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전도 여행 보내신 예수님

이창무 2020. 6. 21.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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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16 강 / 이창무

전도 여행 보내신 예수님

말씀 / 마태복음 10:1-42
요절 / 마태복음 10:7,8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오늘 말씀은 전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전도는 참 부담스러운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전도에는 고난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도 앞부분은 전도, 뒷부분은 고난과 박해에 관한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만 따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전도를 통해서 우리는 믿음과 인내를 배우며 열매를 맺고 주님의 인정과 칭찬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께 전도에 대해 배우고 또 실제 현장에서도 전도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전도자로 준비시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예수님께서 추수할 일꾼으로 소집하신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열두 제자입니다. 그들은 이제껏 예수님을 따르며 배워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천국 복음이 무엇인지 배웠고 목자 없는 양들을 향한 긍휼의 심정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전도는 말과 배운 지식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복음의 능력을 함께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또한 보내실 때 크게는 열두 명이 다 함께, 작게는 두 명씩 짝을 지어 움직이도록 하셨습니다. 왜 한 명씩 따로 보내지 않으시고 둘 씩 보내셨을까요? 이는 전도는 혼자 힘으로 하기 어렵고 동역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전도를 혼자서 가면 위축이 되어서 커피만 마시고 돌아오기 쉽습니다. 그러나 둘이 가면 힘이 나고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열두 제자를 전도자로 준비시키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구체적인 전도 전략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전도 대상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으로 특정해 주셨습니다(6). 물론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길 원하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우선권과 제자들의 현재 수준을 고려할 때 단계적인 접근이 필요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과 치유와 회복하는 일을 하도록 사역의 방향을 설정해 주셨습니다(7,8a). 이 일들은 모두 이제까지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일입니다. 이제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대리자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전도에 필요한 자원들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들로부터 공급받도록 하셨습니다. 전도자는 거저 받은 은혜를 나누는 사람이기에 거저 주어야 합니다(8b). 그렇다고 해서 필요한 자원을 자신이 다 챙겨가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9,10). 그렇게 하면 기동성이 떨어져서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에 부딪치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전도한 성이나 마을에서 합당한 자, 곧 천국 복음을 영접한 자를 찾아내어 그 집에서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셨습니다. 

넷째, 예수님은 전도자를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미련없이 떠나도록 명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다 영접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전도자에게 문제가 있거나 복음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전도자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했는데도 영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복음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 때문에 위축되거나 복음 자체를 변질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전도의 출발점이 어디일까요?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열심일까요? 아닙니다. 전도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이 마음이 없다면 아예 전도는 시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심정만으로 전도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전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치밀한 준비와 전략이 필요합니다. 먼저 지식과 능력을 구비하고 합심하여 동역할 사람들을 준비시켜야 합니다. 또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전략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어떤 전략이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준비면에서 부족한 것 투성이 입니다. 나름 예수님을 배우는 제자로 살려고 했지만 복음을 잘 알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양들의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능력도 부족합니다. 막상 전도를 하려 하면 다들 너무 바쁘고 피곤해서 전도할 시간도 없고 함께 전도할 사람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최근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이후 사람들은 대면 접촉을 기피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게다가 바이러스 전파 과정에서 종교 단체 문제가 불거지면서 전도자에 대한 기피 심리가 더욱 팽배해져 있습니다. 이렇게 변화하고 있는 사회 속에서 어떤 전도 전략을 세워야 할까요? 몇 달 전부터 전도부에서 전도 TFT를 만들어 이 문제를 의논해 왔지만 아직까지 뾰족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딱 부러지게 ‘이것이다’ 하면서 내놓을 만한 전도 전략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할까요? 전도를 포기해야 할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해야 합니다. 본문의 제자들도 모든 것이 다 완성되었기 때문에 파송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부족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하다 보면 점점 더 역량을 키워 나갈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더 생각할 점은 전도 전략을 세우는 주체가 우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전도 전략을 세운 주체는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를 보면 전면에는 사도들의 행적이 나타나 있지만 그 사도들을 이끄신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전도 전략을 일러주실 분 역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성령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예수님과 복음을 더 잘 배우게 하시고 주님 주시는 권능을 덧입게 하시고 전도를 위한 동역의 그릇이 이루어지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변화하고 있는 시대 속에서 변치 않는 복음을 힘있게 전할 지혜와 전략을 허락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전도자가 끝까지 견디면 구원을 받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전도 여행 보내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은 마치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 같았습니다(16). 여기서 양은 아직 어리고 연약한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리’란 전도자를 핍박하는 복음의 대적들을 가리킵니다. 이들 배후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전파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는 대신 자기 왕국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이에 사탄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비롯한 초대 교회 성도들은 유대인들로부터 회당에서 채찍에 맞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이방인들로부터 재판정에 서고 투옥되는 박해를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가장 가까운 가족들로부터 고발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때 전도자는 어떤 심정이 들기 쉬울까요? 

첫째, 당황하기 쉽습니다. 복음이란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면 모두에게서 환대를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돌아오는 것은 미움과 박해입니다. 도무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가 되지 않고 받아들 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당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으셨습니까? 권능으로 사람을 살려 놓았더니 귀신의 왕이라는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결국 모두에게 미움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 미움과 박해를 받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오히려 이때 예수님의 제자로 인증을 받은 것으로 여기고 자랑스러워야 마땅합니다. 

둘째, 염려하게 쉽습니다. 막상 내가 박해를 받아 사람들 앞에 서게 되면 주눅이 들어 아무 말도 못할 것 같은 염려가 듭니다. 하지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상황이 되면 성령님께서 그 순간 할 말을 입에 넣어 주십니다. 그대로 말만 하면 됩니다. 내가 그 때 어떻게 그런 말을 했을까 스스로 대견하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셋째, 사람을 두려워하기 쉽습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사람들과 불화와 갈등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다수로부터 왕따를 당할 수도 있고 권력자에게 찍혀서 내내 시달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면 점점 더 사람이 두려워집니다. 무서워 복음의 ‘복’ 자도 꺼내지 못하게 됩니다. ‘아무도 내가 믿는 자인지 모르게 하라’는 모토로 삼고 두더지 같은 신앙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런 신앙 생활은 두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째 이런 신앙생활을 하면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됩니다. 제자를 맛을 잃은 소금이 되게 합니다. 둘째 자신의 신앙 양심을 다치게 합니다.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게 하고 마침내 구원의 확신까지 흔들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언젠가 다 밝혀 지기 마련입니다. 결국에는 전도자의 말과 생각이 참되고 옳았다는 것이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또 사람이 아무리 박해를 해봐야 몸을 죽일 수는 있어도 영혼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몸과 영혼을 다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누구를 더 두려워해야 마땅합니까?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한갓 미물인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그냥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하물며 참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당신의 자녀들을 하나님이 모른 채 하시겠습니까? 자녀의 머리카락 하나까지 다 세고 계신 하나님께서 눈동자와 같이 지켜 주시고 최후 승리를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전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어보니 어떻습니까? 전도가 참 쉽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박해를 당하고, 사람들과 불화와 갈등을  겪는 일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자에게 그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22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바로 인내입니다. 전도자의 고난을 끝까지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인내가 없다면 아무리 말을 잘하고 은사가 있어도 전도를 지속적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전도에는 쉽고 편한 길, 왕도가 없습니다.

예전에 제가 특송을 섬길 때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종종 있었습니다. “너무 떨려서 도저히 못하겠어요.” 그때마다 저는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떨지 않을 방법을 알려 드릴까요? 떨지 않을 때까지 계속 특송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전도가 이와 같습니다. 전도를 하려고 하면 떨립니다. 양들의 매몰찬 거절에 상처를 받을까 두렵고 캠퍼스 폴리스를 만나 쫓겨날까 두렵습니다. 

잘 아는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은 쉬울까요? 이 또한 내 정체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부담이 있습니다. 괜히 전도했다가 기존의 좋았던 관계성이 어그러질까 염려가 들기도 합니다. 어떤 전도이든 당황스럽게 하고 염려하게 하고 두렵게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떨지 않을 때까지, 당황하지 않고 염려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을 때까지 계속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계속 전도해서 아예 전도가 우리 삶의 일부가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때 꾸준히 계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쩌다 한 번 하면 이전에 했던 경험은 리셋이 되어서 처음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우리 가운데 전도를 잘 하신다고 소문이 난 분들이 몇 분 계십니다.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말을 잘 하시는 분들일까요? 남 다른 노하우를 알고 계실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가장 큰 특징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꾸준히 계속 전도하신다는 점입니다. 

그 중 한 목자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내가 전도하는 이유는 전도 그 자체가 나를 살리기 때문입니다.” 전도를 통해서 우리는 신자로서 정체성을 확인하고 믿음의 담대함을 배우고 예수님의 긍휼을 배우고 인내의 성품을 키워 나갈 수 있습니다. 수많은 환자들을 돌보며 임상 실습을 거쳐야 의사가 될 수 있듯이, 우리는 전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닮은 긍휼의 목자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전도가 어렵지만 그래도 꾸준히 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를 통해 양들을 살리고 더 나아가 내가 살아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전도자를 영접하는 사람이 상을 받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오직 전도자를 거부하고 박해하는 사람만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전도자를 영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단지 사람을 영접하는 차원을 넘어서 예수님과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상급이 있습니다. 전도자를 선지자처럼 영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습니다. 전도자를 의인으로 영접하면 의인의 상을 받습니다. 하다못해 전도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을 하면 상을 잃지 않습니다. 이처럼 전도자는 하늘의 상급이 세상에 미치게 하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직분입니까? 

그 뿐만이 아닙니다. 전도자를 영접하기만 해도 이렇게 큰 상급을 누리게 된다면 전도자 본인은 얼마나 더 큰 상급을 받겠습니까? 고난과 박해를 마다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최전선에 서서 싸운 전도자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복을 내려 주시겠습니까? 전도의 성공과 실패에 너무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성공과 실패는 주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주님이 주시는 상급과 축복에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를 하늘의 상급을 받아 누릴 추수할 일꾼으로 불러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어디인가에 익은 곡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믿고 우리가 전도에 도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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