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그가 살아나셨느니라

이창무 2020. 4. 12.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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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부활절 특강 / 이창무

그가 살아나셨느니라

말씀 / 마태복음 28:1-20
요절 / 마태복음 28: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한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태어난 날이며 둘째는 죽은 날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태어난 날을 기념하고 죽은 후에는 무덤에 모여 죽은 날을 기념합니다. 특히나 인류 역사에 족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의 서거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크고 화려하게 꾸며진 무덤에 가서 고인을 추모하곤 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분의 서거일을 기념하지 않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아무도 그분의 무덤을 찾지 않는 한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죽으신 날이 아닌 다시 사신 부활절을 기념합니다. 빈 무덤을 찾지 않고 대신 살아 계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교회에 모여 함께 부활절 예배를 드립니다. 코로나 사태로 한 장소에 모여 부활절 예배 드리지 못해 아쉽기는 합니다. 하지만 각 가정과 처소에서 드리는 부활절 예배 가운데 살아 계신 부활과 생명의 주 예수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분께 우리의 온전한 경배와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부활의 날 주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혹은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셨던 세 가지 명령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두 여인이 예수님이 묻히셨던 무덤을 찾아왔습니다. 왜 왔을까요? 사랑하는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이라도 발라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여인들이 찾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무덤 속에 싸늘한 시신만을 남긴 예수님이었습니다. 악인들에게 누명을 뒤집어 쓰시고 억울하게 사형당하신 예수님, 슬프고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가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갑자기 나타난 천사가 여인들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천사는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했습니다. 보니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왜 비어 있습니까? 혹시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갔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대제사장들이 경비병을 매수하여 퍼트린 가짜 뉴스입니다. 진짜 뉴스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삼일만에 무덤에서 일으키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셨기 때문에 무덤에 비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인들이 찾던 캄캄한 무덤 속에 갇혀버린 예수님은 어디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 중에도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예수님을 무덤에서 찾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나의 현실이 암담하고 슬프기 때문에 그 눈이 무덤을 향하고 있습니다. 내 인생이 잘 안 풀리고 답답하기 때문에 근심과 절망의 돌이 마음을 굳게 닫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신앙 생활을 하기는 하는데 기쁨이 별로 없고 늘 우울 모드라는 것입니다. 자주 울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 때문에, 양 때문에, 자녀 때문에 우는 것 같은데 나중에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해서 웁니다. 자기 연민 때문에, 자기 처지가 불쌍하고 웁니다. 그러나 천사는 말합니다. “어찌하여 우느냐.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을 무덤에서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은 예수, 슬픈 예수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을 박차고 살아나셨습니다. 돌을 굴려내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부활의 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 인생에 실패와 좌절의 돌을 굴려 내시고자 하십니다. 마침내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을 믿고 나의 슬픔과 운명을 극복하길 원하십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고 거짓이 진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선이 악을 이기고 생명이 사망을 이깁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이것을 확실하게 보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더 이상 울지 말고 승리의 소망 가운데 기쁨으로 찬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갈릴리로 가라’ 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천사는 여인들에게 제자들을 찾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갈릴리로 가라는 메시지를 전하도록 했습니다. 여인들은 이 기쁘고 놀라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제자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달음박질했습니다. 그 길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인들 앞에 ‘짠” 하고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말씀은 천사가 전해 준 메시지와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냥 제자들이 지금 있는 예루살렘에서 만나면 안 됩니까? 왜 이처럼 두 번씩이나 갈릴리로 가라고 하실까요? 갈릴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낸 장소입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처음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그곳에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과 함께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제자들은 그곳에 다시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이 자꾸만 떠오르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순간 예수님과 함께 하지 못하고 도망쳐 버린 자신들의 비겁함이 떠올라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다시 보자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의 충격 때문에 죽어버린 제자들의 믿음을 다시 살리길 원하십니다. 제자들의 배신 때문에 금이 가고 깨어져 버린 관계성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제자들이 팽개쳐 버린 위대한 사명을 다시 새롭게 붙들기를 원하십니다. 이 예수님은 제자들을 ‘배신자, 못난이, 한심한 녀석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렇게 부르십니다. “내 형제들이여”

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십니다. 우리가 만약 제자들이 처했던 상황에 놓였었다면 과연 다르게 행동했을까요? 우리가 주님을 배신했던 제자들을 손가락질할 자격이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고 더 연약합니다. 더 이기적이고 더 자기 중심적입니다. 이런 사실이 여러 사건을 통해 드러날 때마다 우리는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는 그냥 주저앉아 버리고 싶습니다. 이미 끝장 난 것 같고 모든 것을 다 접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소망 없다고 내치지 않으십니다. 다른 사람을 뽑아 새로 시작하겠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바로 그 자리 우리의 갈릴리에서 너와 함께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형제여!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2020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로 가 봅시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그 기억, 그 구원의 감격과 기쁨,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인해 터질 것 같았던 심장 소리, 마치 칠흑 같던 어두움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비추이던 것과 같던 진리의 말씀, 그 은혜와 사랑의 기억들을 다시 떠올려 봅시다. 그래서 내 부끄러움을 감추시고 여전히 내게 손을 내밀고 계신 부활의 주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과거가 어떠하든지 간에 이번 부활절이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우리의 신앙 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믿고 다시 일어서려는 우리에게 분명 주님께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셋째,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본 제자들의 첫번째 반응이 어떻습니까?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부활 사건 이전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긴 했어도, 예수님께 경배를 드린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는 왜 경배를 드립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만 왕의 왕으로 등극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 엄중한 명령이 무엇입니까? 19,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원어를 보면 이 말씀에서 동사는 딱 하나 ‘제자로 삼으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님을 배우고 닮아서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DNA를 새겨 넣은 작은 예수가 되려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제자 삼는 일에 헌신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열한 사도에게만 주신 명령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고 천국 백성이 된 모든 부활의 증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 속에 분사로 표현된 ‘가서’ ‘세례를 베풀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에 답이 있습니다. 첫째로 가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결코 제자를 삼을 수 없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야 합니다. 둘째로 세례를 베풀어야 합니다. 세례는 아무에게나 베풀지 않습니다.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한 사람이 믿고 거듭나서 예수님과 연합을 이루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구원과 영생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셋째로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거듭난 사람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가르칠 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본을 보이고 권면해야 합니다. 이 하나 하나의 단계가 모두 다 쉬운 것이 없습니다. 가기도 어렵고 믿어 거듭나게 하기도 어렵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약속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제자 삼는 일에 헌신하신 이들과 함께 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부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부활의 증인들을 통해서 복음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었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교회를 통해 모든 민족으로 제자 삼는 역사를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금 격변의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전 국민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고 학교는 문을 닫았습니다. 대부분 교회가 벌써 한 달이 넘게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비교적 초기 대응을 잘 한 덕분에 큰 위기를 간신히 넘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연이어 닥쳐올  다른 위기들도 잘 헤쳐 나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이전의 세상과 이후의 세상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이후의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게 될지 아직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분명 사회도 기술도 정치도 경제도 많은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캠퍼스도 변하고 교회도 변화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고 걱정과 근심의 먹구름이 몰려 오고 있습니다. 급격한 변화 속에서 각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까지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가’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셨습니다. “너희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이와 함께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지도 알려주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어떻게 캠퍼스 양들에게 가까이 갈 수 있을까? 어떻게 복음을 전하여 믿어 구원을 받게 할 것인가? 어떻게 제자도를 가르쳐 지키게 할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 모두 다 너무 어려운 과제들입니다. 변화된 환경 속에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고 막막해도 우리는 제자 삼는 일을 결코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상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분명히 길을 내시고 지혜와 능력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잠시 혼란과 위기가 있을 수 있겠지만 결국 온 우주의 통치자이신 예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복음 전파의 기회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고 주어진 사명을 이루기 위해 새롭게 다시 도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세상은 가짜 뉴스와 진짜 뉴스 서로 대결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심각한 가짜 뉴스는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따위는 없다. 그러므로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 결국 불의와 어두움이 승리하고 말 것이 뻔하다.” 진짜 뉴스는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죽음으로 끝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다. 결국 의와 진리가 불의와 어두움을 누르고 승리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짜 뉴스에 속아서 죽음의 지배 하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슬픔과 운명, 허무와 절망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진짜 뉴스를 전할 부활의 증인으로 부르심 받았습니다. 부활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바로 부활의 증인들의 삶입니다. 부활을 믿고 소망하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삶 속에 있는 기쁨과 생명력과 헌신이 증거입니다. 우리가 주님 오실 그 날까지 가짜 뉴스를 몰아내고 진짜 뉴스 곧 복음의 증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이런 우리와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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