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

이창무 2020. 5. 24.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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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13 강 / 이창무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

말씀 / 마태복음 8:18-34
요절 / 마태복음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권력과 권위의 차이점에 들어보셨습니까? 막스 베버는 권력이란 자신의 뜻대로 하게 할 수 있는 강제력이고 그 권력에 따르는 것이 정당할 때 권위가 된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권위를 권세라고 부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권세를 사람과 자연 세계와 영적 세계, 이 세 가지 측면에서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에게 어떤 권세들이 있을까요?

첫째로, 예수님은 사람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실 권세가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아이돌 스타가 나타나자 벌떼처럼 몰려드는 팬들처럼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 주위를 에워쌌습니다. 이때 한 서기관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서기관은 당시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엘리트 지식인이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예수님께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서기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자청했습니다. 얼마나 기특한 일입니까? 예수님은 그에게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삶이 가난한 삶, 안정적이지 못한 삶,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역시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에게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서기관이 품고 있는 헛된 꿈과 환상을 깨트리기 위해서입니다. 서기관은 예수님이 어디서나 팬덤을 몰고 다니시는 것이 부러웠습니다. 서기관은 예수님을 따라가 그 노하우를 다 전수받고 싶었습니다. 그후 독립하면 자기도 예수님 못지않은 큰 인기를 누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장미 빛 환상만으로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을까요? 인기가 사라졌을 때, 고난이 닥쳐왔을 때, 희생을 감수해야만 할 때 이 서기관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큰 실망입니다. 이럴 줄 몰랐습니다. 내가 여기 말고 갈 데가 없는 줄 아십니까?” 이런 사람은 결국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고 도중에 낙오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나를 따르려면 안정된 삶을 포기해야 한다. 고난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배척 받고 쫓겨날 각오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가는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를 따를 수 있겠느냐?”

21절을 보십시오. 이번에는 이미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 중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청했습니다.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 제자의 말은 ‘제게 연로한 아버지가 있으니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부양을 하다가 돌아가시면 장례를 잘 치룬 후 다시 돌아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가요? 만약 한 사람의 인생이 죽음으로 모두 다 끝이 난다면, 이미 죽은 사람을 곧 그 뒤를 따라 죽을 사람들이 장사 지내는 일만큼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니라면, 죽음 이후 부활과 영생이 있다면 어떻습니까?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는 일보다 죽음 너머 부활과 영생을 누리게 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는 죽음을 뒤처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베드로를 부르셨을 때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셨던 말씀이 바로 이 부르심입니다. 물론 가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할 수 있는 한 이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 제자로의 부르심보다 더 앞설 수는 없습니다. 본문의 이 제자가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는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까요? 그 다음에는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어머니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계속 미루고 또 미루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자기도 무덤에 들어가게 되고 누군가 그의 장례를 치러 줄 것입니다.

지금까지 본 이 두 사람을 생각하면 참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듭니다. 한 사람은 제자가 되고자 하는 소원이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이미 제자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고비를 넘지 못하고 낙오하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자 한 영혼의 목자’ 정말 아름답고 흠모할 만한 합니다. 이 길은 가장 의미 있고 보람 있는 길입니다. 동시에 고난과 아픔이 따르는 길입니다. 희생과 수고와 헌신이 필요합니다. 여유 있고 안정된 삶은 포기해야 할 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에게서 무시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캠퍼스 폴리스에게 쫓겨날 수도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가족에 대한 의무와 예수님의 부르심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적대적인 가정에서 내가 제일 처음 믿게 되었다면 가족들의 반대가 불길처럼 일어날 것이 뻔합니다. 부르심을 따라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하면 가족들이 어떻게 반응할까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안 된다고 할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심지어 믿는 부모라도 그렇게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가지 고난이 있고 가족과의 충돌이 있을 수 있으니 제자도를 포기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부르심을 외면해야 할까요? 우리 나라에서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동원 대상에 포함된 사람에게 소집 명령이 내려집니다. 그러면 지체없이 지정된 부대로 입영해야 합니다. “고생할 것 같아서 안 갈래요.” “신혼이라 못 가요.” 이런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국민이 국가의 부름에 응답할 의무가 있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의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최전선에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언제든지 “Yes, Sir”하고 응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의 부르심이며, 사람을 살리기 일에 쓰시고자 하시는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각오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예수님의 부르심을 최우선 순위에 놓고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도 순종 시킬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앞의 두 사람들과 달리 제자들은 낙오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결국 예수님과 한 배를 타고 예수님이 지시하시는 방향을 따라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갑자가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미친 듯이 바람이 불고 집채만 한 거대한 파도가 배를 삼키려는 듯 몰아 닥쳤습니다. 아무리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 출신들이라 하더라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폭풍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멘탈이 붕괴되고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고물을 베개 삼아서 곤히 잠을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잠을 잘 수 있습니까? 여기서 죽지 않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흔들리는 배를 요람 삼아서 깊은 잠을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넋이 나간 제자들은 다급하게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깨어나신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믿음이 아예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상황 속에서 무서워하지 않을 정도의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앞에 두 사람이 중도 탈락하는 것을 보고 자신들에게 큰 믿음을 있는 줄 알았습니다. 이것은 착각이었습니다. 거센 풍랑을 만나자 믿음이 바닥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곧이어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자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방금 전까지도 으르렁거리던 바람과 파도가 잠든 강아지처럼 온순해졌습니다. 눈 앞에서 보고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이제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이 엄청난 분이고 대단하신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었습니다. 예수님이 전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순간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성에 처음으로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람과 바다를 순종시키는 것은 바람과 바다를 창조하신 창조주만이 할 수 있는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제자의 인생은 예수님과 함께 떠나는 여행길이라고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 길에도 거센 풍랑이 몰아칠 때가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예수님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순풍에 돛 단 듯 갈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기치 않게 이런 풍파를 만나면 두려움에 빠집니다. 이러다가 죽을 것 같습니다. 이때 우리는 얼른 주님이 나서서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는 힘들어 죽겠는데 주님께서 주무시고 계신 것 같습니다. 섭섭하고 당황스럽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왜 제자의 인생 가운데 이런 풍랑을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풍랑 속에서 기도를 배우기 때문입니다. 평소 기도를 안 하던 사람도 풍랑을 만나면 기도를 합니다. 이것을 계기로 기도의 세계에 한 걸음 더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둘째, 풍랑 속에서 자기 믿음의 한계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평온할 때는 믿음이 좋은 줄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풍랑이 오면 내 믿음이 겨우 이 정도였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겸손히 더 배우고 성장해야 하겠다는 문제 의식을 갖게 됩니다. 셋째, 풍랑 속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새롭게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새롭다는 것이 아예 몰랐다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 속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존적으로는 와 닿지 않았던 예수님에 대해 정말 그런 분이셨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풍랑이 우리 눈을 열어 주는 계기가 됩니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갑자기 우리에게 닥친 거센 풍랑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왜 이 일을 허락하셨는지는 아직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 한 가지는 확실히 압니다. 지금은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내 믿음을 점검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이 풍랑이 지나간 후에 우리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새롭게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바이러스도 주님이 지으신 세상의 일부입니다. 주님께서 이 풍랑을 속히 잠잠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기도를 배우고 믿음이 성장하고 주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귀신들을 내어 쫓으실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제자들이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도착했습니다. 이곳 바닷가는 이상하게 인적이 없고 썰렁했습니다. 왜냐하면 근처에 귀신 들린 두 사람이 거처하는 무덤이 있었는데 그들이 너무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보자 마자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그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을 지배하는 귀신의 말이었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귀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귀신 같이 알고 있었습니다. 아울러 사탄이 불 못에 던져지게 될 최후의 심판 때 자기들도 함께 멸망 당할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오시는 바람에 이렇게 일찍 멸망 당해야 하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습니다. 귀신들은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한다면 돼지 때에게 새 보금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를 허락하셨습니다. 귀신들이 돼지 때에게 들어가자 갑자기 돼지들이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미쳐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곧 이어 비탈길로 내리달아 수천 마리의 돼지 떼가 갈릴리 바다에 빠져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은 금새 가다라 TV 뉴스에 특보로 전해졌습니다. 이에 대한 가다라 지방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귀신 들렸던 사람 둘이 온전하게 된 것을 기뻐했을까요? 이제 해안길을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게 된 것을 반가와 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론은 희생된 돼지 떼 이천 마리의 경제적 가치를 주목했습니다. 이후 벌어질 지 모르는 지역 경제 붕괴 사태에 대한 깊은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예수님은 강력한 영적인 권세로 귀신 들렸던 사람들을 구원하셨지만, 결국 그 곳 사람들에게서 배척과 추방을 당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본 대로 예수님은 보이는 자연 세계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모두 다 다스리시는 권세자이십니다. 사람들은 쥐꼬리만한 권세만 있어도 자기를 위해 쓰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엄청난 권세를 오직 사람을 구원하고 회복시키는 일에만 사용하셨습니다. 정작 자신은 머리 둘 곳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너는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며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과 한 배를 타고 가자고 하십니다. 그 항해 도중 우리는 거센 풍랑을 만날 수도 있고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 모든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내가 이전에 알지 못했던 예수님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사람을 구원하고 회복하는 일에 동참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 부르심에 순종으로 응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항해를 마치고 건너편 저 천국에 이를 때까지 주님을 더욱 깊이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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