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이창무 2020. 5. 3.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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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10 강 / 이창무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말씀 / 마태복음 7:1-12
요절 / 마태복음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신앙생활에 있어서 개인 신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 믿어 복 받고 혼자 천국 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가 아닙니다. 개인 신앙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임하는 천국을 누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야 의에 관해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인간 관계의 원칙들은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로,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1절을 보십시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비판’은 본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종류의 비판은 꼭 필요합니다. 언론의 사명은 비판 기능에 있다고 하며 비판 없이는 학문이 발전하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비판은 그런 공적인 비판이 아닙니다. ‘남을 헐뜯고 깎아 내리는 것’, ‘남을 뒤에서 욕을 하는 뒷담화’와 같은 사적인 비판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을 본성적으로 즐깁니다. 그것도 혼자서 하면 재미가 없으니까 몇 사람이 모여서 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정치인이나 연예인, 직장에서는 부장님, 학교에서는 교수님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분위기가 교회 안에까지 들어오기도 합니다. “저 양은 왜 이렇게 한심해?” “저 목자님은 진짜 심각하지 않아?” “저 사모님은 왜 저래? 앞으로 상종을 하질 말아야 겠군” 이렇게 되면 내가 없을 때 나에 대해 서로 이런 말을 하고 있을까 불안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비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비판하면 나도 비판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촘촘한 잣대로 남을 판단하면 나도 촘촘한 잣대로 판단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서 그런 비판을 받게 됩니까? 먼저는 내가 비판한 그 대상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고운 법입니다. 비판을 받은 상대방은 마음에 받은 상처를 되돌려주려고 나를 헐뜯고 비난하게 됩니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을 갖추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모든 인생의 재판장이신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다른 사람을 비판한다면 내가 하나님 자리에 앉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월권 행위로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불러일으킵니다. 결국 비판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허물고 마침내 자신을 망치는 행위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비판하는 사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비판하는 사람의 문제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3). 자기 눈 속에는 들보는 그냥 둔 채 함부로 형제 눈 속의 티를 빼내려 합니다(4). 이런 사람은 겉으로는 티가 없는 척하지만 속에는 들보가 가득한 위선자입니다. 먼저 자기 눈에서 들보부터 빼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눈이 잘 보여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들보’는 나에게 있는 큰 허물이나 실수, 또는 죄를 말합니다. ‘티’는 상대방에게 있는 작은 허물이나 실수를 말합니다. 그러면 ‘들보부터 뺀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나에게 있는 큰 허물부터 고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한 후에 다른 사람의 작은 허물을 고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강조하려는 바는 무엇입니까? 비판 자체도 문제지만 비판할 때에 갖는 ‘이중 잣대’가 더 문제입니다. 어떤 엄마가 자기 아들이 음식점에서 시끄럽게 돌아다니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우리 아들을 참 잘 키웠구나. 이렇게 밝고 씩씩하게 키웠으니 말이야.” 그런데 잠시 후 다른 집의 아들이 음식점에서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 녀석은 기본이 안 되었네. 대한민국의 장래가 참 걱정이야.” 요즘 이런 것을 두고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자신을 판단하는 기준과 상대를 판단하는 기준이 완전히 다릅니다. 자기에는 아주 느슨한 기준을 적용하지만 상대에게는 엄청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자기 눈의 들보부터 깨닫고 뺄 수 있습니까? 거울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자신을 살펴보게 하는 거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비난과 정죄의 도구로 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정죄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고치라고 주신 것입니다. 말씀의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여 고치면 눈에서 들보가 나옵니다. 눈이 편해지고 밝아집니다. 그런 후에 다른 사람 눈에 있는 티를 밝히 보고 빼 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만이 좋은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추어보고 회개함으로 먼저 자기를 밝히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긍휼과 사랑의 마음으로 겸손하게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도와주는 좋은 목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앞 부분에서 먼저 자기 성찰이 필요하지만 다른 사람 눈에 티를 빼 줄 필요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다른 사람 눈에 있는 티를 뺄 수 있을까요? 설득과 토론으로 가능할까요? 해병대식 훈련으로 가능할까요?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 빼내려 하다가 무리를 해서 도리어 더 큰 상처를 입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눈의 들보를 빼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 것처럼 다른 사람이 티를 뺄 수 있게 하려면 그 사람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주어야 합니다. 진주처럼 귀하고 아름다운 복음의 말씀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따르면 사도 베드로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힘 있게 전했습니다. 이 때 사람들은 양심이 찔려 가슴을 치며 회개했습니다. 이날 구원받은 사람이 삼천명이 넘었습니다.  복음 안에는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용서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 깨달었을 때 사마리아 여인도, 세리 레위도, 삭개오도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비판과 정죄는 사람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말씀과 복음만이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개와 돼지를 아주 더러운 짐승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개를 사랑스러운 인생의 반려자로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멋진 강아지나 애완 돼지라 할지라도 금 목걸이를 준다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물어 뜯고 뱉고 난리가 아닐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개는 개고 돼지는 돼지일 뿐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개나 돼지는 복음의 가치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에게 말씀을 주면 자기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을 준 사람을 물어뜯어 상처를 입힙니다. 알게 된 말씀을 도리어 교회를 공격하는 도구로 악용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비판은 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분별력까지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허물려는 자들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악의적으로 복음을 훼손하려는 자들은 경계해야 마땅합니다. 그래야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와 진주처럼 귀하고 아름다운 참된 복음을 수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악한 이단으로부터 우리 양들과 자녀들과 그리고 우리 자신을 잘 지켜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하십니다.  7절과 8절을 보십시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이 말씀은 기도에 대한 교훈으로 많이 인용되는 본문입니다. 인간 관계 속에서 제자의 의에 관한 말씀을 하시다가 왜 갑자기 기도를 언급하실까요? 그런데 산상수훈의 맥락 속에서 보면 이 말씀은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강조점이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에게는 관대한 반면 다른 사람에게 인색한 편입니다. 구해도 잘 주지 않고 문을 두드려도 잘 열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다릅니다. 구하는 자에게 언제든지 주시고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기꺼이 열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너그럽게 주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게다가 주실 때마다 항상 좋은 것, 최선의 것으로 주십니다. 

이 마음은 모든 아버지들의 마음입니다. 예전에 김현유 목자님의 직장 동료분이 아들을 낳은 후 자신이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가 본래 고기라면 사족을 못쓰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아들에게 고기를 양보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어요. 제 평생에 이런 적은 이전에 없었어요. 저는 그 순간 내가 아빠가 되었다는 사실을 절감했어요.” 이처럼 아버지는 자식에게 최고로 좋은 것을 기꺼이 양보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천하의 악당이라도 자기 자식만은 끔찍이도 귀하게 여기는 법입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의 선한 아버지는 어떠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온갖 좋은 것들을 은혜로 주십니다. 산상수훈 말씀 안에서만 살펴봐도 얼마나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국의 복을 주십니다. 은밀한 중에 한 일을 보시고 상급을 주십니다. 하늘에 쌓은 보화를 주십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이미 많은 것을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이 더 있다면 언제든지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됩니다. 그러면 모든 선한 것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아낌없이 퍼 주시는 하늘 아버지의 자녀인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은 황금률이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로마황제 알렉산더 세베루스가 이와 흡사한 구절을 궁전 벽에 금으로 새겨 둔 것으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공자도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즉 내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말라고 하였고 힐렐이라는 유명한 랍비도 거의 비슷한 말을 남겼습니다. 모두 다 알고 인정하는 이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서로 비판하지 않고 격려하고 세워주는 세상, 받은 것이 없어도 먼저 사랑해 주고 섬겨 주는 세상, 서로를 축복해 주고 기도해 주는 세상, 이 세상은 천국처럼 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알면서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먼저 나를 좀 사랑해 달라고 요구하고 상대방이 나를 인정해 주고 존경해 주길 바랍니다. 때로 먼저 대접해 줄 때도 있지만 그 후에는 저 사람도 나를 대접해 주리라는 기대를 갖습니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 기대가 채워지지 않으면 실망하고 섭섭합니다. 상처를 받고 상대방에 대한 원망이 생깁니다. 말이 거칠게 나오고 그러다가 다투고 관계성이 파괴되고 맙니다. 이런 일을 여러 번 겪다 보면 차라리 안 주고 안 받는 것이 속 편한 일처럼 여겨집니다. 이렇게 대접을 받기 위해 대접한다면 우리가 천국을 이룰 수 있을까요? 이런 식으로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천국 생활을 하려면 대접 받고자 하는 마음부터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의지와 결심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늘 아버지가 주시는 좋은 것으로 천국의 풍성함을 누림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늘 아버지는 얼마나 좋은 분이십니까? 우리가 연약할 때, 죄인 되었을 때, 심지어 원수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의 완악함과 거절과 배척을 참으시고 상처를 주장하지 않고 주고자 하셨습니다. 구원과 영생을 주셨고, 하나님 나라를 주셨습니다. 진리의 말씀과 가장 좋은 선물이신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남을 대접해야 합니다. 용서 받았으니 용서해야 합니다. 사랑 받았으니 사랑해야 합니다. 존중 받았으니 존중해야 합니다. 정죄 받지 않았으니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섬김을 받았으니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대접하시는 사랑을 누리며 형제와 이웃을 대접하며 살 때 우리 삶에 천국의 풍성함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 백성 답게 살게 되며 우리 공동체는 천국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이라는 미국의 유명한 듀엣 가수가 있습니다. 이들의 대표곡이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라는 곡입니다. 1절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대 지치고 초라하게 느껴져서 그대 눈에 눈물 고이면 제가 모두 닦아 드리겠어요. 전 그대 편이에요. 사는 게 힘들어지고 친구 하나 찾을 수 없을 때 험한 세상을 건너는 다리가 돼 드릴게요. 험한 세상을 건너는 다리가 돼 드릴게요.” 사람이 불행한 이유는 이런 다리가 되기 보다 벽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기 위해 오셨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 다리입니다. 그 다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으로부터 선한 것을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남을 대접하고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로서 우리 각 사람과 우리 모임이 이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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