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

이창무 2020. 4. 19.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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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8 강 / 이창무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

말씀 / 마태복음 6:1-8, 16-20
요절 / 마태복음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아들이 공부하고 있는지 게임을 하고 있는지 감시하려고 몰래 문을 열어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십니까? 만약 그때 게임을 하고 있었다면 낭패입니다.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아버지는 부담스럽고 불편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이런 아버지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아무도 모르게 내가 좋은 일을 하고 있을 때 이를 알아주시는 아버지입니다. 감시하고 처벌하려는 아버지가 아니라 상을 주시려고 아들에게 큰 관심을 두고 지켜 보시는 아버지입니다. 이런 아버지가 계신 것은 얼마나 감사하고 신나는 일입니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당신의 자녀들의 손에 쥐어 줄 큰 상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주는 인정과 칭찬이라는 상에 매여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은밀한 중에 보시고 갚아 주시는 나의 아버지, 우리의 진심과 숨은 공로를 기억하시는 우리의 아버지를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너희 의’란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착한 행실을 가리킵니다. 제자는 마땅히 이런 의를 열심히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에 보이려고 의를 행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과 칭찬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이 욕구가 얼마나 강렬한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의로운 사람이라 인정받고 경건하다는 칭찬을 받기 위해서 의를 행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신앙 생활의 목적이 변질됩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신앙 생활이 됩니다. 신앙 생활의 기쁨이 사라지고 사람들 눈치보느라 피곤해집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얻을 수 있는 평안이 사라지고 성령의 열매가 맺히질 않습니다. 이것은 신앙 생활이 아니라 종교 생활입니다. 하나님을 늘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는 실천적 무신론자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경건의 3대 요소로 꼽았던 구제, 기도, 금식을 예로 들어 제자의 은밀한 의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 ‘은밀하게 구제하라’ 입니다. 구제는 가난한 사람에게 나의 것을 나누어 아름다운 선행입니다. 성경은 고아나 과부, 나그네 같은 약자를 돌아보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임을 가르칩니다. 돌려받을 생각 없이 내 소유를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은 얼마나 숭고한 헌신입니까? 그런데 이 아름다운 헌신이 외식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외식하는 자들이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며 구제를 했습니다(2). 외식이란 말은 원래 연극하는 배우가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모습을 뜻했습니다. 배우가 연기를 아무리 잘 해도 그의 진짜 모습이 아닙니다. 외식은 연기입니다. 속은 안 그러면서 겉만 그럴 듯이 꾸미는 것입니다. 나팔은 본래 ‘여러분! 여기 주목해 주세요. 도움이 필요한 분들은 어서 오세요’라는 뜻으로 불었습니다. 그러나 외식하는 사람은 ‘여러분! 내가 이런 착한 일을 하고 있어요. 나를 좀 알아주세요.’라는 뜻으로 나팔을 불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그의 명예가 높아질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상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떻게 구제해야 합니까? 3, 4절을 보십시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어떻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습니까? 이 말씀은 그만큼 철저히 은밀하게 구제하라는 뜻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구제하면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큰 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의 상을 받게 됩니다. 구제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나만 아는 감격과 기쁨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내 것을 내놓았는데 오히려 내 인생이 점점 더 풍성해지는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이런 은밀한 구제를 실천하여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는 상급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은밀하게 기도하라’ 입니다. 기도는 경건 생활의 핵심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신 것에 감사하고 사랑과 믿음을 고백합니다. 기도를 통해 고민을 털어놓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기도는 영적 생명력을 공급해 주기 때문에 기도를 호흡에 비유하기까지 합니다. 기도가 없는 신앙 생활은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경건의 척도 역할을 해왔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도 다니엘의 기도 생활을 본받아 하루 세 번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 시간이 되면 주위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전형적인 기도 자세를 취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당신은 매우 경건한 분이시군요.’ 하며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현상이 생겼을까요? 외식하는 사람은 기왕 인정받을 것이라면 더 큰 인정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했습니다(5). 예수님은 이런 사람에 대해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6절을 보십시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골방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요? 여기서 포인트는 골방이 아닙니다.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은 얼마나 자주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는지 알아주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칭찬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은밀히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이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아이들까지 다 내보내고 동역자와 단둘이서 은밀하게 대화를 나눕니다. 이때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누가 듣기 원하지 않습니다. 둘만의 은밀한 것을 고이고이 간직하기 원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나 사이의 대화도 누구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향해서 은밀하게 기도하기 원합니다. 나의 고민과 아픔을 은밀하게 털어놓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은밀하게 듣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과의 은밀한 기도를 통해서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하나님과 나만의 깊은 사연이 쌓여져 갑니다. 사랑이 깊어지고 영성이 깊어집니다. 하나님과 대화의 창구가 열려있는 사람, 하나님과 영이 맞닿아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은 믿음의 비밀을 간직한 신령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또 제자는 기도할 때에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제자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지 말아야 합니다(7). ‘중언부언’이란 ‘주문을 외우듯이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면 충분할 것을 길게 늘어놓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왜 그렇게 기도할까요? 그들은 한 말을 하고 또 해야만 신이 그 정성을 보고 들으리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은 삼천 배를 하면 눈길을 한 번 준다고 합니다. 어떤 신은 주문을 많이 외울수록 큰 복을 준다 합니다. 이들이 기도를 바치는 신은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면 제자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사랑합니다. 자녀를 이 땅에 존재하게 한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가진 약함과 아픔을 알며, 또 살아가며 필요한 것들을 압니다. 아버지는 자녀 인생의 공급자입니다. 예수님 믿는 천국 자녀에게 하나님은 동일한 아버지이십니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기뻐하는 아버지가 내게 필요한 것을 모르실까요? 하나님은 내가 알지 못하는 먼 장래까지 생각하며 내게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중언부언 기도할 필요 없고, 억지로 떼쓸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 저의 아버지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게 필요한 것 아시고 준비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 이런 것들 필요하니, 공급해 주세요.” 어떤 분은 하나님이 다 아시면 기도할 필요도 없지 않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 자체를 기뻐하십니다. 우리와 교제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내 인생의 아버지로 고백하고 관계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길 기도합니다.

셋째, ‘은밀하게 금식하라’ 입니다. 금식은 당시 경건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기도 제목이 너무나 간절하여 음식을 절제하며 기도하는 것이 금식입니다. 그래서 금식을 몸으로 드리는 기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언제 금식을 합니까? 율법에 의무적으로 정해진 금식은 일년에 단 한 번 ‘대속죄일’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간절한 기도 제목이 있을 때마다 금식했습니다. 자신의 죄 또는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해 애통할 때 금식했습니다. 금식을 하면 부유한 마음이 가난해지고 높아진 마음이 낮아집니다. 세상 욕심을 내려 놓게 되고 마음이 정결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많은 바리새인들은 이런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경건함을 나타내기 위해 금식을 했습니다. 오래 금식을 하면 자연스럽게 초췌해 보이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슬픈 기색을 과장했습니다. 일부러 머리도 안 감고 흉한 몰골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들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종교심을 자랑하고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으려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는 어떻게 금식해야 합니까? 17, 18절을 보십시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의 제자는 금식할 때에 금식하는 표시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금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금식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보이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굳이 티를 내지 않아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내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는지, 얼마나 애통해 하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나의 슬픔과 고통을 사람에게 위로 받으려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위로 받고자 해야 합니다. 인간의 위로는 탄산음료처럼 잠시 쾌감을 주고 목마르게 하나, 하나님의 위로는 슬픔과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씻어 줍니다. 우리 인생에 기쁨만 있지는 않습니다. 슬픔의 강을 지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그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리라 약속하셨습니다. 나의 인생 깊은 곳에 흐르는 슬픔의 강이 예수님을 통해 기쁨의 강으로 변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내 슬픔과 아픔을 하나님께 들고 간절한 기도의 자리로 나갈 때 주님께서 우리 안에 생수의 강을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인정과 칭찬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를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구제, 기도, 금식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의 3대 경건 생활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기도는 현재 우리에게도 경건 생활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구제와 금식은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크게 와 닿지는 않습니다. 특히 금식이 더 그렇습니다. 이보다는 일용할 양식이나 소감 쓰기, 전도 등이 더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예배 드리는 홀 좌우벽에 차트가 붙어 있었습니다. 거기에 각 사람별로 일주일 동안 일용할 양식을 몇 번이나 먹었는지, 일대일을 몇 팀이나 했는지를 빨간색 그래프로 표시했습니다. 내 그래프가 높이 솟아 있으면 자부심이 생기고 바닥에 붙어 있으면 주눅이 들었습니다. 또래들에게 질 수 없다는 경쟁심리에 열심히 양식도 먹고 일대일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래프가 없어졌습니다. 다른 사람이 양식을 얼마나 먹었는지, 일대일을 몇 팀이나 했는지 잘 모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인정 받고 칭찬 받고 세움을 받는 그런 분위기도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과거에 비해 일용할 양식을 먹는 횟수도 줄어들고 소감도 잘 안 쓰게 되고 전도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우리의 경건 생활은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였나요? 아니면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가기 위해서였나요? 사람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 신앙 생활하나요? 아니면 하나님께 칭찬과 상급을 받기 위해 신앙 생활하나요? 사람의 주목과 칭찬이 예전만 못한 지금이 우리가 진정한 경건에 들어가기 좋은 때입니다. 외식과 위선을 벗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만남의 세계로 들어갈 때입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참된 경건을 통한 유익을 누리고 계십니다. 그분들은 은밀하게 경건 생활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은밀한 의가 삶의 열매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가까이 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닮아가고 배워가기 마련입니다. 은밀한 의가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탁월한 의가 이를 수 없습니다. 돋보기로 빛을 모으면 종이도 태우고 나무도 태웁니다. 경건의 능력, 영성의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개인 경건 생활을 통해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여 하나님과 깊은 관계가 맺어지고 하나님의 상급을 받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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