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쉬게 하리라

이창무 2020. 6. 28.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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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17 강 / 이창무

쉬게 하리라

말씀 / 마태복음 11:1-30
요절 /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보그라는 잡지에서 보는 순간 기분을 업 시켜 주고, 가족, 친구, 선후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 관계를 돈독하게 해 주는 마법의 카드가 있다는 기사를 낸 적이 있습니다. 그 마법의 카드가 무엇일까요? 바로 ‘리액션’입니다. 좋은 리액션의 사례로 만났을 때 뛸 듯이 반가워하기, 대박, 짱, 최고라는 표현을 많이 하기, 선물 받았을 때 제대로 놀라기, 내 생각도 그렇다고 맞장구 쳐주기, 음식을 먹고 맛있다며 흥 폭발하기 등을 제시했습니다. 예수님도 리액션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어떤 리액션을 하느냐에 따라 천국에 들어갈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리액션이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리액션일까요?

첫째로, 적극적으로 쟁취하고자 하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반응을 첫번째로 살펴볼 사람은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 왕에 의해 억울하게 옥에 갇혀 있었지만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계속 들었습니다. 그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역시 우리 예수님이 최고야.’라고 했을까요? 세례 요한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3)?” 그는 도리어 예수님이 메시아가 맞는지 여부를 의심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행적이 자신의 기대와 사뭇 달랐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메시아가 오시면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여 알곡은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3:12). 예수님이 불의한 헤롯을 심판하시고 자기를 당장 감옥에서 구출해 주시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은 이 일들을 자신이 확실히 메시아라는 증거로 제시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이 이사야서에 메시아가 오셔서 하실 일로 예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성경의 관점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의 기대를 투사한 메시아 관을 고집했기 때문에 실족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도 세례 요한처럼 얼마든지 실족할 수 있으니 주의하도록 경고하셨습니다(6). 그러나 세례 요한이 한 번 실족했다고 해서 결코 평가절하될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어떤 권력 앞에서도 갈대처럼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부드러운 옷을 입고 사치와 향락을 즐기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바위처럼 굳은 심지로 거친 낙타 털옷을 입고 오로지 메시아의 선구자라는 사명에 충성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갖춘 선지자로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극히 작은 자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거듭 나 천국을 경험하게 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어떻게 천국에 들어갔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침노한다는 말이 부정적으로 들리지만 여기서는 두 가지 긍정적인 의미로 쓰였습니다. 첫째, 들어갈 자격이 안 되는 사람들이 마치 억지로 천국에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모습을 반영한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천국은 자격 없는 사람이 은혜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둘째, 천국에 들어가고자 부르짖어 기도하고 적극적인 열정으로 천국에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지붕에 올라가 천정을 뚫고 침상 채 내렸던 친구들, 사람들에게 돌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나왔던 나병환자,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소리치며 따라왔던 두 맹인, 모두 다 천국을 침노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권능과 긍휼을 믿는 믿음으로 장애물을 헤치고 적극적으로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다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지는 구원과 생명의 나라, 천국을 경험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실망하고 의심하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세례 요한의 사례는 제자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경고를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 생활하면 당연히 번영하고 승리하고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만드시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도 되고 간증할 일도 생기고 전도와 선교도 잘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불의한 정치를 심판하고 사회 정의를 이루는 일에 올인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연장선상에서 특정 정치 세력을 노골적으로 지지하기도 합니다. 이것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라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 삶에 늘 번영과 성공과 승리가 따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당장 이 땅에서 불의가 심판 받고 정의가 실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나름대로 주님께 기대했던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사람들은 의심하고 실망하다가 결국 실족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통해 성경적 메시야 관을 배워야 합니다. 설령 이해가 다 되지 않아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실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적극적인 열정으로 천국을 침노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감나무 아래서 감이 떨어질 때까지 입만 벌리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은혜 주시면 받구요. 아니면 말구요.’ 이런 자세는 곤란합니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제게 넘치도록 은혜를 부어주소서’라고 간구하며 주님께 매달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천국이 내 안에 임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세례 요한보다 천국에서 더 큰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천국에 대하여 너무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지 않습니까? 나병환자, 백부장, 혈루증 않던 여인, 두 맹인, 삭개오, 복음서에 나온 그들처럼 우리도 천국을 얻고자 하는 뜨거운 영적 소원을 품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위대한 세례 요한마저도 다 누리지 못한 천국의 축복과 생명을 풍성히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주님께 정서적으로 합당한 반응을 하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그 시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당시 아이들은 장터에 모여 두 가지 놀이를 주로 했다고 합니다. 첫째, 결혼식 놀이입니다. 신랑, 신부, 주례를 정하고 한 아이가 피리를 불면 다 함께 춤을 추는 놀이였습니다. 둘째, 장례식 놀이입니다. 죽은 메뚜기를 돌 위에 얹어 놓고 한 사람이 곡하면 나머지도 가슴을 치며 우는 시늉을 하는 놀이였습니다. 그런데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분위기가 싸하게 되고 놀이는 거기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왜 아이들은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았을까요? 자기가 하고 싶은 놀이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이 아이들 같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슬피 울며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요한을 귀신 들렸다 하며 공격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구원의 잔치를 여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함께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며 공격했습니다. 왜 이러는 것입니까? 자기 생각과 자기 감정을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동네가 세 곳 있었습니다. 바로 고라신, 뱃세다, 가버나움이었습니다. 모두 갈릴리 바다 주변에 있는 장소들로서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가장 많은 권능을 행하신 지역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두로와 시돈의 우상숭배자들, 이미 심판을 받아 멸망 당한 소돔 사람들보다 더 완악했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에게 예수님은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고 책망하십니다. 결국 그들의 높아진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겸손하게 영접하기 보다는 이러쿵저러쿵 판단하기만 하는 교만이 문제였습니다. 천국을 경험하려면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이 하시는 일에 적극적으로 반응을 해야 합니다. 울어야 할 때는 울고, 웃어야 할 때는 웃어야 합니다. 나의 놀이를 포기하고 주님의 놀이에 응하는 삶이 천국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의 모습입니다.

유재석이 왜 최고의 국민 MC라고 칭송을 받을까요? 리액션을 잘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보다 적절한 리액션으로 게스트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 그의 장기라고 합니다. 주님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절한 리액션이 중요합니다. 책망과 회개의 메시지를 듣거나 감동적인 찬양을 부를 때는 울어야 합니다. 구원과 소망의 메시지를 듣거나 기쁨의 찬양을 부를 때는 즐거워해야 합니다. 손뼉도 두 손이 맞닿아야 소리가 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한 쪽 손을 내미셨는데 우리가 손을 내밀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이 실망하시겠지만 우리 자신에게도 손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아멘’을 하지 않으면 메신저가 위축이 됩니다. 힘있게 말씀을 선포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듣는 사람에게도 마이너스입니다. ‘아멘’하고 힘차게 화답하면 없던 믿음도 생겨납니다. 찬양을 부를 때 가사를 음미하면서 몰입해서 함께 부르면 은혜와 감동이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우리가 가진 신앙이 결국 마지막에는 정서와 감정으로 드러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예배에 대하여 적절한 정서적 감정적 반응을 보이는 참 중요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그런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드러내지 않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갑돌이와 갑순이가 왜 맺어지지 못했습니까? 마음은 있는데 표현을 안 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있다면 표현도 해야 완성이 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같이 놀자 하는데 ‘싫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놀이를 할꺼야.’ 한다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주님과 함께 울기도 웃기도 하며 천국 백성으로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로, 예수님께로 와서 배우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에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천국의 비밀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란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고 더 이상 듣지도 배우지도 않으려는 사람들입니다. 또 스스로 의롭다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을 간절히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은 단순한 믿음으로 천국 복음을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과 아들 예수님을 아는 특권과 은혜를 누립니다. 예수님은 아직 이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초청하십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기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란 앞서 언급하신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 여기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대표적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온갖 폼을 다 잡고 있지만 사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었습니다. 스스로 힘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 애쓰느라 지쳐 있었습니다.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날마다 새로 쌓이는 죄의 짐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탈진 상태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 쉬게 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로 가면 예수님께서 친히 다 이루신 구원을 값없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얻으신 의를 선물로 주십니다. 예수님이 죄의 짐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로 가져가십니다. 참된 안식이 여기에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쉬지 못하는 것은 항상 내가 최고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교만한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따르면 교만을 내려놓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그제서야 마음에 평화와 안식이 찾아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멍에를 맨다는 것은 제자도를 가리킵니다. 이 멍에는 쉽고 가볍습니다. 왜냐하면 앞에 가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따라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의의 길, 선한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요즘 길 거리를 다니다 보면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어떤 주인은 개와 함께 아주 즐겁게 산책을 합니다. 반면에 어떤 주인을 보면 안쓰러울 때가 있습니다. 개에게 질질 끌려 다니느라 아주 진땀을 뺍니다. 개는 개 나름대로 곤욕을 치릅니다. 개나 주인이나 둘 다 힘들어 보이고 화가 난 모습입니다. 왜 즐거워야 할 산책길이 이렇게 피곤한 전쟁터가 되었을까요? 온유하고 겸손하게 주인의 인도를 따르면 되는데 그렇지 하지 않고, 개가 자기의 길, Dog Way를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어련히 알아서 주인이 좋은 길로 인도할 텐데 개는 자기 마음대로 가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 한다고 하면서도 평화와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Lord’s Way를 따르지 않고 My Way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이쪽으로 가라고 하는데 우리가 기어코 저쪽으로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을 본받아 온유하고 겸손한 심령으로 주님의 멍에를 메고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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