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복이 있는 사람

이창무 2020. 3. 29.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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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6 강 / 이창무

복이 있는 사람

말씀 / 마태복음 5:1-16
요절 /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오늘부터 앞으로 몇 주에 걸쳐 산상수훈 말씀을 배울 예정입니다. 산상수훈이란 산 위에서 주신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수여받았습니다. 이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이제 예수님도 산 위에 올라 여러가지로 가르치십니다. 이 교훈은 ‘천국 백성은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봄학기 산상수훈 말씀을 통해 천국을 맛보며 천국 백성다운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봄이 찾아온 동산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할 필요가 없었던 무리와 제자들은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입을 열어 가르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무엇을 가르치셨습니까? ‘누가 복이 있는 사람인가’에 대해서 였습니다. 누구나 다 복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문제는 무엇이 복인지 잘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진정 복이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첫째,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 안에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살 수 없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간절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의 심령에 천국이 임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4).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애통해 합니까? 가까운 사람의 죽음 때문에, 풀리지 않는 인생 문제 때문에 애통합니다. 반복되는 자신의 죄와 허물 때문에 가슴 아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애통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이 애통함 때문에 예수님 앞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을 위로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위로는 단순히 따뜻한 말 한 마디 정도가 아닙니다. 죄와 죽음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주시는 구원의 위로입니다. 나인 성의 과부는 유일한 희망이었던 외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깊은 슬픔에 빠져 한없이 울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과부를 보시고 ‘울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어서 관 속에 누워있던 아들을 살려 내어 과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죄와 죽음 문제로 신음하는 인생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는 참 위로자가 되십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온유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온유’란 어떤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같은 부드러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분의 처분을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 겸손한 태도를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은 외부로부터 닥치는 억압이나 고난에 대해 거칠게 반항하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결사적으로 대항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이와 같이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여기서 땅은 부동산이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을 가리킵니다. 주 앞에 겸손한 사람이 결국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힘 있는 사람이 힘 없는 사람들에게 갑질을 일삼습니다. 부정부패와 부조리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런 불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를 갈망하는 사람은 너무나 괴롭습니다.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더욱 더 괴로운 것은 세상 뿐 아니라 내 자신 안에도 의로움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 안에 깊이 뿌리내린 죄성 때문에 탄식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성취되는 것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공평과 정의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룬 네 가지 복에 관한 가르침은 무리가 주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누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가? 누가 천국을 누릴 수 있는가?’에 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볼 때는 복과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오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에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서 천국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불행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음이 부요하여 간절한 영적 소원이 없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17절에 보면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십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실상은 영적으로 곤고하고 가련하고 피폐하고 눈 멀고 벌거벗어서 비참한 지경인데 자신의 영적 상태를 모르는 것입니다. 가장 경계해야할 것이 영적인 포만감, 교만함, 헛된 자부심, 자기의입니다. 하나님은 부요하고 교만하여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토하여 내치겠다고 경고하십니다. 우리 마음은 어떻습니까? 부요합니까? 가난합니까?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한 맺힌 과부와 같은 심정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고 내 안에 임한 천국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 안에서 변화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이란 작은 사람, 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품고 양육하는 사랑을 뜻합니다. 네 복음서 중에서 긍휼이라는 주제가 유난히 도드라지는 복음서가 바로 마태복음입니다. 왜 하필 마태복음일까요? 저자인 마태의 자전적 고백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이기심으로 깊이 병든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예수님은 이런 마태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삼 년 반 동안 바로 곁에서 마태를 돌보시며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마태는 세리 마태에서 긍휼의 사도 성 마태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긍휼의 목자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긍휼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서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두 마음을 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일편단심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 향합니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이렇게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마음이 청결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일편단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 만을 생각하셨습니다. 늘 진정성 있게 사람들을 대하시고 조금도 거짓이나 꾸밈이 없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닮아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만이 주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과 같은 친밀한 교제를 누릴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란 평화를 만드는 사람(Peace Maker)라는 뜻입니다. 그 대척점에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Trouble Maker)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대개 자기 주장이 강하고 타인에게 무조건 비판적입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유익만 생각합니다. 가는 곳마다 다툼과 분쟁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면 화평하게 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피스 메이커는 어떻게 하든 분쟁을 막고 화평을 이루고자 애를 씁니다. 이를 위해 자신의 손해와 희생마저 기꺼이 감수하고자 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용서와 화해가 무엇인지 비로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는 최고의 명예와 영광이 주어집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요? 11절에는 나타나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천국의 시민이 됩니다. 천국 시민은 천국의 원리에 따라 살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의 원리는 천국의 원리와 서로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욕을 먹고 불이익을 당하게 됩니다. 너무 억울하고 슬퍼서 눈물이 날 상황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때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상을 받았을 때 온 국민이 얼마나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까? 하물며 하늘에서 큰 상을 받게 되니 얼마나 더 기쁘고 즐거워할 일입니까? 

지금까지 살펴 본 팔복의 후반부 네 가지 복에 대한 가르침은 제자가 주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만나면 어떻게 내면과 삶이 변화되어야 하는지 알려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은 존재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은 가장 아름다운 성품을 지닌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예수 닮기를’이라는 제목의 찬양이 있습니다. 후렴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 평생 소원 예수 닮기를 예수만 닮기를 내가 원하네” 이 가사처럼 우리의 평생 소원이 예수 닮는 것입니까? 아니면 노래는 그렇게 부르지만 다른 소원이 있습니까? 왜 다른 소원을 갖게 될까요? 그 소원이 이루어지면 내가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원이 설사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즐거움은 잠시 뿐이라는 사실을 이미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자리에 오르고 무엇을 소유하는 것이 얼마나 다 부질없는 일인지 모릅니다. 진정한 복은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예수님의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누릴 수 있는 복 중에 이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이보다 더 위대한 인생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제자 답게, 천국 백성 답게 더욱 더 예수님을 배우는 일에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화되어 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 예수님 덕분에 쓰임 받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13절과 14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인가를 두 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로, 세상의 소금입니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이 더 이상 죄로 인해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역할을 감당하려면 제자에게서 짠 맛이 나야 합니다. 제자의 짠 맛이 무엇일까요? 바로 위에서 말씀드린 여덟 가지 복 가운데 나타난 천국 백성다운 성품을 가리킵니다.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하게 하고 의를 위해 박해를 감수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살아갈 때 예수님의 제자는 주위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반면에 제자가 짠 맛을 잃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자가 제자답지 못하면 존재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아무런 쓸모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둘째로 세상의 빛입니다. 빛은 어둠을 뚫고 들어가 세상을 깨우치고 선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끼리끼리 모여서 고립되어 살면 안 됩니다. 빛이기 때문에 세상 속으로 깊숙하게 침투해 들어가야 합니다. 그곳에 있는 어두움을 밝히고 이 모습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 여기서 빛은 착한 행실을 가리킵니다. 제자들이 꾸준히 선한 행실을 실천해 나갈 때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존재들이 됩니다. 예수님 덕분에 이렇게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 이 또한 큰 복 아니겠습니까?

20세기 초 우리 나라에 처음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기독교는 우리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남녀 차별, 계급 차별 등의 오래된 악습을 철폐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각종 학교, 병원, 복지 시설을 세워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백 년이 지난 지금 기독교는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데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는 말까지 듣고 있습니다. 한 때 소금이고 빛이었는데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어느새 소금이 짠 맛을 잃고 빛이 희미해 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제자다운 성품을 갖추지 못하고 제자 답게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라도 우리가 회개하고 제자의 짠 맛을 회복하고 빛을 비추어야 할 때입니다. 

전 세계가 코로나 19 바이러스 사태로 큰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의 때일수록 소금과 빛의 역할이 더욱 절실히 필요해 집니다.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닮고 배우고자 열망을 덧입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가며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 빛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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