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네 종류의 밭의 비유

이창무 2020. 7. 19.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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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20 강

네 종류의 밭의 비유

말씀 / 마태복음 13:1-23
요절 / 마태복음 13:23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중에 ‘씨 뿌리는 사람’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빈센트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벌판에 씨 뿌리는 사람처럼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씨 뿌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매일 죄악이 쌓이고 또 대지가 숱한 가시와 엉겅퀴로 뒤덮여 있다고 해도 말이다.” 
오늘 말씀이 바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내용으로 말한다면 제목처럼 네 종류의 밭의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 앞에 큰 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이 무리 중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나온 사람들이 있었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감시하려고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 병 고침을 받기 위해 나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냥 친구 따라 아무 생각 없이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 중 과연 어떤 사람이 말씀을 듣고 열매 맺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한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떤 농부가 씨를 뿌렸습니다. 
씨앗은 네 종류의 밭에 떨어졌습니다. 
더러는 길 가에 떨어졌습니다. 
한 사람이 지나가면 흔적이 남고 백 명이 지나가면 오솔길이 되고 
천 명이 지나가면 길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밟고 다녔기에 단단해진 길 가에 떨어진 씨는 
흙 속으로 뚫고 들어가지 못하고 데굴데굴 굴러다녔습니다. 
결국 공중의 새에게 먹혀 버렸습니다.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이곳에 떨어진 씨는 흙에 있는 습기를 빨아들여 싹을 냈습니다. 
그러나 돌 때문에 뿌리를 내릴 수 없었습니다. 
햇볕이 내리쬐자 점점 시들어 말라버렸습니다. 
더러는 가시 떨기 위에 떨어졌습니다. 
가시 떨기 속으로 떨어진 씨는 부드러운 흙 속으로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가시가 함께 자라면서 물과 양분을 빼앗아 갔기 때문에 
겨우겨우 명맥만 유지할 뿐 결실하지는 못했습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싹이 나고 뿌리를 깊이 내리고 물과 양분을 충분히 공급받았습니다. 
무럭무럭 자라서 추수 때가 되자 각각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했습니다. 
엄청난 수확을 거둔 농부는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이 비유를 들은 무리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뻔한 이야기인데! 
우리가 이런 말씀 들으려고 여기까지 왔나?’하며 투덜거리며 돌아갔습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드러내시고 
무리들에게는 감추시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답하셨습니다. 
무리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무리들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완악한 마음이란 어떤 마음입니까? 
듣고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변화되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 
말씀이 역사해서 변화되고 나면 
이제까지 즐기던 죄악의 낙을 누리지 못할 것 같아 두렵기 때문입니다.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카라멜 마키아토에  휘핑크림 얹어서 초코칩을 뿌려 마시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변화되면 자기를 잃을 것 같아서 어느 지점에서 이렇게 딱 잘라 선을 긋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씀을 듣기는 하겠어. 하지만 여기까지 만이야. 
더 이상 말씀이 내 삶에 개입하기는 원하지 않아.” 
이런 태도로는 말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말씀에 대해 열려 있었습니다. 
말씀이 이끄시는 대로 자기 삶을 맡기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주셨습니다. 
아브람, 모세, 다윗, 엘리야와 같은 구약의 위대한 인물들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천국이 이제 그들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천국 복음의 비밀을 깨닫는 것만큼 큰 축복과 선물이 없습니다. 
우리도 이 제자들처럼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복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8절부터 예수님께서 직접 비유를 해설해 주셨습니다. 
비유에서 씨는 천국 말씀을 의미하고, 씨가 떨어 진 곳은 사람들의 마음 밭을 가리킵니다. 
말씀이 열매를 맺느냐 맺지 못하느냐는 전적으로 어떤 마음 밭에 떨어졌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첫째, 길 가와 같은 마음 밭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말씀의 씨가 먼저 길가와 같은 마음 밭에 떨어졌습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처음에 말씀을 듣기는 듣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자기 생각이 강합니다. 
대개 마음이 딱딱하고 비판적입니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나름대로의 결론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아멘’ 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탁구공 튀듯이, 말씀이 튕겨져 나갑니다. 
이렇게 튕겨 나간 말씀은 어떻게 됩니까? 
마귀는 즉시 찾아와 말씀의 씨를 빼앗아 가버립니다.

둘째, 돌밭과 같은 마음 밭입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 기쁨으로 받습니다. 
할렐루야, 아멘을 연발하며 말씀을 영접합니다. 
이런 양을 만난 목자는 오랜만에 좋은 양을 만났다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습니다. 
말씀 공부를 하긴 하지만 생각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결국 시련이 닥쳐올 때 바닥을 드러내고 맙니다. 
선배가 싫은 소리 한 마디 한 것, 친구가 뭐라 한 것 가지고도 쉽게 제자의 길을 포기합니다.

셋째,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밭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가시떨기 밭은 말씀이 어느 정도 뿌리내려서 잘 자라는 밭입니다. 
그런데 곧 그 한계가 드러납니다. 
숨겨져 있던 가시도 함께 자라서 기운이 막히게 하는 것입니다. 
가시에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라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세상의 염려`는 공부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취업에 대한 염려, 먹고 살아갈 염려, 결혼에 대한 염려, 자녀에 대한 염려 등등 다양한 염려가 있습니다. 
염려가 시작되면 여기에 온 생각이 집중되어 더 이상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재물의 유혹’은 큰 부를 쌓고자 하는 욕심입니다. 
부자 되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돈이 안 되는 말씀 공부에 소원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말씀으로 향해야 할 삶의 에너지를 가시가 다 빨아들여서 말씀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넷째, 좋은 마음 밭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좋은 땅은 어떤 땅입니까? 
앞선 결실치 못하는 세 가지 밭의 약점을 모두 보완한 마음 밭을 말합니다. 
딱딱하지도 않고 돌도 가시도 없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지닌 사람은 말씀을 영접하고 말씀 속에서 가치관, 인생관, 정체성을 확립하며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일에 삶의 에너지를 집중적으로 투자합니다. 
그 결과 말씀이 자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인격과 성품이 변화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가 달라집니다. 
그 내면에 천국의 기쁨과 평안, 감사와 사랑이 충만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또는 네 종류의 밭의 비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천국 복음에 관해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첫째로, 천국 복음은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씨앗은 겉보기에는 볼품이 없습니다. 
쭈글쭈글하고 못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엄청난 유전 정보와 놀라운 생명의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2009년 5월에 경남 함안군 성산산성에서 
고려시대 연꽃 씨앗이 700여 년 만에 발견이 되었습니다. 
이 씨앗을 물에 담근 지 5일 만에 싹이 나기 시작하였고, 
다음 해 7월 7일 드디어 7개의 연꽃이 피었다고 합니다. 
천국 복음이 바로 이런 씨앗과 같습니다. 
복음 안에는 놀라운 천국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복음에는 사람들을 변화시켜 구원과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는 팀 켈러 목사가 개척하여 
현재는 매주 6천 명의 성도가 모이는 리디머 장로 교회가 있습니다. 
뉴욕 맨해튼이 어떤 곳입니까? 
인본주의, 자유주의, 물질만능주의의 총본산과 같은 곳입니다. 
팀 켈러 목사가 처음 이곳에 교회 개척을 시작했을 때 
주변에서 모두 그곳은 교회 개척의 불모지이니 하지 말라고 말렸다고 합니다. 
그 불모지에 지금과 같은 결실을 맺게 한 힘은 바로 복음이었습니다. 
팀 켈러의 대표적인 저서인 ‘센터처치’의 표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도시라는 밭에 심겨진 복음의 씨앗이 어떻게 풍성하게 열매 맺는지 당신 눈으로 직접 지켜보라!” 
뉴욕 맨해튼에서 살아가는 젊은 전문직 종사들이 복음으로 변화되었다면 
대한민국 서울에 살고 있는 청년들이 복음으로 변화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복음의 잠재력을 믿고 
이 시대 복음의 불모지인 캠퍼스에 복음의 씨앗을 계속 뿌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천국 복음은 넓게 뿌려져야 합니다. 
목자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씨 뿌리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씨를 뿌리다 보면 항상 부딪치는 고민이 
이것이 너무 낭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캠퍼스 전도를 나가도 만난 양들의 대부분이 나중에 답장이 없습니다. 
말씀 공부를 해 주어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참 답답하기도 합니다. 
이런 비효율적인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에서도 단순히 말해서 열매 맺지 못하는 밭이 3/4이고, 
열매 맺는 밭이 1/4입니다. 
이것을 보면 씨 뿌리는 자에게 있어서 낭비는 숙명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의미한 낭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흘러 넘쳐서 낭비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밭 나쁜 밭을 가리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들에게 일단 복음의 씨를 뿌려서 기회를 주시고자 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씨를 뿌려야 나중에 밭이 다른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내게 열매가 맺히지 못한 것은 씨가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야 
이런 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만약 나쁜 밭에 떨어진 것에 낙심하여 
씨 뿌리는 일 자체를 중단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에는 좋은 밭에도 씨가 뿌려지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좋은 밭을 만나면 백배로 결실하기 때문에 99번 실패했다고 해도 손해가 결코 아닙니다. 
이렇게 좋은 밭이든 나쁜 밭이든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좋은 목수는 연장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살짝 응용하면 씨 뿌리는 사람은 밭을 가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에 기초해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천국 복음의 씨앗을 넓게 뿌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천국 복음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네 가지 마음 밭 중에서 지금 나는 어떤 마음 밭에 속해 있을까요? 
좋은 땅인가요? 
아니면 길 가입니까? 
돌밭입니까? 
가시떨기입니까? 
혹시 길 가이면서 돌밭면서 가시떨기입니까? 
그렇다면 이번 생에 열매 맺기는 다 틀린 것 아닙니까?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습니다. 
1913년 오지를 여행하던 한 여행자가 우연히 양치는 노인 ‘엘제아르 부피에’를 만나 
이런 계획을 듣게 됩니다. 
황량한 프로방스 지방의 알프스 산간에 앞으로 10만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여행자는 세계대전이 끝난 후 다시 이곳을 찾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됩니다. 
울창한 참나무 숲과 개울가가 펼쳐져 있었고 
황량했던 그곳에 풍요로운 마을이 재건되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황무지도 얼마든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땅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길 가는 쟁기로 갈아엎으면 됩니다. 
돌은 곡괭이로 캐내면 됩니다. 
가시떨기는 뿌리까지 뽑아서 제거하면 됩니다. 

그러면 누가 이 일을 합니까? 
땅이 스스로를 개간할 수는 없습니다. 
씨를 뿌린 농부가 해야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농부가 먼저 밭에 씨를 흩뿌린 후에 그 다음에 밭을 갈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복음의 씨를 뿌린 후에 나 몰라라 하시며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딱딱해진 마음, 고집스러운 마음, 교만한 마음을 부수고자 하십니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과 태도를 들어내시고자 하십니다.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라는 가시떨기를 뽑아내고자 하십니다. 
이때 주로 사람이라는 쟁기와 사건이라는 곡괭이를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이리저리 치이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사건을 만나 한계를 절감하기도 합니다. 
이때 너무 괴로워서 주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주님께서 우리를 열매 맺을 수 있는 좋은 밭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 중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가 황량하고 빈약한 인생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최소 삼십 배, 최고 백 배의 풍성한 결실을 맺는 풍성한 인생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 마음은 부서지고 깨어지고 뒤집어져야만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 마음을 만지시는 주님의 손길에 저항하지 않는 것입니다. 
농부이신 주님의 손에서 나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마음은 복음의 씨가 떨어져 싹이 나고 뿌리를 내리고 꽃이 피고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밭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인격과 성품이 아름답게 변화되고 하나님과 사람과 바른 관계성을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천국의 기쁨과 평안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천국의 비밀과 생명이 담긴 이 놀라운 복음의 씨앗을 우리에게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마음 밭이 좋을 때나 좋지 않을 때나 신실하게 귀한 천국 복음의 씨앗을 심으시는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마음 밭을 열매 맺을 수 있는 좋은 밭으로 만들어 가시는 주님의 자비하신 손길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고 우리 안암 1부가 복음의 씨앗이 어떻게 풍성하게 열매 맺을 수 있는 보여주는 살아있는 본보기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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