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창무 2020. 9. 1. 21:24
반응형

2020년 마태복음 제 25 강  / 이창무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말씀 / 마태복음 17:1-8
요절 / 마태복음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인간이 외부 세계와 접촉할 때 사용하는 감각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이렇게 다섯 가지 가 있습니다. 이 감각들 중에서 시각이 80%, 청각이 10%, 기타 나머지 감각이 10%라고 합니다. 그만큼 인간은 주로 시각과 청각에 의존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에 따라 우리 삶이 형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제자로서 우리가 반드시 보아야 할 것 한 가지와 들어야 할 것 한 가지가 있다면 무엇일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초라한 모습 뒤에 감춰진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하고 예수님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신 후 엿새가 지났습니다. 이 엿새는 모두에게 참 어색하고 불편한 기간이었습니다. 졸지에 사탄 소리를 들은 베드로에게는 멘붕이 왔습니다. 예수님도 베드로에게 책망을 받고서 충격이 적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를 듣고서 감당이 안 되었습니다. 곧 예루살렘에 입성하기만 하면 예수님이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실 줄 알았습니다. 그때 자신들은 예수님 좌우편에 앉아서 왕국을 통치하는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죽으신다고요?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고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고 두 번 생각해 보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예수님은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감히 누구도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한 채 무거운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지켜보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이 산은 만년설로 뒤덮여 있는 신비의 산 ‘헬몬 산’이었을 것입니다. 산 위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2)”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서 변형되셨습니다. 여기서 ‘변형’이라는 말의 원어가 ‘메타모포시스(μεταμόρφωσις)’입니다. 이 단어는 지금도 생물학에서 곤충이 애벌레, 번데기, 나비로 모습이 바꿀 때 쓰이는 말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예수님이나 그 모습이 이전과 달라졌습니다. 

변형되기 전의 예수님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사람들은 대개 영화나 그림 속에서 본 예수님의 모습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 모습은 머리는 금발에 갈색 수염을 기른 청년의 모습입니다. 하나 같이 다 잘 생긴 미남자의 얼굴이고, 깔끔한 하얀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실제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호수 주변 이곳저곳을 다니시던 예수님의 모습일까요? 이사야서 53장 2절은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머리 둘 곳 없는 가난한 삶을 사신 예수님의 몸은 말라 있었고 얼굴은 햇볕에 검게 그을려 있었습니다. 오래 동안 목수일을 하신 예수님의 손을 거칠고 이리저리 상처투성이였습니다. 낡고 허름한 옷은 늘 누런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았지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광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변형되신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의 얼굴은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조금의 어두움이나 그림자도 없었습니다. 모세도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 후에 그 얼굴에서 광채가 난 적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서 나온 광채는 하나님의 영광이 반사되어 나타난 달빛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얼굴에서 나온 해 같은 빛은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였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모습은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기 이전에 가지셨던 성자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동시에 장차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그리스도의 영광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십자가에서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정체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고난 바로 뒷면에는 그분의 비할 수 없는 영광이 감춰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 사람이 감히 가까이할 수 없는 지극히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교만하고 자기 중심적인 우리들을 섬기기 위해 종처럼 낮아지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시기 위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는 고난과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무너뜨리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본래 가지셨던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회복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십자가의 도는 모르고 영광의 도만 알 따름이었습니다. 그들은 늘 승리만 있기 원했습니다. 고난은 망하게 하는 것이고 죽는 것이고 그것으로 끝이라고 여겼습니다. 무조건 고난을 멀리하고 피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마음 속에 고난의 모습 뒤에 숨겨진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각인시키고자 하셨습니다. 해 같이 빛나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마음에 품고 그들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후에 베드로는 자신에게 고난이 닥쳐올 때마다 이날 자신이 보았던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이로부터 위로와 희망을 얻고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박해와 고난 가운데 있는 소아시아 지역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우리가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가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벧후 1:16,17)”

오늘날 위로와 희망이 필요한 교회가 또 있습니다. 바로 한국 교회입니다.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하락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최근 터진 코로나 집단 감염 사태의 주 발원지로 교회가 지목을 받으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가속도를 얻고 있습니다. 이제는 거의 ‘공공의 적’으로 취급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이 땅의 교회는 온갖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갖가지 추문과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떤 감정이 드십니까? 어떤 분은 왜 교회만 갖고 그러냐고 화를 냅니다. 어떤 분은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도매급으로 넘어가는 것 같아 억울해 합니다. 어떤 분은 부끄러워서 숨고 싶습니다. 어떤 분은 이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울고 싶습니다.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이 뒤섞이며 하나 같이 앞날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전도가 제대로 될까? 앞으로 교회가 크게 위축되지 않을까? 앞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차별을 받는 세상이 오는 것은 아닐까? 근심과 걱정이 쌓여 갑니다. ‘코로나 블루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생긴 우울한 감정을 뜻하는 말입니다. 안 그래도 우울한데 상황이 이러니 우리 믿는 자들은 더 우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겉으로 초라해 보였던 예수님이 알고 보면 빛나고 영광스러운 분인 것처럼, 부끄럽고 초라해 보이는 교회도 알고 보면 빛나고 영광스러운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니라” 또 5장 27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교회를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반드시 세우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들을 통해 우리는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들로 정결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의 영광, 교회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위로와 희망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교회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역설적이게도 영광만 추구한 교회는 영광스럽게 되지 못하고 도리어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당하신 주님의 뒤를 따르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교회는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십자가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고난 뒤에 감추어진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해처럼 밝고 빛나는 예수님,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 영혼에 깊이 새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변형되셨을 때 누가 함께 했습니까?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3)” 왜 구약의 수많은 인물들 중에 하필이면 모세와 엘리야였을까요? 두 사람 모두 이 땅에서 고난을 많이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노예 근성에 찌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느라 이만저만 마음 고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몸에서 낳은 자녀들 몇 사람을 감당하기도 벅찬데 어떻게 수백만의 백성들을 어떻게 감당했을 지 상상이 가질 않습니다.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이 통치하는 북이스라엘에서 우상숭배와 홀로 힘겹게 싸우느라 모진 고생을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여기서 제발 죽여 주소서!’라는 기도를 했겠습니까?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승천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는 또다른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고난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직접 데려가심으로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이 두 사람의 등장은 앞으로 고난 받고 죽으신 후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예수님에 대한 예고편과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예고편을 보았으니 본편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4)” 베드로는 예수님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여기 이곳 산 위가 좋다고 말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산 아래는 좋지 않다. 별로이다’라는 말입니다. 산 아래는 문제가 산적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산 아래로 가면 목자 잃은 양 같은 무리를 섬겨야 합니다. 그곳에는 도끼눈을 하고 맨날 시비를 걸고 공격해대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기다리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산 위에는 위대하고 훌륭한 분들만 있었습니다. 무례하고 공격적인 사람들에게 시달릴 일도 없고 무거운 현실 문제에 짓눌릴 일도 없었습니다. ‘나는 자연인이다.’ 외치며 여기서 신선 놀음이나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짓자고 제안했지만 속마음은 ‘그 옆에 내 것도 지어야 해요.’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여전히 고난 없는 영광만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으로 잘 먹히지 않자 시청각 교육까지 하셨건만 제자들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끝까지 밀어내고 있는 제자들을 돕기 위해 결국 누가 나서야 했습니까?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5)” 빛난 구름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셨음을 알리는 대표적인 표지입니다. 아무리 해도 제자들이 말을 듣지 않으니 예수님이 아빠 찬스를 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름 속에서 하신 말씀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도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하늘로부터 들린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는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님을 왕이요 메시아로 임명하신다는 뜻이었습니다. 두번째로 하신 말씀은 표현은 같지만 의미가 좀 달랐습니다. 고난과 죽으심을 통과하여 부활에 이르는 길을 가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에 강조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말씀이 따라왔습니다. 

예수님의 어떤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물론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다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 다른 무엇보다 십자가의 도를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특별히 강조하셨고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셔서 순종을 요구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변형되신 예수님을 보고도 별 두려움을 없던 제자들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엎드려 떨었습니다(6).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눈을 들어 보니 구름도 사라졌고 모세와 엘리야도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앞에 계셨습니다. 황홀한 경험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산 아래라는 현실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타이밍이었습니다.

우리 안암1부 러너스의 한 자매님이 한동안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습니다. “사는 게 힘들어요.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어요?” 그러더니 최근에는 이런 말을 부쩍 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이 아주 다 멸망해 버렸으면 좋겠어요.” 저도 이 말에 일정 부분 공감하는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사는 게 힘듭니다. 현실이 녹녹하지 않습니다. 한 문제를 겨우 해결하고 나면 또 다른 문제가 터지기 마련입니다. 내 몸은 하나인데 사방에서 요구 사항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또 내 주변에는 왜 이렇게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이 많은 지 모르겠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디로 사라지고 싶어 집니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고 싶습니다. 회사에 가고 싶지 않고 학교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해서 자기만의 세계 속으로 깊이 빠져들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컴퓨터 게임에 중독이 됩니다. 현실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지만 적어도 게임 속에서는 왕도 될 수 있고 전사도 될 수 있고 마법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 중독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현실로부터 도피해서 신비한 종교적 체험을 추구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산 위 이곳이 너무 좋으니 나를 여기 영원히 머무르게 하소서.’라고 구하는 베드로의 모습이 바로 그 사례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니다. 산 아래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문제 많은 현실, 산적한 과제들로 둘러 쌓인 그곳으로 가자고 하십니다. 그곳에 가서 고난을 감당하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 가자고 우리 손을 잡아 이끄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들어야 할 음성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하나님께서 친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공부도 힘들고 일도 힘들고 사람과의 관계도 참 힘이 듭니다. 코로나 위기도 극복해야 하고 경제도 살려야 합니다. 전도도 쉽지 않고, 동역자 한 사람, 양 한 사람을 품고 섬기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뒷걸음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도를 붙들고 앞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전진하다 보면 어느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으로 하나하나 극복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마침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우리 안에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 맺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복잡다단하고 팍팍한 현실 속에서 고난을 통과한 영광, 약함 속에서 강함, 십자가를 너머 부활의 세계를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반응형

'설교 > 마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서하라  (0) 2020.09.13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0) 2020.09.06
주는 그리스도  (0) 2020.08.16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0) 2020.08.09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0) 2020.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