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이창무 2020. 7. 5.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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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18 강 / 이창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말씀 / 마태복음 12:1-21
요절 / 마태복음 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휴식이란 무엇일까요? 멋진 여행지에서 즐기는 것일까요? 12시간 정도 늘어지게 자는 것일까요? 그런데 휴식하면 할수록 오히려 피곤함을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휴식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의 두 기둥은 할례와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수호자로 자처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과연 참된 안식이 무엇인지 알면서 지키고자 했을까요? 오늘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통해 참된 안식에 이르는 길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십니다. 그 길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참된 안식을 얻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였습니다. 배 고픈 제자들이 밀이삭을 잘라먹었습니다. 이것은 귀엽게 봐주면 서리지만 심각하게 보면 절도죄 아닙니까?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죄가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굶주린 사람을 위해 낫을 대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이삭을 잘라먹을 수 있다고 허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문제 삼은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손으로 이삭을 잘라 추수하고 비벼서 탈곡하고 껍질을 털어 키질을 했으니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세 가지나 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관점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답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두 가지 이유로 제자들의 행동을 변호하셨습니다. 첫째 예수님과 제자들은 안식일 법에서 예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도 안식일 법에서 예외를 인정했던 사례들이 있습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사울에게 쫓겨 다니느라 시장할 때였습니다. 제사장 아히멜렉은 제사장만이 먹도록 규정된 진설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아히멜렉이 허락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지 그들의 배고픔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대상이 다윗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누구입니까? 구속 역사에서 메시아의 직접적인 그림자가 되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도대체 메시아가 어떤 분이시기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기절초풍할 깜짝 선언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6)” 성전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사람이 하나님과 만나는 곳입니다. 이 성전 안에서 제사장들은 안식일에 일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의무였습니다. 성전이 그림자라면 그 실체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인생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제자들은 성전보다 더 크신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처럼 안식일에 일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둘째 자비의 법이 제사 법보다 상위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허기질 때 이삭을 잘라먹어도 된다는 것은 자비의 법이고 안식일 규례는 제사 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하여 ‘내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제사 법보다 자비의 법이 더 상위의 법입니다. 상위 법을 따른 제자들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8)” 구약에서 안식일 법은 두 가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천지 창조이고 다른 하나는 출애굽 구원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창조주요 구원자가 되신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안식일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해하고 지켜져야 합니다.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주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날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일이 안식일과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는 재창조와 구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일은 구약의 안식일을 계승하고 흡수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일에는 안식일을 지킨 유대인들처럼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월요일에 기말 시험이 있어도 주일에는 공부를 못하게 했습니다. 일체 돈을 쓰지 못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주일은 여느 평일이나 다를 바 없는 날이지만 예배만 잘 드리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예배를 드린 후 하루 종일 골프를 치거나 여행을 다니기도 합니다. 장사도 하고 사업도 하고 평소처럼 할 것은 다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주일을 지켜야 할까요? 우리는 두 양극을 다 피해야 합니다. 주일을 율법적으로 지키는 것도 문제이고 주일을 평일과 구별되지 않게 보내는 것도 잘못입니다. 율법적으로 지키게 되면 우리는 율법의 짐에 눌려 정작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주일을 구별하여 지키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근심에 매이고 갖가지 욕심에 이끌리게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주일은 한 주 동안 망가졌던 우리 몸과 마음이 치유 받고 회복되는 날입니다. 주일은 주님께서 행하신 창조와 구원의 큰 일을 기념하고 감사하고 주님께 예배 드리는 날입니다. 주일은 가족과 이웃과 동역자들과 양들을 돌아보며 자비를 베풀고 선을 행하는 날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중심으로 주일을 보내고 나면 한 주를 성령충만한 가운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주일이 우리를 지켜줍니다. 예전 한국교회는 율법적인 주일 성수가 문제였다면 지금은 세속화된 주일 성수가 더 큰 문제입니다. 우리가 중심을 잡고 주일을 구별하여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일에 우리가 모여 서로를 위로하고 북돋우며 격려하는 가운데 세상을 이길 새 힘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예수님 앞에 병든 손을 내어 놓을 때 우리는 참된 안식을 얻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예배하러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 한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손은 몸 전체에서 작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대부분의 일을 손으로 합니다. 말라버린 한 손은 그의 인생 전체에 짙은 어두움을 드리우게 했습니다. 이런 사람을 보면 보통 ‘참 딱하다. 빨리 회복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고발하고자 했습니다. 평소 예수님의 성향으로 보아 고쳐줄 것이 뻔하고 그러면 안식일에 의료 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예수님을 걸고 넘어질 심산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반문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한 가난한 사람의 전 재산인 양 한 마리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면 어떻게 할까요? 그냥 두면 죽게 생겼으니 당연히 건져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합니까? 아무리 안식일에 일을 하면 안 된다고 해서 선한 일을 행하는 것까지 금지해야 옳습니까? 손 마른 문제로 오래 동안 안식을 누리지 못한 이 한 사람을 치유하여 안식을 누리게 하는 것, 이런 선행이야말로 안식일을 가장 안식일 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리새인들의 입을 막으신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 손 마른 사람이 순종하기 쉽지 않은 명령이었습니다. 치유를 확인하고 손을 펴는 것이 아니라 대뜸 손부터 먼저 펴라고 하시니 당황스러웠습니다. 게다가 말라 비틀어진 손을 내보인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러나 그는 담대하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러자 오그라졌던 손이 쫙 펴졌습니다. 이제 그도 드디어 가위바위보 할 때 보를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다윗보다 크시고 성전보다 크신 안식일의 주인임을 증명하셨습니다.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둔 치부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각자 한쪽 마른 손이 있습니다. 열등감일수도 있고 마음의 상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꼭꼭 감추고 있는 한 고침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흐른다 해도 저절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한쪽 마른 손 때문에 계속 고통을 받습니다. 이 문제를 묻어 두고 있는 한 마음에 평안과 안식을 온전히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내밀라”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 앞에 병든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내밀면 죽을 것 같지만 그래도 내밀어야 합니다. 내민다고 뭐가 달라질까 하는 회의가 들지만 그대로 내밀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깨끗하게 고쳐 주실 것입니다. 건강한 새 인생을 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 앞에 병든 손을 내밀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체험하고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참된 안식을 얻습니다. 안식일을 둘러싼 두 번의 대결에서 번번히 패배한 바리새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우리가 졌으니 예수님을 인정합시다.’ 했을까요? 14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은 나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일까 의논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일 바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리새인들입니다. 제자들을 감시해야지, 재판에 넘길 함정을 파야지, 살해 모의를 해야지, 너무 바쁩니다. 안식일을 지키겠다고 나선 그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의 안식을 방해하고 스스로도 안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들과 논쟁은 더 이상 의미 없다 판단하신 예수님은 본업으로 돌아가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동시에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마태의 마음 속에 선지자 이사야의 한 예언이 떠올랐습니다. 어떤 예언입니까? 18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신성을 모독하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택한 종이고 기뻐하시고 사랑하는 분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사탄의 힘을 빌려 기적을 일으키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으로 기름 부음을 받아 성령충만하신 분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법을 무시한다고 고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이방에까지 전파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스타일이 어떻습니까? 19절과 20절을 보십시오.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첫째 예수님은 다투지도 들레지도 않으십니다. 일할 때 사람을 감정과 혈기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광을 내려 하거나 뽐내지 않으셨습니다. 선한 일을 하시되 묵묵히 조용하게 하셨습니다. 다만 모든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께 돌리고자 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갈대는 약함의 대명사입니다. 상한 갈대는 오죽하겠습니까? 가만 두어도 꺾일 갈대를 사람들은 재미삼아 꺾어 버립니다. 꺼져 가는 심지는 연기와 그을음을 심하게 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손으로 지긋이 눌러 꺼트려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는 누구입니까? 죄로 병든 사람, 연약한 사람, 도저히 소망 둘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품고 감당해 주십니다. 상한 갈대에 지지대를 붙여 주시고 양분을 공급해 주십니다. 꺼져 가는 심지에 기름을 계속 부어 주시고 바람을 막아 주십니다. 튼튼한 갈대가 되고 활활 타오르는 등불이 될 때까지 그렇게 하십니다. 마태가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이기심과 탐욕에 깊이 병든 마태를 사람들은 외면하고 멀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를 제자로 삼아 아예 곁에 두고 섬겨 주셨습니다. 그 결과 마태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 마태, 성 마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 안에서는 누구나 다 소망이 있습니다. 어떤 연약한 사람, 죄로 병든 사람도 예수님 안에서 참된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을 할 때 다투면서 일을 합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챙기기 위해 다툽니다. 여기서 밀리지 않으려면 나도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피곤합니다. 사람들은 아직 작은 일을 하고 나서도 여기저기 광고를 합니다. 자기 PR 시대에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앞다투어 관심을 끌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지쳐갑니다. 또 이 사회는 약한 자에게 냉혹하지 그지없습니다. 약점을 보이면 집요한 공격을 받습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한 번 뒤쳐지면 다시는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늘 긴장하고 약해도 강한 척, 없어도 있는 척하며 사느라 쉴 틈이 없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서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다투지도 들레지도 않으시는 예수님,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예수님께로 나아가면 됩니다. 이 예수님 말고 어디에서 우리가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 안에서는 우리는 쉼을 얻습니다. 우리를 품어 주시고 묵묵히 감당해 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평안을 얻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도 예수님 스타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작은 이익 때문에 서로 다투지 말고 양보해야 하겠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기를 자랑하거나 과시하지 말아야하겠습니다. 연약한 사람, 죄로 병든 사람을 품고 섬기고 감당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오더라도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공동체를 함께 이루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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