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긍휼의 목자 예수님

이창무 2020. 6. 14. 16:10
반응형

2020년 마태복음 제 15 강 / 이창무

긍휼의 목자 예수님

말씀 / 마태복음 9:18-38
요절 / 마태복음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세종 대왕이 왜 한글을 창제했습니까?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백성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종 대왕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의 탁월한 능력이 긍휼의 길을 따라서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십니까? 그분의 권능 뿐만 아니라 긍휼까지도 놀라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는 예수님의 권능과 긍휼하심이 어떻게 나타나 있을까요?

첫째로, 예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새 포도부와 새 부대’를 주제로 말씀을 가르치고 계실 때였습니다. 한 관리가 들어와서 예수님 앞에 절하며 간청했습니다. 관리라면 당시 사회적 신분이 상당히 높은 사람입니다. 이런 그가 이렇게 엎드려 간청했다는 것이 정말 놀랍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간청의 내용이었습니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이제까지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쳐 주신 적은 많았지만 죽은 사람을 살리신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관리에게는 예수님이라면 이미 죽은 사람도 얼마든지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전례가 없는 이 믿음에 감동을 받으신 예수님은 일어나 관리의 집으로 향하셨습니다(19). 그 순간 당시 부정한 병으로 간주되던 혈루증을 열두 해 동안이나 앓던 한 여자가 나타났습니다(20). 여자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예수님의 뒤로 몰래 다가왔습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졌습니다. 여자가 왜 이렇게 했을까요? 그 여자의 마음에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21). 이 또한 전례가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에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여자를 혈루증으로부터 구원해 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각 관리의 집에서는 이미 딸의 장례식이 한창이었습니다(23). 장례식장을 다니며 음악을 연주하고 전문적으로 곡을 하러 다니는 알바생들이 슬픔의 분위기를 연출하려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24)” 잠과 죽음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시 깨어나느냐 깨어나지 못하느냐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소녀를 다시 살리실 것이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든 것으로 보셨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웃기고 있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말이지’ 하면서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내보낸 후 죽은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자 소녀가 ‘아, 잘 잤다’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습니다(25). 이 놀라운 소식은 SNS를 통해 이스라엘 전역으로 삽시간에 퍼져 나갔습니다(26).

본문 속에 한 관리와 혈루증을 앓던 여자는 여러모로 대조가 됩니다. 관리는 지명도 높은 지역 유지였고 남자였습니다. 반면 여자는 부정한 병에 걸린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한 관리는 앞으로 나왔고 여자는 뒤로 나왔습니다. 한 관리의 문제는 이미 죽은 딸이었고 여자의 문제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이렇게 모습은 서로 달랐지만 이 두 사람에게는 한 가지 일치하는 지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권능과 긍휼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이 관리로 하여금 체면과 위신이라는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있게 했습니다. 이 믿음이 여자로 하여금 수치심과 두려움이라는 장애물을 극복하게 했습니다. 그때 죽은 자가 살아나고 서서히 병으로 죽어가던 자가 고침을 받는 놀라운 새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에도 항상 장애물이 많습니다. 자존심이 내 문제를 주님 앞에 꺼내 놓는 것을 가로 막습니다. 나는 감히 주님 앞에 나갈 자격이 없다는 불의한 생각이 주님께 가는 길을 가로 막기도 합니다. 이미 다 끝났다는 생각, 이미 여러 번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만 했다는 생각이 다 포기하고 싶게 만듭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권능과 긍휼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어떤 장애물이라도 뛰어넘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우리 삶에서 얼마든지 놀라운 새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끈질기게 괴롭혀 왔던 고질적인 문제가 있습니까? 믿음으로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절망에 빠져서 무기력한 삶을 살았습니까? 믿음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돈도 아니고 기술도 아니고 인맥도 아니고 지식도 아닙니다.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현재 우리 삶에 임하는 예수님의 구원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두 맹인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곧 긍휼을 베풀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메시아로 믿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아무도 예수님을 이렇게 부른 사람은 없었습니다. 두 맹인은 비록 앞을 볼 수는 없었지만 예수님께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더 정확하게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는 질문으로 맹인들의 믿음을 확인하셨습니다(28).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오이다” 이에 예수님은 맹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 말씀하셨습니다(29). 그러자 두 맹인 모두 눈이 밝아졌습니다(30). 맹인들이 눈을 뜨고 처음 보게 된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멋진 일입니까?

한 관리와 혈루증 않던 여인은 장애물을 극복함으로 예수님의 권능과 긍휼을 믿는 믿음이 있음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면 두 맹인은 예수님의 권능과 긍휼을 믿는 믿음을 무엇으로 나타냈습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치던 기도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믿음은 기도로 드러납니다. 마르틴 루터는 열이 없는 불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도전적인 기도가 없는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능력을 우리 삶 속에서 경험하려면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무능력하게 된 이유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오프라인 금요 기도회를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지났습니다. 저에게 이 금요 기도회의 모티브를 준 것이 바로 오늘 말씀에 나오는 두 맹인입니다. 금요 기도회에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치던 그들처럼 우리도 ‘불쌍히 여기소서’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간절히 기도했지만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낙심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따라오며 부르짖었던 두 맹인들처럼 우리도 낙심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하고자 합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으로 기도한 두 사람에게 ‘너희 믿음대로 되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금요 기도회를 통해서 믿음대로 되는 기도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말 못하게 된 사람을 말하게 하셨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두 맹인이 나가자 이번에는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말을 못하니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이 사람 속에 들어간 귀신은 그의 말문을 막아 소통의 부재 상태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이 그 사람의 인생을 파괴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예수님에 의해 귀신이 쫓겨나가자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무리들은 이런 일은 내가 머리털 나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곧 사탄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며 악평을 했습니다(34). 귀신의 왕이 미쳤습니까? 왜 일 잘 하고 있는 자기 부하를 쫓아냅니까? 바리새인들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 이유는 예수님의 권능을 도무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진짜 앞을 못 보고 말 못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습니다. 제대로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진실을 말하지도 못하는 바리새인들이 진짜 맹인이고 말 못하는 사람 아닙니까?

예전에 저는 말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사람들과 일상적인 의사 소통에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하지 못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찬양의 가사들도 전부다 남 이야기 같아 진심으로 부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할 줄도 몰랐습니다. 마귀가 제 입을 막아 영적으로 볼 때 벙어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예수님의 권능과 긍휼의 역사가 저에게 임했습니다. 주님은 영적으로 볼 때 죽은 자나 다름이 없었던 제 안에 새 생명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영적인 눈이 떠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닫혀 있던 말문이 터지게 하셨습니다. 그 다음부터 기도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찬양이 터져서 십 년 동안 찬양 인도자로 섬기게 하셨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저절로 흘러나오게 하셨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매 주일마다 세 번씩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말로 전달하는 자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오래전의 제 모습만을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대한민국 가운데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저를 살리시고 눈을 뜨게 해 주시고 말문이 열리게 하신 권능과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제가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세계를 보고 제 입술을 열어 그 세계를 전달하는 사람으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4장 23절과 거의 같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이 구절 속에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이렇게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며 전파하시며 고치시는 일에 나서게 만들었을까요? 예수님을 여기까지 쉼 없이 달려오게 만든 원동력이 무엇일까요? 36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답은 바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곧 긍휼의 마음입니다. 왜 무리가 불쌍합니까? 목자 없는 양과 같기 때문입니다. 형식적으로 목자가 있기는 했습니다. 제사장이나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있었고, 헤롯 왕과 같은 정치 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참 목자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이권이나 챙기는 삯꾼 목자들이었습니다. 아니, 더 나아가 양들을 잡아 먹는 이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고생하며 기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악령에 사로 잡히고 병마에 시달리고 말씀을 몰라 이리 저리 방황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보시고 창자가 끊어지듯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불이 붙어 견딜 수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긍휼에 이끌려 이곳 저곳을 두루 다니셨습니다. 긍휼 때문에 죽은 자를 살리시고 눈 먼 자를 눈 뜨게 하시고 말 못하게 된 자를 말하게 하셨습니다. 결국에는 그 긍휼 때문에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대속의 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셨던 그 긍휼의 목자로 오신 메시아이십니다. 그런데 목자 없는 양들은 사방으로 넘쳐 나는데 예수님의 몸은 하나였습니다. 아무리 밤낮으로 뛰어도 다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간곡히 부탁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추수할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37, 38)”

이 시대에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첫번째는 뭐니 뭐니 해도 머니 곧 돈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면 뭐든지 열심히 합니다. 또 재미가 있으면 열심히 합니다. 취미 생활에 빠진 사람들을 보십시오. 한 번 재미에 푹 빠지면 시간이 얼마가 들어가든 돈이 얼마가 들어가든 개의치 않고 그 일에 열정을 불태우곤 합니다. 또는 미래에 자기가 이루고 싶은 꿈을 위해서 현재를 희생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요? 돈은 확실히 아닙니다. 돈을 벌기는커녕 돈을 많이 쓰게 되기 때문입니다. 재미도 아닙니다. 재미 있는 일이야 세상에도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 실현이나 자기 완성도 아닙니다. 도리어 교회에서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에 이끌려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고 양들과 이웃을 섬기고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심장 안에 있던 불붙은 긍휼이 우리에게 옮겨 붙었기 때문입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한 이들이 우리 주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섬길 추수할 일꾼으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긍휼로 불이 붙어 있습니까? 아니면 차갑게 식어 만사가 귀찮아 졌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긍휼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긍휼로 영적인 눈을 뜨고 기도와 찬양과 감사의 말문이 트이게 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이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며 우리 심령이 다시 긍휼로 불붙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은 긍휼의 목자로, 추수할 일꾼으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