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이창무 2020. 8. 2.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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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22 강 / 이창무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말씀 / 마태복음 14:1-21 
요절 / 마태복음 14:20,21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우리 모임에서 유난히 많이 쓰는 호칭이나 단어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목자입니다. 우리는 너도 목자, 나도 목자, 다 목자입니다. 그런데 최근 한국 교회 여러 곳에서 목자라는 말을 많이 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요회 같은 소그룹을 목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목장의 리더를 목자라고 부릅니다. 또 목자의 아내를 목녀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처럼 목자라는 말이 널리 쓰이는 이유는 이것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목자에 관한 세 가지 명제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첫번째 명제는 ‘목자가 없다’ 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분봉 왕 헤롯이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분봉 왕이란 1/4 왕이란 뜻입니다. 헤롯 대왕이 죽은 후 그의 아들들이 나라를 분할해서 다스렸기 때문에 이렇게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 중 본문의 헤롯은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던 헤롯 안디바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헤롯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났구나(2)” 헤롯이 왜 세례 요한을 떠올렸을까요? 여기에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헤롯이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억지로 빼앗아 아내로 삼은 적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이 일에 대해 헤롯을 책망했습니다. 헤롯은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가 죽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요한을 따르는 무리들이 두려워 죽이지 못했습니다. 이 와중에 헤롯의 생일이 되어 연회가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십대 소녀였던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관능적인 춤을 추었습니다. 그 춤을 넋 놓고 바라보던 헤롯이 아이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소녀는 무엇을 달라고 했을까요? 아이폰도 예쁜 옷도 아니고 세례 요한의 머리였습니다. 물론 뒤에서 엄마가 다 시킨 일이었습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헤롯은 체면 때문에 요한의 목을 베어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가 나은 사람들 중에 가장 큰 사람이라고 칭하셨던 요한은 이렇게 죽었습니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고 황망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날 밤 꿈 속에서 헤롯은 목이 잘린 세례 요한을 보았습니다. 요한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꼭 내가 다시 태어나서 너에게 복수하러 가마. 기다려라. 헤롯~~”

헤롯은 왕입니다. 구약에서 흔히 이스라엘의 왕은 목자로 백성들은 양에 비유됩니다. 양에게는 목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목자는 양이 어디로 가야할 지를 알려주고 인도합니다. 들짐승이나 독초로부터 양을 보호합니다.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아프면 치료해 줍니다. 무엇보다 목자는 양들을 먹여야 합니다. 그런데 헤롯은 어떤 목자입니까? 에스겔 34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헤롯은 양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만 배불리 먹는 목자였습니다. 헤롯은 오로지 어떻게 하면 자기를 즐겁게 할 것인가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남도 아닌 동생의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자기 눈을 즐겁게 한 춤을 춘 살로메에게는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즐겁고 행복했습니까? 사실 헤롯은 늘 두려움 속에서 살던 사람입니다. 자기의 왕좌를 잃어버릴까 두려워서 요한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무리들이 두려워 요한을 죽이지도 못했습니다. 내키지 않았지만 체면을 잃을까 두려워 요한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후에는 의인 요한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천벌을 받을까 두려워했습니다. 

이런 헤롯의 모습이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목자의 자리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양들은 먹이지 않고 자기만 먹는 이런 자격 미달의 목자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헤롯 같은 사람은 정치지도자들 중에서 직장의 상사들 중에서, 교수나 선생님들 중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헤롯을 만나서 괴로울 때가 많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서 제 멋대로 하는 사람, 동시에 두려움 때문에 늘 의심하고 감시하려는 사람, 이런 사람 아래 있는 것만큼 큰 고역이 없습니다. 심지어 학대를 겪고 그 결과 씻기 힘든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팀닥터와 동료들에 시달리다 자살을 선택한 최 숙현 선수 같은 사례를 보면 여전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모두의 마음 속에는 목자다운 목자, 참 목자를 만나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우리를 이끌어 주고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며 상처를 치유해 주고 회복시켜줄 목자를 갈망합니다. 그런 목자가 어디에 있을까요?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요? 포기하고 각자 살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요?

두번째 명제는 ‘목자가 있다’ 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헤롯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헤롯과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제자들만 데리시고 호수 건너편 빈 들로 가셨습니다. 오랜만에 맛보는 꿀맛 같은 휴가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무리가 어떻게 알았는지 도보로 예수님 일행을 따라왔습니다. 최소한 만 명이 넘는 큰 무리가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투덜거렸습니다. “잠깐 쉬겠다는데 그것도 못하게 하느냐? 이러다 헤롯에게 찍히면 너희가 책임질 거냐? 참 해도 너무 한다.” 이때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예수님은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라는 동사의 원어는 간장, 창자, 폐 또는 심장과 같은 장기를 뜻하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이 왜 내장과 연결이 되었을까요? 고통 중에 있는 상대방에게 깊은 연민의 마음이 있으면 내 창자도 끊어질 것처럼 고통스럽고 내 심장도 아프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생겨난 것입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그냥 머리로 이해하고 딱하게 여기는 정도가 아닙니다. 함께 아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 중에 있는 병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기울어 갈릴리 서편 바다에 붉은 노을이 지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나와서 이렇게 건의했습니다. “이 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제자들의 제안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제안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당황했습니다. 왜냐하면 가진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먹기에도 부족한데 어떻게 이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를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고 제자들이 그것을 무리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0, 21절을 보십시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의 식탁에서 모두가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두 개의 잔치가 있습니다. 하나는 헤롯 왕의 생일 잔치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광야 잔치입니다. 헤롯의 잔치에는 기름진 음식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헤롯 단 한 사람을 위한 잔치였습니다. 그 잔치에는 쾌락은 있었지만 만족이 없었습니다. 요한의 머리가 얹힌 쟁반이 등장하는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잔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잔치는 제자들이 들고 온 작고 초라한 오병이어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큰 무리가 다 함께 배불리 먹은 모두를 위한 잔치였습니다. 이 풍성함과 만족은 다 예수님의 자비와 긍휼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에스겔 34장 23절은 장차 올 메시아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하나님은 거짓 목자에게 고통 받는 자기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한 목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를 세워 백성들을 먹이고 백성들의 참 목자가 되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병이어 사건 현장에서 드디어 이 예언의 성취가 이루어졌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바로 그 긍휼의 목자였습니다. 광야의 식탁은 메시아의 잔치였습니다. 첫 번째 명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목자가 없다’ 였습니다. 이것으로 끝이라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목자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만이 모든 인생들의 참 목자가 되십니다.

일찍이 다윗은 주님의 양으로 살아가는 행복에 대해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23:1-4)” 지난 주 Summer School 인생 말씀 잔치 제 3 강을 이 본문으로 양재규 목자님께서 섬겨 주셨습니다. 부제가 ‘최선을 다했지만 여전히 불안한 사람들을 위하여’ 였습니다. 

양재규 목자님은 사법 시험을 준비할 때 하루에 네 시간 밖에 자지 못하고 최선을 다해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다고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막상 시험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자 너무 불안해서 한숨도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로 시험도 망칠 것이 뻔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 시편 23편 말씀을 통해 주님이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붙들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혼자가 아니고 목자가 함께 하심을 깨닫고 모든 불안감이 씻은 듯이 사라졌었다고 고백을 하셨습니다. 물론 시험에도 합격을 하셨습니다. 이처럼 선하신 목자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굶주리고 갈급한 우리 영혼에 주님께서 생명의 말씀을 먹이시니 우리는 배가 부릅니다. 긍휼의 목자 예수님께서 헤롯 같은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이고 상처 받은 우리를 치유해 주시니 우리 영혼이 다시 살아납니다. 어디로 가야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우리들을 의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고아 같이 우리를 버려 두지 않으시고 참 목자 예수님이 우리에게 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 안에서 참된 만족과 풍성함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세번째 명제는 ‘목자가 되라’ 입니다. 16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 말씀을 원문으로 보면 ‘너희가 주라’는 부분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리들이 알아서 먹도록 하지 말고 제자들인 너희가 그들이 먹을 것을 책임지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이 많은 무리를 먹일 돈이 어디 있습니까? 설령 그만한 돈이 있다 하더라도 이곳은 빈들인데 어디서 살 수 있겠습니까? 앞에서 보았듯이 결국 예수님이 친히 무리들을 먹이셨지 제자들의 능력으로 먹인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여기에 담긴 예수님의 뜻은 한 마디로 말하면 ‘너희도 목자가 되라’ 입니다. 

목자는 예수님인데 왜 제자들도 목자가 되어야 합니까? 예수님은 헤롯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신 후부터 앞으로 닥칠 십자가 사건을 예감하고 계셨습니다. 이 말은 이 땅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실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후부터는 제자들이 목자의 직분과 사명을 계승하여 섬겨야 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제자들이 목자가 되는 길을 배워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첫 단계로 제자들이 무리들에 대한 책임감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제까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양무리들을 돌보시는 일을 곁에서 지켜보는 관찰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는 제자들이 그들을 내가 책임지고 돌보고 먹어야 할 대상으로 보기를 바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공유하고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양무리들의 목자가 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이것이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목자가 없는 시대에 대해 내놓으신 해결책이며 비전이었습니다.

우리 앞에는 헤롯처럼 될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처럼 될 것인가?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헤롯을 비판하고 욕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우리 안에도 헤롯의 요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를 기쁘게 하고 나를 즐겁게 할 것인가에만 매몰되는 한 우리는 헤롯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것을 잃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는 한 우리는 헤롯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예수님이 뿌린 목자의 씨앗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긍휼하심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내 인생 길을 인도하시고 돌보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목자의 마음과 책임감이 무엇인지를 보았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도 목자가 되라. 너희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목자라는 말을 너무 좁게만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되도 목자인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어머니가 되도 목자인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이 되도 목자인 선생님이 되어야 합니다. 사장님이 되어도 목자인 사장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목자가 없는 세상에서 목자가 되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서 목자 예수님의 향기를 맡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양들을 먹이는 가운데 예수님을 닮은 목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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