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

이창무 2020. 3. 22.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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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5 강 / 이창무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

 

말씀 / 마태복음 4:12-25
요절 / 마태복음 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세상이 어둡다는 말이 요즘처럼 실감되는 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온 세계가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공포 가운데 덜덜 떨고 있습니다. 증시는 날마다 대폭락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1997년 IMF 사태보다도 더 큰 경제 위기가 올지 모른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정도 암담합니다. 언제 다시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를 회복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신OO 때문에 더욱 마음 문이 닫힌 캠퍼스에 앞으로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지 답이 잘 보이질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위기를 이겨 나갈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이 있습니다. 바로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새롭게 영접하고 주의 말씀과 능력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희망이요 빛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큰 빛이신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고 또 예수님의 빛을 어두운 세상에 비추는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큰 빛이신 예수님은 가장 어두운 음지부터 빛을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헤롯에게로 가서 세례 요한 석방 시위를 벌이셨습니까? 예수님은 갈릴리로 물러가셨습니다. 비겁해서 도망친 것이 아닙니다. 물러나지 않는다면 자칫 헤롯과의 정치적인 싸움에 휘말릴 가능성이 컸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천국의 씨앗을 심기 시작해야 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하필이면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그리고 왜 대부분의 공생애 기간 동안 갈릴리 땅에서 사역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15,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갈릴리는 엄연히 이스라엘 땅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왜 ‘이방의 갈릴리’라는 별명으로 불리웠을까요? 이는 북방의 강대국들에게 수차례 침략을 당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주민이 갈릴리에 정착했던 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이런 갈릴리 사람들을 이등 시민으로 간주하고 차별했습니다. 변방 출신의 촌놈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갈릴리 사람이 아무리 능력이 많고 아등바등 노력해 봐야 인정받을 수 없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에 부딪쳐 보았지만 자기 머리에서 피만 날 뿐이었습니다. 어느새 그들은 패배의식에 깊이 젖어 들었습니다. 나는 갈릴리 출신의 흙수저라는 운명에 슬피 울었습니다. 성경은 꿈도 희망도 잃어버린 이들을 가리켜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짙은 어두움을 몰아내 줄 큰 빛이 필요했습니다. 그 큰 빛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태양이 뜨면 어두움이 물러가는 것처럼 큰 빛이신 예수님이 임하시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어두움이 일순간에 싹 사라집니다. 노예선의 선장이라는 어두운 과거를 지녔던 존 뉴턴은 큰 빛이신 예수님을 만난 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그 빛을 비춘 곳은 가장 어두운 땅 갈릴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첫 사역지를 선택하기 위해 시장 조사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시장 조사를 하셨다면 당시 종교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에서 권력과 재물을 한 손에 쥐고 있던 자들에게 먼저 사역해야 한다는 답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희망도 없던 갈릴리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셨습니다. 주님의 눈은 언제나 양지가 아닌 음지로 향하셨습니다. 초대 교회 역사도 높고 화려한 곳이 아니라 낮고 천한 곳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제국의 심장부를 점령해버렸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한반도의 갈릴리에 해당하는 함경도 평안도부터 복음이 들어오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땅 구석구석까지 복음의 빛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시대 주님의 눈은 어디로 향하고 계실까요? 여전히 양지가 아닌 음지로 먼저 향하고 계실 것입니다. 탈북민, 가출청소년, 이주노동자, 독거노인 등등 사회 도처에 음지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 모임에게 맡겨주신 곳은 청년 대학생들입니다. ‘88만원 세대’라는 말로 대표되는 오늘의 청년 대학생 세대들은 좀처럼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전 지국적인 코로나 사태 때문에 발생할 경제 침체 때문에 이 현상은 앞으로 더 심각해질지 모릅니다. 공정하지 않은 세상에 대한 분노, 흙수저 출신이라는 열등감, 이번 생은 이미 망했다는 패배주의로 이들의 마음에는 깊은 어두움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 어두움을 몰아내려면 등불로는 안 됩니다. 큰 빛이 임해야 합니다. 진리의 태양이신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 속에서 두둥실 떠올라야만 합니다. 안타까운 점은 이들이 복음에 대한 수용성이 현저히 낮다는 점입니다. 이번에 불거진 신OO 문제로 이런 상황이 더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음지보다는 양지를 바라보고 싶어 합니다. 높고 화려한 곳을 동경합니다. 우리를 반겨주지도 않는 이들에게는 더 이상 가까이 다가서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거부감을 갖는 것은 오해와 무지 때문입니다. 이것 또한 어두움의 일부입니다. 거세게 거부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빛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앞으로 캠퍼스의 환경과 여건은 더욱 힘들어질 것이 충분히 예상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큰 빛을 캠퍼스 가운데 계속 비출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눈이 머무는 곳에 우리의 눈이 머물고 주님의 발이 향하는 곳에 우리의 발이 향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큰 빛이신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통해 세상에 빛을 비추고자 하셨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을 다니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물고기를 잡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초청하셨습니다. 19절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여기서 나를 따라오라는 말씀은 곧 이제부터 내 제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이나 기술을 전수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과 인격을 총체적으로 배우고 본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가 될 때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겠다고 예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는 어떤 사람입니까? 물고기는 물 속에서는 살고 물 밖으로 나오면 죽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물 속에 있으면 죽고 물 밖으로 나와야만 살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람을 낚는 어부란 죄와 죽음의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을 건져내어 구원하는 역사에 쓰임 받는 사람입니다. 마귀의 지배 아래 있던 사람을 해방시켜 하나님이 다스리스는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다니엘서 12장 3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니라” 예수님이 태양이라면 예수님의 제자는 그 빛을 받아 반사하는 샛별 같은 존재입니다. 이 부르심에 대해서 제자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부르심을 받자마자 제자들은 생업을 버렸습니다. 뒤이어 부르심을 받은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와의 혈연적 관계까지도 버렸습니다. ‘곧’이라는 부사는 그들에게 머뭇거림이나 주저함이 없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이 말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생업과 가족을 버려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부르심은 장차 사도가 될 12제자를 향한 특별한 부르심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12제자 외에도 70제자, 120문도가 있습니다. 부르심의 모양은 이처럼 다양하지만 핵심은 동일합니다. 버리지 않고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대가를 치르지 않고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제자를 부르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단순히 가장 뛰어나고 위대한 스승 정도가 아닙니다. 천국 백성을 다스릴 왕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로의 부르심은 왕의 부르심입니다. 왕이 부르실 때 누구든 당연히 지체하지 말고 따라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앞서서 예수님께서 이 어두운 세상을 비출 큰 빛으로 오셨음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넓고 빛을 비추어야 할 곳은 참 많으니 이를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은 짧은 3년 반 정도의 공생애 기간을 마치신 후 승천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면 그 이후에는 누구를 통해 세상에 빛을 비출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해답은 제자 양성이었습니다. 24시간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키워내 빛의 사자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그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요 양들의 선한 목자로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우리의 과제와 목표도 마찬가지입니다. 점점 더 어두워져 가는 세상 구석구석에 복음의 빛을 비출 제자들을 세워야 합니다. 복음 역사를 계승할 다음 세대 리더들이 세워져야 합니다. 제자 양성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빛을 비출 통로가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제자 양성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한 동안 반짝 빛을 비추다가 이내 수그러들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해야할 것들이 참 많이 있지만 그 중에 우선적인 과제가 바로 제자 양성입니다. 얼마 전 김세한 형제님이 전체 카톡방에 올린 공지를 보셨습니까? 학생과 미혼 학사들로 구성된 ‘러너스’의 탄생과 러너스의 찬양팀인 ‘하이예스’의 탄생을 알리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이름 자체가 꽤 의미심장합니다. 러너스란 배우는 사람들(Learners)과 뛰는 사람들(Runners)이라는 의미를 중의적으로 담고 있는 이름입니다. 누구를 배우는 사람들이겠습니까? 물론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위해 뛰는 사람들입니까? 그리스도의 빛을 어두운 세상에 구석구석 비추기 위해 뛰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제자도의 핵심을 잘 담아낸 이름입니다. 하이예스는 무슨 뜻일까요? 하이예스는 하나로 이루어진 예수님의 스피릿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스피릿으로 하나가 되겠다’ 이것 또한 예수님을 배우고 제자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이번에 우리 안암의 청년들에게 이렇게 의미 있고 멋진 이름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름만으로 그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 러너스가 이름에 걸맞게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며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둔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기 위해 열심히 뛰는 러너스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하이예스가 예수님의 스피릿으로 하나되어 예수님의 섬김을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큰 빛이신 예수님은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치유하심으로 세상에 빛을 비추셨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예수님은 처음에 양들이 있는 곳을 두루 찾아다니셨습니다. 먼저 찾아가는 방식으로 선교를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병을 고치셨습니다. 이 세 가지를 가리켜 예수님의 3대 사역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펴져 사방에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번에 예수님은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방식으로 선교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3대 사역 중 특히 치유 사역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은 왜 가르치시고 전파하시는 일과 병행하여 병자들에게 치유를 베푸셨을까요? 이는 치유가 천국이 이 땅 가운데 이미 임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죽음이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생명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천국이 임하였기 때문에 죽음의 부분 집합인 질병이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가르침, 전파, 치유는 이제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행하여야 할 세 가지 사역입니다. 우리 식으로 다시 표현하자면 성경 공부, 전도, 그리고 돌봄과 섬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즘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신OO의 성경 공부는 한 마디로 말해서 엉터리입니다. 얼마나 근거가 취약한지 개역개정판 성경을 쓰면 무너지기 때문에 신OO는 아직도 개역한글판 성경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전도 방식은 모략 전도라고 해서 정체를 교묘하게 숨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청년 대학생들을 파고들어 신자 수를 늘려올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요? 신OO를 빠져나온 사람들이 하는 말은 그들의 돌봄과 섬김 때문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눈이라도 빼어줄 것처럼 헌신적으로 챙겨 주기 때문에 마음이 녹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물론 나중에는 탈탈 다 털어갑니다. 우리가 바른 메시지를 전파하고 바르게 성경 공부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돌봄과 섬김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을 맛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에 무게가 실리게 될 것입니다. 신OO를 손가락질 하기에 앞서 먼저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이단이 거짓 빛으로 현혹하기 위해서 저렇게 열심을 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 빛을 비추기 위해 얼마나 열심을 내었던가 생각해 보면 부끄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돌봄과 섬김에 더욱 열심을 내어 진리의 빛을 온전히 세상에 비추는 역할을 힘있게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어둠의 권세가 물러가고,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사망의 권세가 무너지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어두운 세상 한 가운데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 경배와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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