인들은 하나님께서 공명정대하게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직접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당장 악을 심판하고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겠다는 성급한 낙관주의에 열광할 필요가 없습니다. 동시에 어차피 세상에서 악이 승리하고 말 것이라는 체념적인 비관주의에 빠질 이유도 없습니다. 지금은 선과 악이 뒤섞인 이 현실을 인정하고 참고 기다릴 때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것을 정리하시고 바로잡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 날을 바라보며 소망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31, 32절을 보십시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겨자씨는 다른 모든 씨보다 작습니다. 볼펜으로 점을 찍은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 씨가 자라서 공중의 새들이 와서 깃들일 정도로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천국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너무 초라해서 별로 주목을 끌지 못합니다. 이렇게 지지부진하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복음 안에는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천국은 점점 더 성장하여 마침내 처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재 복음 역사가 작고 보잘것없다고 해서 전혀 실망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는 겨우 열 두명의 제자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어찌 보면 소꿉 장난처럼 보였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로부터 시작한 복음은 예루살렘을 넘어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해졌습니다. 거대한 로마 제국을 뒤집어 엎었고 지금은 오대양 육대주에 걸쳐 21억 명의 신자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겨자씨 한 알이 거대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이 비유의 핵심은 전부 부풀게 하는 누룩의 힘입니다. 누룩은 전체 2 % 양만 있어도 반죽을 네 배 부풀게 할 수 있습니다. 가루 서 말은 약 40 리터입니다. 네 배로 부풀면 장정 100명에 먹기에 충분한 빵을 구울 수 있습니다. 복음은 대부분 사회에서 적은 지분만 차지하고 있습니다. ‘겨우 이 정도로 도대체 뭘 할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복음은 적은 양으로도 얼마든지 주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누룩이 소리 없이 밀가루를 부풀게 하듯이 복음도 은밀히 침투해 세상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 나라에 처음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기독교인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1919년 당시 기독교인은 인구의 1.3 ~ 1.5 %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3.1 운동 민족 대표 33명 중 16명이, 투옥된 사람중 22.4 %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의 영향력은 항일 독립 운동만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을 지배하던 각종 미신을 몰아내고 전근대적인 악습을 철폐하는 일에 기독교는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전부를 부풀게 한 누룩의 역사였습니다.

여기까지 말하면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과는 맞지 않는데요.’라고 반론을 제기할 지 모릅니다. 과거와 달리 현재 한국 교회가 성장하기는 커녕 오히려 점점 감소하고 있습니다. 지난 15년 동안 개신교 주요 교단의 교인 숫자가 150만 명 가량 줄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를 맞이해 앞으로 더욱 큰 폭으로 줄어들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입니다. 양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향력 측면에서도 퇴조 현상이 뚜렷합니다. 2016년 조사에서 국민 10명 중 7명이 향후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서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답변을 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본래 복음에 한계가 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복음에는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생명의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가만히 있지 않고 반드시 성장합니다. 복음은 반드시 주변 세상에 영향력을 미칩니다. 인본주의, 세속주의, 물질만능주의, 인구 감소, 코로나 19 등등 어떤 위기가 닥치든 복음은 얼마든지 반전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복음을 잃었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우리가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그 출발점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복음을 듣고 깨닫는 것입니다. 이 겨자씨 같은 작은 역사로 어떻게 반전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 그러나 지금 작은 씨라고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소량의 누룩이라고 초라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한 사람이 복음을 발견하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종교 개혁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마르틴 루터 한 사람이 골방에서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의 원리를 발견하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이번 Summer School ‘복음 안에서 자유’를 통해서 단 한 사람이라도 복음에 눈을 뜨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 한 사람으로부터 어떤 반전의 역사가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천국 복음의 왕성한 성장력과 영향력을 믿고 한 사람 안에 복음을 심는 위대한 희망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감추인 보화와 진주의 비유입니다. 44절부터 46절을 보십시오. 어떤 소작농이 밭에서 일하다가 땅 속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이거 대박인데, 완전 땡잡았다!” 그는 이를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정신 나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밭에 보화가 숨겨진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가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가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습니다. 두 비유의 공통점은 자기 소유를 다 팔아 밭과 진주를 산 것입니다. 다른 점은 밭에 감추인 보화는 우연히 발견한 것이고 진주는 열심히 찾다가 발견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마다 천국을 발견하는 경로가 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별 생각 없다가 우연한 기회에 복음을 접하고 천국을 발견합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찾는 구도자였다가 복음 안에서 천국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천국을 발견한 후 행동은 같습니다. 자기 소유를 다 팔아 천국을 삽니다. 천국의 가치가 너무 귀하기 때문에 전혀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배와 그물, 심지어 아버지까지 버렸습니다. 천국을 발견한 사람은 누구나 다 이렇게 합니다. 우리 모임의 설립자인 사라 베리 선교사님은 미국 미시시피의 공주라고 불리던 분이었습니다. 이분의 생가를 방문했던 한 선교사님의 말에 따르면 차를 타고 정문을 지나 숲길을 한참 들어가니 현관문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이런 분이 전쟁 직후 한국에 와서 연탄불 단칸방에서 밥과 김치를 드시며 대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때 동료 선교사들까지 꼭 그렇게 살아야겠느냐며 타박을 주었다고 합니다. ‘전능자의 그늘’이라는 책의 주인공인 짐 엘리엇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는 휘튼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한 수재였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에콰도르의 한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한 타임 지의 기사 제목은 ‘What a waste?’ 였습니다. 과연 이것이 정말 낭비였을까요? 사후에 짐 엘리엇의 성경책에서 이 구절이 발견되었습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포기하는 자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인 사람에게는 이 모든 것이 미련한 짓이고 낭비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 그 안에 감춰진 천국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에게는 가장 현명한 투자입니다.



주식 투자에서 대박이 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흔히 저평가 우량주를 찾으라고 말합니다. 저평가 우량주란 많은 사람들이 가치를 몰라보고 있지만 알고 보면 사실은 성장 가능성이 아주 높고 리스크도 적은 주식을 가리킵니다. 이런 확실한 주식을 발견하고 거기에 올인한다면 누구든지 투자 대박이 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저평가된 초우량주를 알려주셨습니다. 이것만 얻으면 누구든지 인생 대박이 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천국 복음입니다. 복음의 가치를 사람들은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시시하게 보고 초라하게 여깁니다. 복음은 시대착오적이고 앞으로 여기에 별 희망이 없다고 여깁니다. 심각하게 저평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복음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감추어 있습니다. 복음 안에는 구원이 있습니다. 기쁨과 평안이 있습니다.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이 있습니다. 모두 다 거액의 돈을 준다 해도 살 수 없는 것들입니다. 아울러 복음은 거대한 나무가 되고 반죽을 네 배로 부풀릴 수 있는 엄청난 성장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이 보증하시기 때문에 리스크도 제로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대박이 난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감추인 보화, 극히 값진 진주인 천국 복음을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가 복음을 더욱 풍성히 얻고 누리기 위해 인생을 투자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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