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창무 2020. 5. 9.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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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11 강 메시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말씀 / 마태복음 7:13-29
요절 / 마태복음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오늘 말씀은 산상수훈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그동안 배운 산상수훈 말씀이 얼마나 은혜로왔습니까? 그러나 산상수훈 말씀이 아무리 은혜로와도 듣는 것으로 만족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이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행함의 중요성을 가르치시기 위해 세 가지 비유를 제시하셨습니다. 문의 비유, 나무의 비유, 건축자의 비유입니다. 각각의 비유에는 어떤 메시지가 있을까요?

첫째,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생명을 얻습니다. 13, 14절을 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은 어떻게 하라는 말씀일까요? 중세 수도사들처럼 금욕을 하고 고행을 실천하라는 뜻일까요? 여기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것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산상수훈 말씀대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그 문이 좁으며 길이 협착하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고 힘들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 “원수를 사랑하라”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 말은 참 멋있지만 실제로 이렇게 살아가기는 힘이 듭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로 이 말씀에 순종하려면 자신과의 싸움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이 말씀들을 거부하고 거스릅니다.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말씀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말씀대로 살고자 하면 주위의 압박이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왜 너만 그렇게 유별나게 살려고 해?” “왜 너는 우리랑 같이 어울리지 않는거야?” 이런 식의 말을 듣게 되고, 왕따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찾는 이가 적은 길이기 때문에 외롭습니다. ‘정말 이 길로 가도 괜찮을까?’ 은근슬쩍 불안해지기도 합니다. 반대로 큰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로 가면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아 보십시오. 그러면 자기와의 싸움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성이 원하는 대로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됩니다. 아주 쉽고 편한 길입니다.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아주 많기 때문에 외롭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습니다.

어디로 들어가는 편이 좋을까요? 자동차 네비에도 ‘큰 길 우선’이라는 옵션이 있습니다. 무조건 큰 길로 가야하지 않을까요? 안 됩니다. 큰 일 납니다. 쉽고 편한 것보다 그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큰 길 우선’도 좋지만 만약 그 네비가 우리를 벼랑 끝 사지로 인도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큰 문,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 협착한 길로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좁은 문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지만, 큰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형식 논리로만 보면 우리 앞에 두 개의 문이 있어서 그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존적으로는 하나의 문 밖에 없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말만 문이지 아무도 들어가서는 안 되는 문입니다. 그 넓고 큰 문은 처다 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말씀과 무관하게 자기 본성을 따라 살면 어떻게 됩니까? 영성이 죽고 믿음이 죽습니다. 결국 죄악의 쓰디쓴 열매만 남기게 됩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길 외에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이 길만이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여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배우고 성장하는 기쁨을 얻습니다. 믿음의 비밀을 알게 되고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최종적으로 영생을 누리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좀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생명이 있는 좁은 길,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그 길 끝에서 우리를 두 팔 벌려 맞이할 준비를 하고 계신 주님 품에 안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어야 천국에 들어갑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여기서 거짓 선지자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선지자는 본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이를 대신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대통령의 말을 대신 전하는 청와대 대변인 같은 역할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자기 말을 하는데 그 말이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양 포장을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는 거꾸로 큰 문, 넓은 길로 들어가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는 자기를 긍정하고 십자가는 던져 버리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뜻이라고 강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혹해서 넘어갑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듣고 싶은 말, 듣기 좋은 달콤한 말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삼가라 곧 주의하여 분별하라고 하신 것은 거짓 선지자들을 식별해 내기가 그만큼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이들이 양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이들은 아주 선량하고 친절해 보입니다. 양들을 위해 열심히 사역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있습니다. 미소 뒤에 이빨을 숨기고 있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돈이나 권력, 명예를 얻는 것입니다. 결국 거짓 선지자들은 양들에게 이 모든 것을 탈탈 털어갑니다. 그것으로 자신을 배부르게 합니다. 오늘날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구O파나 신O지와 같은 이단들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성경을 왜곡한 거짓 진리를 그럴 듯하게 포장하게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처음에는 친절하고 사랑이 넘치는 천사처럼 다가가 사람들을 포섭합니다. 그러나 후에는 신도들을 심리적으로 착취하고 그들이 낸 헌금으로 이단 교주의 금고를 채웁니다. 그런데 이런 이단들은 그 정체를 이미 다 드러냈기 때문에 도리어 주의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정통 교단 안에 버젓이 머무르면서 그 정체를 감추고 있는 거짓 선지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우리 나라에서는 기복 신앙, 북미에서는 번영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전파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 믿으면 복을 받고 번영하고 출세하고 성공하게 된다는 메시지만을 줄기차게 부르짖습니다. 죄와 회개, 자기 부인과 제자도에 관련된 부담스러운 메시지는 전하지 않습니다. 산상수훈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이들은 결국 사람들을 큰 문, 넓은 길로 이끌어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는 이런 거짓 선지자를 조심해야 합니다.

문제는 ‘무엇으로 거짓 선지자인지 여부를 식별할 수 있을까?’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16, 20).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는 없습니다.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한 못된 나무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찍혀 불에 던져져 땔감으로나 쓰일 뿐입니다. 이 말씀대로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아름다운 열매, 나쁜 열매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21절을 보십시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 말씀을 보니 ‘아름다운 열매’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행실의 열매입니다. 산상수훈 말씀 속에 나타난 천국 백성의 수준 높은 윤리를 따라 사는 삶입니다. 반면 ‘나쁜 열매’란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저급한 윤리 수준에 머무는 삶입니다. 윤리적인 삶, 행실의 열매를 맺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수님은 예수님께 ‘주여 주여’ 하는 어떤 사람들을 예시로 드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했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기도 한 사람입니다. 남다른 은사를 받았고 큰 업적도 남겼습니다. 만약 천국에 순서대로 입장한다면 이 사람들은 몇 번째로 들어갈 사람들일까요? 아마도 패스트 트랙에 올라타 가장 먼저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23)” 아무리 많은 업적을 남기고 큰 능력을 발휘했다고 해도 예수님이 모른다 하시면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천국의 법을 따라 살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파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 여행을 보내시면서 바로 이 세 가지를 행하도록 명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고 선교하고 제자를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산상수훈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로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더 나은 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보편적인 윤리 수준과는 아예 클래스가 다른 천국의 윤리를 세상에 나타내는 것입니다. 제가 아주 어릴 때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 하나가 있습니다. 동네에서 누군가 쌀을 꾸러 오면 외할아버지는 외삼촌에게 그 집이 교회에 다니는 집인가를 물으셨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고 두 말없이 쌀을 빌려 주셨습니다. 제 외할아버지는 예수님을 전혀 믿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그래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믿으셨습니다. 오늘날에는 어떨까요? 이런 일이 지금도 일어날 수 있을까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한국 교회의 윤리 수준이 세상보다도 못하다는 말까지 듣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교인수가 늘고 더 큰 예배당을 짓는 일에만 너무 매달렸었기 때문 아닐까요? 그에 비해 내가 산상수훈 말씀대로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 아닐까요? 여기서 우리만 예외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좀 더 나을 수는 있겠습니다. 하지만 산상수훈의 수준에 이르려면 아직도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더 거룩해야 하고 더 사랑해야 합니다. 물론 천국은 우리의 행위로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런데 참된 믿음이 있다면 행하게 됩니다. 듣고서도 행하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큰 믿음이란 큰 업적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큰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말씀에 순종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이 말씀 속에 평행 관계를 보면 반석은 예수님의 이 말 곧 산상수훈 말씀이요 집을 짓는다는 것은 듣고 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일까요?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와디’라는 독특한 지형이 있습니다. ‘와디’는 건기에는 말라붙어 있다가 우기에만 형성되는 강을 이르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건기에 강바닥 모래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기초 공사가 수월하기 때문에 금방 적은 비용으로 집을 지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지혜롭다고 칭찬했습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기초 공사하느라 시간도 많이 걸리고 돈도 많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미련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기가 찾아와 갑자기 폭우가 내리고 강물이 불어났습니다. 모래 위에 지었던 집은 강물과 함께 다 쓸려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반석 위에 지었던 집은 끄덕 없었습니다. 누가 미련하고 누가 지혜로운 자입니까? 이 비유에서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것은 갑작스럽게 닥치는 인생의 어려움과 위기를 가리킵니다. 말씀 외에 다른 것, 예를 들어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에 인생 기초를 놓았던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의지하던 것들을 잃는 순간 인생 자체가 함께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설령 인생의 위기를 요리 조리 잘 피해 나갔다 하더라도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반면에 예수님의 말씀 위에 인생 기초를 놓았던 사람, 말씀을 듣고 행하기에 힘썼던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인생의 풍파가 이리저리 휘몰아쳐 와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굳건한 반석처럼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지막 심판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 협착한 길을 가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려면 오랜 시간에 걸쳐 인내해야 합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으려면 많은 수고가 필요합니다. 세상 은 이 사람을 미련한 바보라고 조롱할 지 모릅니다. ‘말씀을 잘 들었으면 되었지 뭘 그렇게 힘들게 행하려고 애쓸 필요가 있냐?’며 답답하게 여길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마치 전지구적으로 코로나 위기가 닥치자 각 국의 방역 능력이 검증을 받게 된 것과 비슷합니다. 선진국인 줄 알았는데 허당인 나라도 있고, 별 볼 일 없나 했는데 알고 보니 내실 있는 나라도 있습니다. 교회와 개인도 검증을 받고 있습니다. 평소 말씀을 듣고 준행하는 일에 힘썼던 교회와 개인은 코로나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즐기기만 하고 준행하는 일에 소홀했던 교회나 개인은 흔들리고 비틀거리다 쓰러질 지 모릅니다. 오늘로 마태복음 산상수훈 말씀은 끝이 납니다. 그러나 끝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들은 말씀은 행함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행하지 않으면 모래성을 쌓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듣고 행함으로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음으로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을 지혜로운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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