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이창무 2020. 8. 9.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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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23 강 / 이창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말씀 / 마태복음 15:1-20
요절 / 마태복음 15:19,20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원판불변의 법칙’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원판불변의 법칙이란 아무리 화장을 하고 조명을 비추고 포토샵으로 보정하고 심지어 성형을 한다 해도 원래의 얼굴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의 내면 세계에도 원판불변의 법칙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겉을 깨끗하게 한다 해도 마음이 변화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세 가지 측면에서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첫째, 마음이 변화되지 않으면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 본부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조사하러 나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 일행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다가 건수 하나를 물었습니다.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 하나이다” 위생 상 좋지 않기 때문도 아니었고,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이것을 문제 삼은 이유는 손을 씻는 것이 장로들의 전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장로들은 왜 이런 전통을 만들었을까요? 율법에는 제사장이 성전에 들어갈 때 손을 씻도록 했습니다. 여기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자신을 정결하게 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것을 확장하여 모든 백성들이 반드시 손을 씻고 음식을 먹어 더러운 것에 자기 몸이 오염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장로들의 전통이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를 잘 지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스승이신 예수님이 이런 전통에 별로 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제기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3)? 예수님은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의 계명을 대조하셨습니다. 이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높습니까? 당연히 인간이 만든 전통보다는 하나님께서 친히 명하신 계명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장로들의 전통이 하나님의 계명 아래에서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 바리새인들은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고르반 규례입니다. 고르반이란 하나님께서 드린 제물을 뜻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 재산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파산하는 바람에 채권자에 그 재산이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 결과 서원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갚지 못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고르반이라고 선포를 하면 아무도 건들지 못하도록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많은 바리새인들이 부모를 부양해야 할 의무를 외면하기 위해 이 고르반 규례를 악용했습니다. 내 재산은 하나님께 드려졌기 때문에 부모에게 돌아갈 몫이 없다면서 배째라 하고 나왔습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온갖 잔머리를 굴려 가며 좋은 취지의 전통을 악용하여 오로지 자기들만의 유익만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의 전통을 내세워 최상의 법인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외식하는 자들’로 규정하셨습니다(7). 외식은 속에 있는 진심은 감추고 겉으로만 그럴 듯하게 꾸미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29:13을 인용하여 그들의 외식하는 모습을 폭로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8,9)” 바리새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했습니다. 안식일도 철저하게 지키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고 일주일에 이틀 금식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의 경건은 표면적이었을 뿐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사람의 계명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시켜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자기 구미에 맞는 가르침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팔았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이 문제였습니다. 전통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대부분 ‘잘 해보자 제대로 똑바로 해보자’는 좋은 취지에서 생깁니다. 전통 덕분에 삶의 현장 속에서 이 순간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전통 덕분에 공동체의 일체감이 형성되기도 합니다. 전통은 이렇게 좋은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입니다. 전통이 만능은 아닙니다. 전통과 규범은 사람의 외적인 행동을 규제할 수는 있지만 결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켜주지는 못합니다. 부패한 인간의 마음을 돌려 놓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죄에 깊이 물든 인간은 전통을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도구로 역이용합니다. 그 결과 전통이 본래 가졌던 좋은 취지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형식이라는 빈 껍데기가 남습니다. 그 결과 사람은 필연적으로 위선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은 전혀 변한 것이 없는데 관습으로 굳어진 전통은 지켜야 하니 어찌합니까? 결국 겉으로만 그렇듯 하게 꾸미게 됩니다. 마음은 일도 없는데 착한 척, 경건한 척, 의로운 척하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도 좋은 전통이 많이 있습니다. 소감 쓰는 전통도 있고 일용할 양식을 먹는 전통도 있습니다. 모두가 성경을 공부하고 또 성경을 가르치고자 하는 전통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 말씀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만들어진 전통입니다. 잘 활용하면 분명히 큰 유익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것들을 잘 지킨다고 해서 자동으로 정결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 마음이 정결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칫 겉으로만 깨끗한 척하고 속으로는 자기 욕망과 이익에 충실한 위선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보다 우리의 마음의 상태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형식이 아니라 본질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형식적으로 겉으로만 경건한 척 해온 위선의 요소가 있다면 이를 애통한 마음으로 회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사랑하고 예배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마음이 변화되지 않으면 맹인을 인도하는 맹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무리를 불러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나아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바리새인들을 너무 자극하시면 어떡해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충돌하신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이 이번에는 이처럼 유난히 긴장하고 있을까요? 이번에 온 사람들은 본부에서 나온 급이 다른 바리새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답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13, 14)”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에 의해 가라지처럼 뽑힐 자들이니 더 이상 그들에게 신경 쓰지 말라 하셨습니다. 

아울러 그들을 맹인에 비유하셨습니다. 맹인은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무엇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마음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당대 그 어떤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한다 자부하던 그들이었지만 정작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이 맹인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맹인인 줄 알았더라면 어떻게 감히 ‘내가 맹인을 인도하겠소.’ 하며 나설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자기도 맹인이면서 보는 사람인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자신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남들에게 가르치겠다고 했으니 그 결과가 어떻겠습니까?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구덩이는 어떤 구덩이일까요?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불순종의 구덩이입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떠나 있는 위선의 구덩이입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자기 자신도 모르는 무지의 구덩이입니다. 그들이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에는 지옥의 불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이 바리새인들의 눈을 가려 그들이 맹인이 되게 만들었을까요? 무리들과 비교하면서 상대적으로 자신들의 겉모습은 깨끗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우리 속담은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결점이 있기는 마찬가지이면서, 조금 덜한 사람이 더한 사람을 흉볼 때에 쓰는 말입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에 있어서는 바리새인들이 무리들보다 더 깨끗하게 살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봐야 조금 더 하고 덜 하고 차이 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속마음에서는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무리들은 자신들이 맹인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겸손함이라도 있었지만 바리새인은 그조차도 없었으니 더 상황이 심각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더 낫다는 생각이 참 위험한 생각입니다. 이런 위험한 착각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무의미한 상대적인 비교를 멈추어야 합니다. 그 대신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비추어줄 거울이 필요합니다. 그 거울은 바로 말씀이라는 거울입니다. 말씀은 거룩하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 우리를 발견하게 해 줍니다. 무엇보다 말씀은 우리의 겉모습을 뚫고 들어가서 우리 영혼의 심연을 비추어 줍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발견합니다. 그때야 비로서 우리 마음의 부패와 타락의 실상을 깨닫게 됩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서문에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두 가지 지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나 자신을 아는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지식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곧 하나님을 아는 만큼 나를 알고 나를 아는 만큼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늘 말씀의 조명 아래 우리 영혼을 비출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온전히 나를 알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마음이 변화되지 않으면 말이 더럽혀질 수밖에 없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비유의 뜻을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음식입니다. 모든 음식은 먹으면 소화되어서 배설물로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정말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사람이 하는 말이 얼마나 더럽습니까? 오늘 본문 속에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제자들에게서 작은 꼬투리를 잡아서 비난하고 공격하고 정죄합니다. 부모에게 돌아갈 몫을 가로채려는 속셈으로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는 뻔뻔한 말을 서슴지 않습니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기도하고 찬양하지만 그 말 속에 진심은 하나도 담겨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자기 생각을 가르칩니다. 

이 더러운 말, 역겨운 말들이 다 어디서 왔습니까?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19,20)” 말은 죄가 없습니다. 말이 더러워지는 이유는 그 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이 심히 부패해 있기 때문입니다. 상수원에서 썩은 물이 흘러 나가는데 하류의 강물이 깨끗할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열거하신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의 목록을 보십시오. 악한 생각에서 시작해서 비방으로 끝납니다. 그 사이에 있는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은 모두 십계명에서 하나님이 금하신 것들입니다. 우리의 부패한 마음에서 악한 생각이 나옵니다. 그 악한 생각은 하나같이 다 하나님의 계명을 거스르고 불순종합니다. 그것이 결국 비방의 말, 사랑 없는 말, 비판과 저주의 말로 표출됩니다.

우리가 말 때문에 후회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왜 그렇게 심하고 거칠게 말했을까? 왜 잘 알지도 못하고 거만하게 비난을 퍼부었을까? 뒤늦게 깨닫고 부끄러워 얼굴을 붉힐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고의는 아니고 실수였다고 변명하고 싶어 집니다. 그런데 과연 실수일까요? 실수로 하는 말은 없다고들 합니다. 사실은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말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일지 모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더러운 말은 다 더러운 마음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먼저 마음이 정결하게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마음이 정결해질 수 있습니까? 인간의 전통, 윤리, 도덕, 규범, 충고, 잔소리, 협박, 체벌, 해병대 극기 훈련 등등 이런 것들로 안 됩니다. 오죽 안 되면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생겨났겠습니까? 

그러나 히브리서 9장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 말씀대로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시면 우리 마음이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 만이 우리 마음이 새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정결하게 되면 우리 말도 변하게 될 것입니다. 위로의 말, 격려의 말, 소망의 말, 축복의 말, 진실의 말, 이 모든 아름다운 말이 우리 입을 통해 나오게 될 것입니다. 복음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우리가 더러운 말이 아니라 The Love, 사랑의 말을 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만져 주시고 우리 영혼을 새롭게 하셔서 우리로 신실하고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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