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이창무 2020. 7. 13.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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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19 강 / 이창무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말씀 / 마태복음 12:22-50
요절 / 마태복음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테이큰’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한 젊은 미국 여자가 프랑스를 여행하던 중 알바니아계 마피아 조직이 운영하는 인신매매 조직에 끌려 갑니다. 그런데 이 여자의 아빠가 전직 CIA 특수 요원이었던 리암 니슨이었습니다. 그가 현장으로 날아가 혼자서 마피아를 일망타진하고 마침내 딸을 구출해 옵니다. 리암 니슨이 납치범과 통화 중에 했던 이 대사가 유명합니다. “니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내 딸을 놔주지 않는다면 내가 널 찾아내 없애 버릴거다.” 이런 아빠가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구원자가 계십니다. 우리를 납치해 노예로 만든 사탄을 결박하고 구출해 내신 생명의 은인이 계십니다. 과연 그분은 누구일까요?

22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귀신 들려서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자 그 사람이 앞을 보고 말도 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의 의견이 둘로 갈렸습니다. 무리들은 ‘이 사람이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와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을 아신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먼저 그들의 주장 속에 담긴 두 가지 모순을 지적하셨습니다. 첫째, 만약 귀신의 왕 사탄이 귀신을 쫓아낸다면 사탄의 왕국은 이미 무너졌어야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둘째, 바리새인들 중에도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괜찮고 예수님만 문제가 있다 한다면 이것이 전형적인 내로남불이었습니다. 

그 다음 예수님은 그들에게 진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귀신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신 일이었습니다. 사탄의 왕국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임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이 좀 어려울까요? 예수님은 현재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한 비유를 들어 알기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남의 집에 들어가서 TV, 세탁기, 냉장고를 들고 나오려면 무엇부터 해야 합니까? 일단 집주인부터 꽁꽁 묶어 놓아야 합니다. 집주인이 자기 소유를 순순히 내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에서 사람은 예수님, 강한 자는 사탄, 세간은 사탄에게 매여 종 노릇하는 인생들을 가리킵니다. 사탄은 강하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 힘으로 도저히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탄보다 더 강한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하신 예수님께서 사탄의 본진을 털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광야에서 있었던 세 번의 일대일 대결에서 예수님이 모두 다 승리하셨습니다. 그 결과 사탄이 결박되었습니다. 자기 부하들이 당해도 이제 사탄은 속수무책입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귀신이 쫓겨나고 있습니다. 마귀에게 속했던 사람들이 해방과 자유를 얻습니다. 악의 제국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바로가 얼마나 끈질긴 지 모릅니다. 노예로 삼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좀처럼 놓아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무려 열 번의 재앙을 겪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장자 재앙이라는 끔찍한 일을 겪고 나서야 겨우 그들을 놓아주었습니다. 사탄의 속성이 이와 같습니다. 죄와 죽음의 세력이 이렇게 집요하고 강력합니다. 말로 해서 안 됩니다. 신사적으로 하면 좋겠지만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대결이고 전쟁입니다. 뺏느냐 빼앗기느냐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적이 너무 강합니다. 마귀의 유혹은 강력해서 우리는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넘어지곤 합니다. 죄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에는 제 자리로 돌아와 있곤 합니다.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할지라도 자기 자신 하나를 감당하는 것조차 버거운 법입니다. 하물며 사탄에 매인 사람을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구출해 낸다는 것은 가능하겠습니까? 한 영혼을 구원한다는 것은 도무지 사람의 힘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아무리 혼자서 마피아로부터 딸을 구출해 낸 특수 요원 리암 니슨이라도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스가랴 4장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며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성령의 능력으로는 가능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하신 예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꺽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십니다. 연약하고 죄로 병든 사람에게는 한없이 온유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을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악한 마귀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강력하게 맞서 싸우십니다. 마귀를 꽁꽁 묶어 버리고 그에게 포로 되었던 자들을 구출해 내십니다.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령을 힘 입어 일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탄의 왕국을 무너뜨리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시는 우리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지금도 이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믿고 의지하면 사탄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죄와 죽음의 권세에 매인 자들을 해방시키고 구출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 일에 수많은 증인들이 있습니다. 말씀과 함께 한 성령의 역사로 인생이 바뀐 분들이 많습니다. 그 중 일곱 분을 모시고 이번에 Summer School로 인생 말씀 잔치를 열고 있습니다. 이 말씀 잔치 가운데 성령의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사탄보다 더 강하신 예수님을 의지하며 죄와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마귀와 전쟁을 벌이고 계실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마땅하겠습니까? 30절을 보십시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예수님께서 싸우실 때 예수님과 함께 하고 적극적으로 예수님 편을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단정적인 말처럼 들립니까? ‘나는 누구 편도 아니고 중립인데요.’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깡패들이 힘 없는 사람들을 집단 폭행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떤 의인 한 사람이 나타나 깡패들과 맞서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이때 ‘나는 중립입니다. 둘이 알아서 잘 해결해 보세요.’라고 한다면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예수님 홀로 악한 마귀와 맞서 한 영혼을 구원하고자 고군분투하고 계신데 중립을 선언하는 것은 사실상 마귀를 편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들의 죄질은 이보다 훨씬 더 나쁩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반대하고 중상모략 했습니다. 성령께서 하신 일을 두고 거꾸로 악령이 했다고 말함으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범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죄는 영원히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무서운 선포를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어쩌다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요? 이는 그들이 평소에 마음 속에 악을 쌓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악을 쌓아 놓으면 자연스럽게 악한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그들은 결국 자신들이 한 말로 인해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이번에도 또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등장하여 이렇게 청원합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이들은 앞선 바리새인과 달리 소원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들의 속내는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이 표적을 안 보셨습니까? 이미 차고 넘치도록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또 다른 표적을 구하는 것에는 이런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 자꾸 우리에게 ‘회개를 안 한다. 반응이 부정적이다.’ 뭐라고 하는데 그건 다 우리 때문이 아니라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이 보여준 표적이 불충분하니 그런 거라구요. 좀 더 화끈한 걸 보여주세요. 누가 알아요? 그럼 우리가 믿게 될지…” 

예수님은 이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여” 그리고 요나의 표적 외에는 더 이상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무엇일까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사흘동안 있다가 나온 것처럼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동안 무덤에 계시다가 부활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최고의 표적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못 박혀 죽으신 십자가 사건만큼 놀라운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분이 이제까지 인류를 지배해 왔던 죽음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부활하신 사건만큼 기적적인 사건이 어디에 있습니까? 기적은 십자가와 부활로 충분합니다.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표적을 보고 회개했습니까? 아닙니다.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했습니다. 남방 여왕이 솔로몬의 부귀와 영광을 보려고 그 먼 곳에서 찾아왔습니까? 아닙니다. 솔로몬의 지혜의 말씀을 듣기 위해 왔습니다. 기적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말씀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나가고 영혼이 깨끗하게 청소되었습니다. 그 다음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 빈 자리에 이제 예수님의 거룩한 말씀을 채워야 했습니다. 텅 빈 영혼을 거룩한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야 했습니다. 만약 이렇게 했다면 사탄은 감히 그들을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도 하나님의 성령으로 채우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가면 그 결국이 어떻게 될까요? 45절을 보십시오.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앞서 ‘테이큰’이란 영화를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속편 ‘테이큰 2’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리암 니슨의 딸이 아니라 아내가 납치됩니다. 범인은 1편에서 죽은 납치범의 아버지입니다. 아들의 복수를 하려고 아내를 잡아간 것입니다. 마귀도 이처럼 끈질깁니다. 얼마나 끈질기냐 하면 쫓겨난 뒤에도 다시 찾아옵니다. 해병대도 아닌데 ‘한 번 마귀의 노예면 영원한 노예야!’를 외치며 다시 돌아옵니다. 

그래서 방심은 금물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기이한 은혜의 역사를 체험한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깨끗하게 청소된 우리 영혼을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져 있으면 마귀가 근처에 왔다가 단념하고 돌아갑니다. 그렇지 않고 빈틈이 보이면 또 다시 우리에게서 자유와 기쁨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잘못하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은혜 받기 이전 상태도 더 나쁜 상태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대부분 외부 활동이 어려운 상태입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시간을 헛되게 보내기 쉬운 때입니다. 이때 우리 안에 무엇으로 채우고 무엇을 쌓아 놓아야 하겠습니까? 죄악된 것, 더러운 것을 채우면 결국에는 나쁜 열매로 그 마음 속에 쌓은 것이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코로나로 받은 스트레스가 폭발해 짜증 섞인 말, 신경질적인 말로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채우면 선한 열매로 나타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칭찬하는 말, 주위 사람을 위로하는 따뜻한 말,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격려의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코로나 시대 거룩한 말씀과 거룩한 성령으로 우리 영혼을 충만하게 채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바이러스 뿐만 아니라 다시는 악한 마귀가 우리를 틈타지 못하도록 잘 예방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제까지 11장과 12장에 걸쳐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의심했고 사람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권능을 목격하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마다 사사건건 훼방을 놓고 반대를 위한 반대만 일삼았습니다. 하나같이 다 부정적인 반응 뿐입니다. 심지어 어머니와 동생들까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잡으러 왔을 정도였습니다. 

도대체 예수님 주위에는 예수님 편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까요? 아니,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49절을 보십시오.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피 한 방울도 섞인 일이 없지만 그들을 가족으로 여기셨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보다 더 똑똑하고 유능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제자들은 항상 예수님 편에 서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을 보시며 예수님은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합니다. 그런데 한 마디를 더해야 하겠습니다. “순종이 피보다 진합니다.”

지난 주부터 우리는 새로운 요회로 모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만난 요회원들 중에 내 스타일이 아닌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나와 잘 안 맞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 밖으로 나가 보십시오. 우리는 사방으로 안티 세력에 둘러 싸여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려는 세력, 예수님을 헐뜯고 비난하는 세력, 믿는 자를 고깝게 보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와중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를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로 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새 요회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섬기는 가족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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