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창무 2020. 4. 26.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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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9 강 / 이창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말씀 / 마태복음 6:19-34
요절 / 마태복음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지난 주 교보문고가 집계한 베스트셀러 1위가 무엇일까요? 책의 제목은 ‘더 해빙(The Having)’이고 부제로 ‘부와 행운을 끌어당기는 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북 트레일러에 보면 ‘가장 빠르게 부자되는 법(37-86억 가능)’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시대 정신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는 대목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재물에 대한 성경적인 가치관이 없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재물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십니다. 지구 상에 보물을 땅에 쌓아 두는 유일한 종족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인간입니다. 사람들은 왜 재물을 축적할까요? 미래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죽을 때까지 펑펑 써도 남을 재물을 축적해 놓고도 계속 더 쌓기 위해 혈안이 된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쌓아 놓은 재물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사회적 지위를 결정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쌓아 놓은 재물을 빼앗아 가는 세 가지 적들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값비싼 옷도 좀이 슬면 다 망가집니다. 동전도 녹이 슬면 가치가 사라집니다. 가장 안전해 보일 것 같은 보석도 도둑이 훔쳐가면 그만입니다.

 

현대인들은 어디에 재물을 쌓아 둡니까? 주식에 투자하기도 하고 부동산을 매입하기도 합니다. 시중 은행에 예금으로 넣어 두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식에 잘못 투자하면 쪽박을 차기 십상입니다. 아무리 부동산은 불패라지만 언젠가 거품이 꺼지면서 폭락하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보이싱 피싱 사기범에게 감쪽같이 당해 예금 두었던 돈을 한순간에 다 날려 버리기도 합니다. 재물에 미래의 안전과 자신의 가치를 걸었던 사람이 이런 일들을 겪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재물의 사라짐과 함께 인생의 안전도 가치도 의미도 함께 다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쌓아 두었던 재물을 모두 잃은 후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땅에 보물을 쌓아 두는 일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는 보물을 어디에 쌓아 두어야 하겠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는 좀이나 동록이나 도둑이 없어서 잃어버릴 염려가 전혀 없습니다. 하늘에 쌓은 재물은 영원히 그 가치가 보존됩니다.

 

그러면 보물을 하늘에 쌓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땅에서 얻은 재물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과 가족들을 잘 부양하기 위해 재물을 잘 관리하길 원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일에 재물을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구제와 봉사를 위해서,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를 위해서 물질을 쓰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번에 우리가 코로나 19 바이러스 사태로 어려움에 처한 개척 지부와 선교지를 위해 모은 특별 헌금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일입니다. 이렇게 섬기기 위해서 쓴 돈은 내 계좌를 빠져나가 어디로 없어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고스란히 다 천국 계좌에 쌓여 있습니다. 우리는 진심을 담아 적은 물질을 드렸을 뿐인데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드린 것 이상으로 모두 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이 왜 이렇게 중요할까요? 21절을 보십시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음은 보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보물을 땅에 쌓으면 마음이 땅으로 향하고 보물을 하늘에 쌓으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식 투자하는 사람은 하루 종일 주가가 얼마나 오르고 내리는가에 온 신경을 쏟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파트를 여러 채 사 놓은 사람은 아파트 시세에 마음이 있습니다. 반면에 아프리카의 가난한 아이를 위해 구제금을 보낸 사람은 그때부터 아프리카에서 들려오는 뉴스에 관심을 갖기 마련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물질을 드린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마음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보물을 땅에 쌓느냐? 하늘에 쌓느냐? 꼭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볼 필요가 있느냐?’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격언도 있지 않습니까? 보물을 절반으로 나누어서 반은 땅에, 반은 하늘에 쌓으면 안 될까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명확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에서 재물의 원어는 ‘맘몬’으로서 재물의 신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입니다. 재물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아닙니다. 재물은 우리 삶에 필요한 자원을 얻기 위해 필요합니다. 또한 재물이 있어야 선한 일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물은 종종 신이 되어 인간을 강력하게 지배하는 마력을 갖기도 합니다. 세익스피어는 ‘돈은 검은 것을 희게 하고, 추한 것을 아름답게 하고, 늙은 것을 젊게 하고, 문둥병조차 사랑스럽게 하며, 늙은 과부에게 젊은 청혼자들이 몰려들게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돈만 있으면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을 다 이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재물은 이때 마음과 성품과 뜻과 힘을 다해서 나를 섬기면 네가 원하는 윤택한 삶과 행복을 주겠다고 속삭입니다. 이렇게 재물은 인간의 마음을 빼앗고 충성심을 가져갑니다. 재물이 그의 새 주인이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길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해서 이렇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요? 이 세상에 돈에 대한 사랑은 공기처럼 퍼져 있어서 제자들 역시 언제든지 재물의 노예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가롯 유다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다가 은전 삼십 냥에 예수님을 팔아 넘기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지 않고 땅에 쌓다가 보면 우리 마음은 땅으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을 섬긴다 하지만 실제로는 재물을 섬기는 실천적 무신론자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재물에 눈이 멀어 마음까지 어두워져 분별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보물을 하늘에 쌓게 되면 우리 마음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단순한 눈 곧 성한 눈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도 밝아져 참된 지혜와 분별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보물을 하늘에 쌓음으로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는 사람,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온전히 섬기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제자는 예수님 말씀대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살다 보면 땅에 쌓아 둔 보물이 별로 없습니다. 그때 염려가 찾아옵니다. “내 장래는 어떻게 하나? 노년은 잘 살 수 있을까?” 이런 염려가 들면 얼굴이 어두워집니다. 이런 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분열되어 하나님께 집중할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물질이 없어 염려하기 쉬운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주셨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목숨을 주신 하나님께서 목숨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자원들도 당연히 공급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공중을 나는 새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아울러 그 새가 먹고 살 수 있도록 각종 곤충과 곡식과 열매들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들의 백합화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아울러 그 백합화에게 솔로몬 왕의 옷보다 더 아름답고 화려한 꽃을 피우게 하셨습니다. 제자의 목숨은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보다 훨씬 더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너무 한 쪽 면만 보신 것 아닐까요? 주위를 둘러보면 굶어 죽는 새도 있고 말라 죽는 들풀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도였던 바울은 선교 사역 중에 한 때 궁핍함으로 인해 크게 고통받기도 했습니다(빌4:11). 지금도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물질 문제로 힘든 선교사님이나 개척 센터가 있습니다. 먹고 살기가 왜 이렇게 힘이 듭니까? 인간의 죄 때문에 세상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고 사람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겨우 먹을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창3:19). 이 때부터 사람은 염려와 걱정 근심이라는 족쇄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염려는 너무나 우리와 가까이 있어서 염려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없는 염려까지 만들어 냅니다. 오죽하면 사람은 염려 공장의 공장장이라는 말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런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27)” 여기서 키는 수명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염려하면 수명이 연장될 수 있습니까?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염려를 하면 할수록 스트레스가 쌓여 위장병, 신경쇠약, 불면증, 각종 암에 걸려 단명할 수 있습니다. 염려가 지나치면 일에 집중할 수 없어 도리어 문제 해결을 못하게 만듭니다. 염려는 인생에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이것을 알아도 염려를 떨쳐 버리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염려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30절에 보면 예수님은 염려하는 제자들을 가리켜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32절에는 염려하는 자들을 이방인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고도 하셨습니다. 흔히 염려는 물질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해 보면 물질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염려합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상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지금도 섭리로 온 세상을 돌보고 계십니다. 인간의 반역과 죄악에 불구하고 때마다 비도 내려 주시고 해도 비추게 하셔서 농작물이 자라나게 하십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만나로 먹이셨듯이 당신의 자녀들을 지금도 신실하게 먹히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염려와 걱정과 근심 불안이 말끔하게 사라집니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를 전폭적으로 신뢰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우리도 하늘의 아버지를 전폭적으로 신뢰함으로 모든 염려에서 해방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염려 대신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33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앞선 25절에서 예수님은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목숨 곧 생명을 주셨을까요? 있으면 있는 대로 더 쌓으려고 아등바등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전전긍긍하며 살라고 생명을 주셨을까요? 일생 재물에 매인 노예처럼 살라고 생명을 주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죄로 죽을 우리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서 흘리신 피로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 고귀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뜻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인생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말씀이 모두 다 직장을 때려 치고 풀타임 사역자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선 순위에 관한 것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보다 먼저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가운데 임하게 하는 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일을 앞세우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먹고 사는데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고 우리를 돌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믿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게 됩니다(34). 모레 일도 염려하게 되고 한 달 후의 일도 염려하게 되고 일년 후, 십년 후의 일도 염려하게 됩니다. 이렇게 엄청나게 쌓인 염려의 무게에 짓눌려 우리는 질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일 일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작년에 그 누가 올해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세계적으로 대유행 할 것을 알았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내일 일을 통제하려고 해도 우리 뜻대로 되질 않습니다. 통제할 수 없는 미래를 미리 당겨와서 오늘을 희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한 날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할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오늘 하루를 최선을 다해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이 주신 선물과 같은 하루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하루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하루가 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하는데 최선을 다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만족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오늘 하루의 필요를 공급해 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며 감사로 하루를 마무리하길 원하십니다. 그런 하루 하루가 모아지면 우리 인생은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해질까요? 우리가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보살펴 주시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섬기며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탐심과 염려에서 해방되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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