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너희도 온전하라

이창무 2020. 4. 5.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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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7 강 / 이창무

너희도 온전하라

말씀 / 마태복음 5:17-48
요절 / 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코로나 사태 와중에도 이번 주부터 국회 의원 공식 선거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각 당에서 공천을 받으려면 공천심의위원회로부터 엄격한 심사를 받아야 합니다. 또 재산 내역, 전과 내역을 미리 다 공개해야 합니다. 당선 후라도 흠결이 발견되면 당선이 취소될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국회 의원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입니까? 그만큼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에게는 높은 도덕성과 윤리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국 백성이라는 높은 신분은 가졌습니다. 특권이 큰 만큼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천국 백성다운 높은 윤리 의식과 도덕성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당시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라 여겼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대놓고 병자들을 고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기는 커녕 오히려 완전하게 하시려 오셨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하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율법은 아직 완전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어떤 점에서 율법은 완전하지 않았을까요? 처음 율법을 받았던 사람들은 이제 막 출애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초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완성된 율법을 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기조차 어려웠을 것입니다. 너무 수준이 높아서 아예 율법 지키기를 포기해 버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수준에 맞춰서 율법의 수준도 조절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최소한 이 정도는 지켜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시며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물론 그 최소한의 수준조차 상대적으로 매우 수준이 높긴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이 땅 가운데 천국이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갈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천국 백성에게 어울릴 새로운 법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법은 완전하게 된 율법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법에 따라 사는 사람의 의를 가리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 나은 의라고 부르셨습니다(20).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도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눈물겨운 투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의 의가 이들보다 더 나아야 한다고 하시니 얼마나 수준이 높은 것입니까? 너희는 아예 클래스가 다른 사람, 의의 끝판왕이 되라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한편 부담스럽긴 하지만 또 한편 그 정도 수준은 되어야 천국백성에 어울리는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대표적인 천국의 법들은 무엇입니까?

첫째, ‘분노하거나 경멸하지 말라’ 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십계명 중에 여섯 번째 계명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계명을 어떻게 완전하게 하십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여기서 ‘라가’라는 말은 ‘골빈 놈’이라는 뜻의 욕설입니다. 예수님은 살인 행위 뿐만 아니라 분노와 욕설, 무시와 경멸을 문제 삼으셨습니다. 살인 사건만 일어나지 않으면 천국이 될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 나라는 전세계에서 살인 사건이 매우 드물게 일어나는 국가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분노 지수는 매우 높습니다. 이것은 운전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혐오와 경멸은 어떻습니까? 포털의 댓글 란을 보면 온통 욕설과 막말로 도배가 되어 있습니다. 지난 해에는 이런 댓글로 인해 자살한 연예인이 여럿이나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인격 살인에 피해자가 되었을 때는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반면에 가해자가 되었을 때는 둔감해 진다는 점입니다. 별 일 아니라고 치부하고 사과와 화해를 자꾸 미루기만 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다른 어떤 일보다 앞서 먼저 사과하고 화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형제와 화목하는 일이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일보다 더 앞선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살면 세상에 다툴 일도, 상처 받을 일도 다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로 존중을 받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천국 아니겠습니까?

둘째, ‘음욕을 품지 말라’ 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십계명 중에 일곱 번째 계명으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계명을 어떻게 완전하게 하십니까? 28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간음 행위 뿐만 아니라 음욕을 품고 배우자가 아닌 이성을 바라보는 것까지 문제 삼으셨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만드신 기관이며 결혼 서약은 신성한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결혼하면서 일생 오직 서로에게만 충실하겠다고 약속한 사이입니다.

설령 간음이라는 행위에 이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한 눈을 팔고 있다면 이미 서약을 깨뜨린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 한 눈 판 사람이랑 같이 살고 싶어서 이혼을 한다면 결과적으로 간음과 별 다를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 사회에 불륜과 외도로 인해 깨어진 가정들이 많이 있습니다. 당사자는 물론이고 자녀들이 가슴에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대다수 미혼남녀들은 순결이란 개념을 박물관에나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이성을 한 사람의 인격체로 존중하기보다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대상으로 전락시키기도 합니다. 그 결과가 이번에 드러난 n번방, 박사방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다루십니까? 눈이 실족하게 하면 빼어버리고 손이 실족하게 하면 찍어 내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29,30).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적용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다 애꾸눈, 외팔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요지는 마음으로 간음하는 죄를 그만큼 심각하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이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산다면 이 세상에 성폭력, 성추행, 매춘, 불륜과 외도가 다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순결한 청년들이 만나 부부가 되고 그 부부가 일생토록 서로 사랑하며 하나가 된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천국 아니겠습니까?

셋째, ‘맹세하지 말라’ 입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율법은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계명을 어떻게 완전하게 하십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예수님은 신중하게 맹세하라는 것을 넘어서 아예 맹세 자체를 문제 삼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약속만 하지 않고 왜 거기에 맹세를 덧붙일까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말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더 확실하게 믿게 하려면 큰 것을 걸어야 합니다. 걸 수 있는 가장 큰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면 반드시 지킬까요? 결국에 믿었던 사람만 바보가 되고 신뢰는 깨어집니다. 말의 가치는 휴지 조각이 되고 하나님의 이름은 모독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맹세하는 대신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하라 말씀하셨습니다(37). 마음에도 없는 말, 지키지도 못할 말은 애초에 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을 왜곡시키거나 부풀려 과장하는 말도 삼가야 합니다. 항상 담백하게 진실만 이야기하고 한 번 내뱉은 말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모두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산다면 이 세상은 서로가 서로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보증이나 담보가 필요 없어집니다. 가짜 뉴스인지 아닌지 팩트 체크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어집니다. 오직 진실과 신뢰만 있고 일체의 거짓이나 무책임한 말이 없는 세상! 이 역시 천국 아니겠습니까?

넷째,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입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율법은 악한 자에 대하여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보복하라고 했습니다. 즉 받은 만큼만 되갚아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계명을 어떻게 완전하게 하십니까? 39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예수님은 ‘적절하게 보복하라’가 아니라 아예 아무 보복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동적으로 당하기만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른뺨을 치면 가만 있지 말고 왼뺨도 돌려 대라고 하셨습니다. 속옷을 달라 하면 겉옷도 주고 오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대로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대방은 반격이 들어올 줄 알고 나름 긴장하고 있다가 크게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착한 사람에게 내가 무슨 짓을 했나?’ 반성하면서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설령 그렇게 되지 못해도 적어도 보복이 또 다른 보복을 낳는 이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왜 이렇게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테러가 끊이지 않습니까? 보복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아랍 사람들은 서구 열강에게 석유 자원을 수탈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과격한 테러를 저지릅니다. 테러를 당한 나라는 응징을 하기 위해 전쟁을 벌입니다.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은 폭탄 조끼를 입고 자살 테러를 일으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받은 만큼 되갚아 주십시오. 되갚아 주되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되갚아 주십시오. 그러면 선이 또 다른 선을 낳고 은혜가 또 다른 은혜를 낳는 선순환 고리가 시작됩니다. 그 선순환의 고리가 가득 찬 세상, 그곳이 천국 아니겠습니까?

다섯째, ‘원수를 사랑하라’ 입니다. 43절을 보십시오. 옛 계명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입니다. 왜 이런 계명이 주어졌겠습니까? 원수는 고사하고 이웃마저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있으니 최소한 이웃이라도 사랑하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계명을 어떻게 완전하게 하십니까? 44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님은 이웃 사랑은 기본이요 더 나아가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조건적입니다.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는 나도 잘 해 줍니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나도 사랑합니다. 반대로 나를 해코지하는 사람, 나와 관계성이 좋지 않은 사람은 잘 해 주고 싶지 않습니다. 아는 척하기도 싫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착한 사람에게만 햇빛이 졸졸 따라다닙니까? 의인의 밭에만 비가 내리고 바로 옆 악인의 밭에는 가뭄이 계속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이나 선인이나 골고루 해도 주시고 비도 주십니다.

하나님은 한국 사람만 사랑하지 않으시고 중국 사람, 일본 사람을 다 사랑하십니다. 이번 국회 의원 선거에서 여당을 찍을 사람과 야당을 찍을 사람을 다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차별하지 않으시고 사랑의 폭이 엄청나게 넓어서 만민을 품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일방적으로 은혜를 쏟아 부으시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4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여기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셨습니다. 자녀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아버지를 닮았다는 점입니다.

진수일 목자님은 딸 드보라를 보십시오. 성격부터 말투까지 아빠와 너무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을 닮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라 외모를 닮을 수는 없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 중 단 한 가지만 꼽으라고 하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불완전하고 한계적인 사랑이 아니라 완전한 사랑, 무한대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처럼 사랑에 관해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 사랑의 끝판왕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온전한 사랑을 받아 누리고 그분을 닮아 온전한 사랑을 하길 원하는 사람들이 모인 세상, 그곳이 바로 천국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된 천국의 법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어떻게 느끼셨습니까? “너무 아름답고 좋은 말씀이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못 해. 절대 안 될 거야.” 혹시 이런 생각이 들지 않으셨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런 생각이 옳다면 예수님은 실패자나 몽상가가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에 실패하신 셈이 되고 사람이 전혀 지킬 수 없는 법을 제정하신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실패자도 몽상가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수준 높은 계명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이와 동시에 그 계명을 지킬 힘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올까요? 바로 예수님이 완성하신 십자가의 복음으로부터 나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을 바라보면 한 사람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십자가을 바라보면 순결한 삶을 살 힘이 나옵니다. 십자가를 알수록 진실하고 신실한 사람으로 변호됩니다. 십자가로부터 악을 선으로 갚을 힘이 나옵니다. 십자가로부터 원수까지도 사랑할 힘이 나옵니다.

우리가 여전히 천국 계명에 대한 순종이 부족한 것은 십자가의 복음을 잘 모르거나 알아도 붙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더 깊이 알고 더 꽉 붙들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온전히 천국 백성다운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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