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마태복음 제 12 강 / 이창무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말씀 / 마태복음 8:1-17
요절 / 마태복음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코로나 사태로 한 가지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며 질병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그 예수님께서 병들어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어떻게 고쳐 주셨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산상수훈 말씀을 다 전하신 예수님은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그곳에는 저마다 산더미만한 문제를 안고 있는 무리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먼저 예수님께 나온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한 나병 환자였습니다(2). 여기서 나병은 현재 한센병이라고 부르는 질병을 포함해서 모든 전염성이 강한 피부병을 가리킵니다. 이런 병에 걸리면 어떻게 됩니까? 일단 가려워서 견딜 수가 없게 됩니다. 전염성 때문에 가족과도 생이별해야 했습니다.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2주 동안 자가 격리 생활만 해도 너무 힘들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는 무기한으로 자가 격리를 해야 하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게다가 나병환자는 하나님께 저주 받은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수많은 무리에게 둘러 쌓인 예수님 앞에 나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어떻게 이런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요?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드린 간청 속에 답이 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2)” 그는 ‘내가 원하오니’라고 말하지 않고 ‘주님이 원하시면’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간절한 소원보다 예수님의 주권을 더 앞세웁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아무도 고치지 못한 이 나병을 예수님은 얼마든지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나병환자가 어떻게 이런 믿음이 있는지 놀라운 일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뒷걸음질치며 ‘고쳐줄 테니 멀리 떨어져 있거라.’ 하셨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셨습니다. 이 순간 웅성거리던 무리들이 일순간 깊은 정적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눈 앞에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말씀만으로 치유하실 수 있는데 왜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셨을까요? 이는 나병환자의 육체적 질병을 치유하기에 앞서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시며 회복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얼마나 많은 상처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을까요? 그 동안 사람들은 나병환자를 보면 욕을 하고 돌을 던졌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아무 말이 없이 와서 꽂히는 따가운 시선들을 피하며 뼈 속 깊이 사무치는 외로움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손이 그 몸에 스르르 와서 닿았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사람 손의 온기였습니다. 그 손을 타고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이 전달되었습니다. 그러자 나병환자의 수많은 상처들이 한 순간에 녹아 내렸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나는 그 누구보다 어쩌면 너 자신보다 더 네가 깨끗하게 되기를, 온전하게 되기를 원한단다.” 예수님이 말씀을 하시자 곧 나병환자가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깊이 패이고 흉하게 일그러졌던 온 몸에 아기피부처럼 뽀얀 새 살이 돋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회복시키신 것은 그의 몸과 마음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제사장을 통해 병이 다 나았다는 증거로 받도록 명하셨습니다. 이것은 이 사람이 다시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사회적 관계를 회복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한 나병환자에게 몸과 마음과 영혼 그리고 사회적 관계까지 전인적인 치유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나병환자에게 이루신 일은 전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정결한 것이 부정한 것과 접촉을 하면 부정해졌습니다. 마치 건강한 사람이 코로나에 감염된 사람과 접촉하여 감염자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한 사람과의 접촉을 차단하고 격리하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거룩하신 예수님과 부정한 사람 사이에 접촉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부정해지지 않으셨습니다. 부정한 사람에게서 부정함이 제거되고 예수님의 거룩이 그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거룩과 부정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도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과 접촉한 사람들입니다. 온갖 죄로 더러워진 우리에게 예수님이 손을 대셨습니다. 그러자 우리의 부정함이 제거되었습니다.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하게 된 사람 곧 성도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죄로 망가졌던 우리 내면을 치유하시고 회복하시고 계십니다. 공동체 속에서 사람들과 사랑의 관계성을 맺으며 사는 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를 통해서 내 주변과 이웃을 거룩하게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제사장들이 사도 바울을 총독 벨릭스에게 이렇게 고발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바울이 슈퍼 전파자라는 뜻입니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이태원 클럽에서 춤추다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슈퍼 전파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온 세상에 거룩을 퍼트리는 슈퍼 전파자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복음으로 부정한 사람을 정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감염시켜 그들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복음의 슈퍼 전파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 깨끗함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의 손길로 우리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며 더 나아가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일에 우리를 사용하시는 우리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중풍병에 걸린 백부장의 하인을 낫게 해 주셨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했습니다. 백부장은 중대급의 로마군을 지휘하는 장교입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했다는 것 자체가 정말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더 놀랄 일은 간구의 내용입니다. 백부장은 중풍병으로 누워 있는 하인을 고침 받게 하려고 나왔습니다(6). 당시에 하인은 주인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물건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물건이 쓰다가 고장 나면 쓰레기통에 버리듯이 병든 하인을 그냥 버리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하인 한 사람의 생명도 이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방인 백부장의 겸손함과 인간애에 큰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7)” 이때 백부장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부정하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던 백부장은 자신 때문에 예수님이 부정한 사람으로 낙인 찍히게 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하인은 어떻게 고칩니까? 여기서 백부장은 예수님이 말씀만으로도 원격 치유가 가능하다는 획기적인 생각을 해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절대적인 권세가 있음을 믿었습니다. 어디서 이런 믿음이 생겼을까요? 이 믿음은 그의 직업 세계에서 겪은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군대에서 상관의 말은 곧 법입니다. 백부장의 상관이 명령을 하면 백부장은 그대로 받들어 집행합니다. 또 백부장이 부하에게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옵니다. 제가 군 생활할 때 내무반 TV가 로터리식이라 리모콘이 없었습니다. 그 대신 인간 리모콘이 있었습니다. 저더러 9번을 틀라 하면 9번이 나오고 11번을 틀라 하면 11번이 나왔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하인에게 있던 중풍병이 떠날 것은 백부장은 믿었습니다. 삶의 경험을 영적 세계의 진리로 연결시키는 이 상상력과 응용력이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만 놀란 것이 아닙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예수님도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놀라셨습니다. 이만한 믿음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본 적이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우고 암송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했고 그들 중에 믿음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날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며 말씀을 들었지만 이만한 믿음에 이른 제자는 없었습니다. 늘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 책망 받기 일쑤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이었던 백부장에게 이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시고 앞으로 많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비전을 보셨습니다(11). 그리고 백부장이 믿음으로 드린 간구에 응답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 대로 될지어다’ 말씀하시자 그 즉시 하인이 나았습니다(13).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놀라시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수님은 폭풍우가 몰아쳐도 배 위에서 편안히 잠을 잘 정도로 웬만한 일에는 놀라는 일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백부장의 믿음에 깜짝 놀라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하는 사람들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주님이 나를 보시면 ‘이 믿음이 작은 자들아’ 라고 책망하실 것 같은 이 느낌적인 느낌은 무엇 때문일까요? 성경 공부를 해 온 기간이 반드시 믿음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도 왕년에는 한 믿음 하긴 했거든. 그런데 말씀은 말씀이고 현실은 현실이더라구.” 이런 식으로 처음에는 단순한 믿음이 있었는데 신앙 생활 연륜이 쌓일수록 오히려 부정적이고 회의적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따르는 자들에게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은 제자들도 그 믿음을 배우고 본받으라는 뜻일 것입니다. 백부장은 아는 것이 많지 않았습니다. 경력이 오래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단순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말로만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예수님이 온 세계의 주인이심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이 곧 현실이 될 것을 담대하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백부장의 이 창의적인 믿음, 단순한 믿음, 절대적인 믿음을 배워 주님을 놀라게 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에게서 열병이 떠나가게 하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마침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워있었습니다. 아마도 말라리아에 걸린 듯 싶습니다. 말라리아는 지금도 치명율이 높은데 당시는 오죽했겠습니까? 이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여인의 손을 만지시자 곧 열병이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손을 어루만지심으로 얼마나 그녀를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지를 나타내셨습니다. 이때 누가 가장 큰 감동을 받았을까요?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집을 나간 바람에 열불이 나 있던 베드로의 아내가 아닐까요? 아내는 남편이 이렇게 좋으신 분을 따르고 있다니 안심이 되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장모는 예수님께 손수 정성껏 만든 삼계탕을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사위에게 닭다리를 건네 주며 이런 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자네는 큰 소리는 잘 치지만 심지가 약하니 행여나 예수님을 부인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게.”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와 중풍병자와 열병환자를 치유하셨다는 소문이 낫기 때문일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 병든 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귀신을 내어 쫓으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부정한 자를 깨끗케 하시고 병든 자들을 낫게 하실 수 있을까요? 치유의 근원이 어디일까요? 17절을 보십시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예수님의 치유 사건은 이사야서 53장 4절 말씀의 성취입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스스로 죄의 짐을 질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대로 놔두면 그 짐에 깔려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군가 대신 담당하고 짊어질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어디로 가져 가셨습니까? 바로 십자가로 가져 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부정하고 연약하고 병든 것을 다 소멸시키셨습니다. 그 대신 우리에게는 정결함과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 죄를 가져가시고 우리에게 의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루터는 이것을 가리켜 ‘행복한 교환’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편에서는 행복한 교환이지만 예수님 편에서는 엄청난 희생입니다. 왜 주님은 이런 빚지는 장사, 손해 보는 교환을 기꺼이 감수하시는 것입니까?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으로 지금 우리를 어루만져 주고 계십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의 더러움을 씻겨 주고 계십니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믿는 믿음으로 나병환자처럼 담대하게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권세가 있음을 단순하게 믿은 백부장처럼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치유의 은혜, 회복의 은혜를 누리며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설교 > 마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0) | 2020.06.07 |
---|---|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 (0) | 2020.05.24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0) | 2020.05.09 |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0) | 2020.05.03 |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0) | 2020.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