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창무 2020. 6. 7.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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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14 강 / 이창무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말씀 / 마태복음 9:1-17
요절 / 마태복음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논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논쟁을 싫어합니다. 논쟁은 피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차례로 논쟁을 벌이십니다. 이 논쟁때문에 예수님께 적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논쟁 덕분에 예수님이 무엇을 위해 세상에 오셨는지를 선명하게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죄를 사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 가셨던 예수님께서 본 동네 곧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1). 이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습니다(2a). 예수님께서 ‘작은 자야’라고 부르신 것을 보면 그는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아직 젊은 나이에 전신마비가 왔으니 친구들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웠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라면 친구의 중풍병을 반드시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나요(6)? 예수님은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2b). 사람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씀에 놀랐습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습니다. 당시 종교 경찰 노릇을 하던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사함을 선포할 수 있느냐! 이는 신성 모독죄로 사형감이다.’하면서 수군거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어느 것이 쉬울까요? 정답은 '둘 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둘 다 오직 하나님께는 가능하다' 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 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의 권세를 받으신 분이심을 입증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중풍병자는 이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리를 벌떡 일어나 자기가 누웠던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무리들은 크게 놀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두 가지 질문을 떠올리게 합니다. 첫번째 질문은 ‘왜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치유에 앞서 먼저 죄사함을 선포하셨을까?’입니다. 그 이유는 중풍병과 같은 질병이 증상이라면 죄는 그 근본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는 죽음도 질병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서 그 결과로 질병과 죽음이 함께 들어왔습니다. 해열제로 열을 내리게 할 수는 있지만 열병을 치유할 수는 없습니다. 병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를 없애 버려야 완치가 될 수 있듯이 질병과 죽음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죽음의 증상을 완화시키려고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원인을 되는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두번째 질문은 ‘예수님은 어떤 근거로 죄사함을 선포하셨을까?’입니다. 구약에서 죄 사함을 받으려면 제사를 드려야 하고, 제사를 드리려면 성전과 제물과 제사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중 단 하나도 없는 곳에서 예수님이 죄사함을 선포했으니 서기관들의 이의제기가 그렇게 무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이 모르던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성전과 제물과 제사장이 다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이십니다(요2:21).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요1:29).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십니다(히7:15).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려 영원한 속죄 제사를 이루셨습니다(히9:12). 그러므로 예수님 한 분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으면 어떤 죄인도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죄짓고 못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불안과 가책으로 고통을 당하게 되기 때문에 지은 죄는 반드시 털어놓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전에 무한도전에서 정준하가 재수생이었던 시절 먹었던 짜장면 값을 내지 않고 도망쳤던 사연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몇 푼 안 되는 돈이었지만 정준하는 20년 동안이나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작진이 당시 중국집 주인을 수소문 끝에 찾아내 스튜디오로 데려왔습니다. 정준하를 본 사장님의 첫 마디는 이랬습니다. “나를 찾아줘서 고맙소. 이렇게 성공해 줘서 고맙소. 그때는 다 그런거야.” 이때 오랜 세월 묵혀온 감정이 폭발한 정준하는 말을 못하고 눈물만 줄줄 흘렸습니다. 그 악랄하다던 박명수조차 숨어서 눈물을 찔끔거릴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멀리 도망친 사람에게도 근원적인 죄의식이 있습니다. 설령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죄짐으로 인한 영혼의 눌림을 피할 수 없습니다. 양심의 가책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행으로 죄를 덮으려고 합니다. 또는 고행을 해서 죄값을 치르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 남 탓을 해 버립니다. 사회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고, 부모님이 날 이렇게 만들었다고 강변합니다. 아니면 아예 죄의 기준을 바꿉니다. 요즘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 나온 한 대사가 유행이라고 합니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불륜을 사랑으로 둔갑시키듯 죄를 더 이상 죄가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시도들이 성공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책임을 전가하고 죄를 덮어버리거나 합리화하려고 해도 죄의 흔적과 상처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죄는 사함을 받아야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선포하십니다. “아들아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죄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눈 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것이 교회로 와서 이 죄사함의 선포를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죄사함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길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를 통해 죄짐에 눌려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죄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죄로 병든 자들을 고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세리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세리는 상종해서는 안 될 사람, 공공의 적, 인간 말종, 사회의 암적 존재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마태 앞에 침 한 번 뱉고 그냥 지나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를 주목해서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은 제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어떤 스승이 이런 사람을 제자로 삼는다는 말입니까? 스승의 이름에 먹칠을 할 것이 뻔한 제자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다는 것은 마태의 죄를 용서하시고 더 이상 지난 과거를 문제 삼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 부르심에 대한 마태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마태는 그 자리에서 세리 직업을 박차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마태는 이 부르심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알았기에 주저하거나 않았습니다. 마태는 이 은혜에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예수님을 집으로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 이 자리에는 마태의 동업자였던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함께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은 마음이 몹시 불편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을 붙들고 따지듯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제자들을 대신해 예수님께서 답을 주셨습니다. 12, 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의사에 비유하셨습니다. 의사가 빛을 발할 때가 언제입니까? 병든 사람을 만났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의사는 병든 사람을 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병든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갑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건강한 사람, 의로운 사람을 부르러 오지 않으셨습니다. 세리 마태와 같이 죄로 인해 깊이 병든 사람을 부르기 위해 오셨습니다. 어디로 부르십니까? 메시아의 구원의 잔치로 부르십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식탁 교제로 부르십니다.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죄인들의 죄 없으신 친구이십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도록 찾으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죄로 깊이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위대한 영적 의사이십니다.

어떤 집단이나 어떤 사회이든 세리 마태 같은 사람은 항상 있습니다. 깊이 병들어 문제가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가기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요즘 군대에서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 폐급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풀어 쓰면 폐기를 해 줘야 할 등급이라는 뜻입니다. 마치 미리 약속이나 한 듯이 그 어디에도 이런 사람을 끼워주지 않습니다. 같이 밥 먹을 사람도 없어 강요된 혼밥을 해야 합니다. 당사자는 얼마나 힘들고 괴로울까요? 그래도 결국 자업자득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일까요? 나까지 한 묶음으로 취급을 당하지 않으려면 무조건 피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왜 달라야만 합니까?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건강한 사람, 의로운 사람과만 함께 하고자 한다면 안전하고 편할 수 있습니다. 우리끼리 모여서 적당히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모습을 보시고 이렇게 선언하실 지 모릅니다. “쓸 데 없느니라” 정말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병든 사람과 함께 할 때 쓸 데 있습니다. 밖에 있는 죄인을 부르고 있을 때 쓸 데 있습니다. 사실 건강한 사람, 의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병든 자이며 죄인입니다. 다만 예수님께 고침 받는 중이며 죄를 용서받고 의롭게 여기심을 받았을 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께 긍휼하심을 입었으니 긍휼을 베푸는 자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무조건적인 환대를 받았으니 우리도 누구라도 무조건 환대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구원의 잔치를 열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금식은 경건 생활의 기본 아닙니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결혼식에 가서 금식하는 법은 없습니다. 만약 결혼식에서 기뻐하지 않는 손님이 있다면 그는 신부의 전 애인일 가능성이 큽니다. 결혼식은 축제의 날, 기쁨의 날입니다. 이 비유에서 신랑은 예수님, 혼인집 손님들은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은 마치 혼인 잔치와 같습니다. 이 날은 하늘과 땅이 만나서 새 언약이 맺어지는 날입니다. 마땅히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새로운 시대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 시대의 사고 방식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문제를 두 가지 비유를 통해 드러내셨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기운 것이 그 낡은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됩니다. 생베 조각, 새 포도주는 예수님과 더불어 시작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삶을 가리킵니다. 그 삶의 내용물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 죄사함의 기쁨을 주고 활력을 줍니다. 복음은 새 포도주처럼 그 안에 생명이 있어서 팽창하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구 시대에 속한 전통과 관습으로 억제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유연하고 탄력 있는 사람만이 생명과 기쁨이 충만한 예수님의 복음을 온전히 담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잔치하는 곳입니다. 교회 가는 것은 흥겨운 잔칫집에 가는 것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축제를 벌이기 위해 가는 것입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인상 쓰며 가는 곳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구원의 잔치를 벌이기 위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죄사함의 기쁨과 감격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죄로 병들었던 사람이 치유되고 회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새 포도주가 부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쁨과 생명이 충만한 공동체를 이루고 병든 자, 죄인들을 찾아 죄사함의 복음을 힘입게 전파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죄사함과 기쁨, 생명을 주시기 위해 저 높고 높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오신 죄인들의 죄 없는 친구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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