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이창무 2020. 9. 6.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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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26 강 / 이창무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말씀 / 마태복음 18:1-14
요절 / 마태복음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리쌍의 노래로 잘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조영남의 노래인 ‘겸손은 힘들어’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돌아가신 울아버지 울할머니 겸손하라 겸손하라 하셨지만 지금까지 안 되는 건 딱 한 가지 그건 겸손이라네 겸손 겸손은 힘들어 겸손 겸손은 힘들어 겸손 겸손은 힘들어 겸손은 힘들어” 돌아기신 울아버지 울할머니 뿐만 아니라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도 우리에게 겸손하라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오늘도 ‘겸손은 힘들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힘들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왜 겸손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며 다시 겸손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여기서 천국이란 죽으면 가는 하늘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한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 질문을 이렇게 달리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우리들 중 누가 짱인가요? 교회 밥 순인가요? 아니면 나이 순인가요?” 

제자들이 하필이면 왜 이 시점에 이 질문을 했을까요? 최근에 제자들이 겪은 두 가지 사건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변형되신 모습을 보여주시려고 높은 산에 올라가실 때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제자만 데리고 가신 사건이었습니다. 산 아래 남은 아홉 제자들은 ‘우리는 B급 제자라는 말인가’ 하면서 자괴감에 빠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바로 앞에서 예수님이 많은 제자들 중 오직 베드로의 성전세를 대신 내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요한과 야고보까지 ‘역시 우리는 No. 1이 아니었구나’ 하면서 마음이 상해버렸습니다. 자꾸만 예수님 앞에 나타나는 베드로가 꼴 보기 싫었습니다. 

제자들은 앞으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고 왕위에 오르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날이 오면 자기들도 장관직을 한 자리 씩 맡아 출세하리라 기대했습니다. 더 굳어지기 전에 이 서열을 뒤집으려면 예수님의 평가 기준을 알아야 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조만간 제자 시험을 치를 것인데 여기서 일 등을 하는 자가 큰 자니라’ 말씀하셨나요? 아니면 ‘지금까지 너희들의 업적과 활동을 360도 다면 평가하여 전 영역 S 등급 사람이 큰 자니라’ 라고 하셨나요?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3)” 

예수님은 답을 주시기 전에 먼저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제자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여기서 어린 아이는 원어로 ‘파이디온’으로 유아기를 지나 7세가 되기 전 아이를 가리킵니다. 요즘에는 하나 또는 많아야 둘을 낳기 때문에 어린 아이는 집 안에서 왕자나 공주처럼 대우를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달랐습니다. 사람 숫자를 셀 때 아예 어린 아이는 제외했습니다. 어디를 가나 존재감이 없었습니다. 무시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이미 천국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큰가를 따지기 이전에 가장 작은 자인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입장조차 못하게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린 아이와 같이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어떤 점에서 어른인 우리에게 어린 아이가 모델이 될 수 있을까요? 사실 ‘어린 아이 같음’은 ‘철이 없다. 보챈다. 떼를 쓴다. 속기 쉽다.’는 등의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성경은 우리에게 어린 아이와 같은 유치함을 버리고 성장과 성숙을 향해 나아가라고 지속적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에게 이런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에게서 제자들 모두가 닮고 배워야 할 위대한 한 가지를 발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4)” 예수님이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 하신 것은 곧 자기를 낮추라는 뜻이었습니다. 천국에서는 이렇게 겸손한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어린 아이의 특징은 겸손함입니다. 어린 아이는 자신이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고 연약하고 무능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사에 부모님을 의지하고 부모님께 매달립니다. 어린 아이는 자신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무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질문을 많이 합니다. ‘이게 뭐에요? 왜요?’를 입에 달고 살아서 아빠는 답해주다가 지쳐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막상 아빠가 답을 해주면 또 어린 아이는 그 말을 단순하게 신뢰합니다. 정말로 크리스마스에 산타 할아버지가 굴뚝을 타고 내려와 양말에 선물을 넣고 가는 줄 압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그 일 자체가 즐거워서 하지 내 서열과 등급을 올리기 위해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어른이 되면서 이런 겸손함을 잃어버립니다. 누구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힘으로 이루려고 합니다. 자신의 무지함을 부끄러워하고 몰라도 아는 척하고 아는 것은 어떻게 하든 티를 내려고 합니다. 단순하게 신뢰하게 보다는 복잡하게 계산하는 일에 익숙해집니다. 어른들은 어디를 가나 내가 여기서 서열이 어떻게 되는지에 민감합니다. 남을 제치고 내가 높은 자리에 올라서길 원합니다. 나보다 잘 나가는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무시합니다. 결국 서로를 미워하고 다투게 됩니다. 윌리엄 워즈워스의 ‘무지개’라는 시에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이 나옵니다. 정말 우리 어른들은 교만을 버리고 어린 아이에게서 겸손함을 배워야 합니다.

이 땅에 있는 교회는 천국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천국의 전초 기지로서 장차 이루어질 천국을 미리 경험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 명제에 동의하십니까? 저는 처음 우리 교회에 왔을 때 무척 놀랐습니다. 모두 다 학교 선배임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저에게 존댓말을 하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제가 하는 말을 중간에 끊지 않고 끝까지 귀를 기울여 다 들어주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별로 재밌는 말도 아닌데 숨이 넘어가듯이 웃어주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안의 공기 자체가 바깥 세상과 다른 것 같았습니다. 어렴풋하게 천국이 있다면 이런 곳인가 싶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영혼을 향한 목자의 끊임없는 사랑과 섬김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지만 믿음의 동역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섬겨주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친 동생들보다 더 가족 같이 느껴질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천국만 경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믿음의 동역자끼리 시기하고 질투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미워하고 말 한 마디 섞기를 싫어하고 서로 원수 삼는 일도 보았습니다. 살벌하게 싸우는 일도 보았고 결국에는 갈라서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이 지경까지 이르면 승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쓰디쓴 고통을 맛보는 패자가 됩니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더 심각한 것은 이런 모습으로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는 점입니다. 사랑이 없고 메마른 곳에 어느 누가 오려고 하겠습니까? 갈등과 분열이 있는 곳에 천국이 임할 수 없습니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 왜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일어납니까? 이유는 단순합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라는 예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로 자기를 높이려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높아져야 즐겁고 행복해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낮추면 무시를 당하고 비참해질 것만 같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하여 그토록 경기를 일으켰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가리켜 ‘상향성(upward mobility)’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우리 삶의 방식 전체는 성공으로 향하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맨 꼭대기에 이르는 것을 중심으로 짜여 있습니다. 상승하는 흐름을 타고 있다는 것과 그때 얻는 보상으로부터 활력을 얻습니다. 이때 인생은 우리가 승리하거나 패배하게 되는 일련의 투쟁으로 여겨집니다. 

이와 대비하여 나우웬은 그리스도의 길을 ‘하향성(downward mobility)’으로 정의했습니다. 본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어른이 어린 아이와 같이 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상향성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일생이었습니다. 이 십자가의 길이 곧 하향성입니다. 

나우웬은 우리에게 제자의 소명이란 하향성으로 부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도 본성으로는 이 길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겸손이 정말 힘든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하향성으로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연약한 가운데 강하게 하시고, 고난 가운데 기쁨을, 가난한 가운데 부유하게 해 주시며, 상향성의 사회 한 가운데 살면서 기꺼이 낮아지는 길을 가게 해 주십니다. 성령님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열매로 맺게 됩니다. 또한 그때 교회 공동체는 천국의 짠 맛이 나는 소금이 되고 복음의 빛을 발하게 됩니다. 여기에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낮춤으로 도리어 위대해 지는 하향성의 신비가 있습니다. 자기를 비우고 낮아지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 우리도 낮은 곳을 향해 가는 겸손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자기를 낮추는 겸손이 외적으로는 어떻게 나타나게 될까요?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5)” 겸손은 어린 아이 같은 작은 자 한 사람을 영접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여기서 여린 아이 같은 작은 자 한 사람이란 약자를 가리킵니다. 사회적으로는 가난한 사람, 고아와 과부와 같이 형편이 어려운 사람, 학벌이 없고 사회적인 지위가 낮은 사람 등을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역사에서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 존재감이 없는 사람, 연약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기 쉽습니다. 자기를 높여 스스로 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들을 무시하곤 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이런 작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시 받는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을 마음으로 뜨겁게 영접합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무엇인가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잘 난 사람이나 못 난 사람이나 남자나 여자나 성공한 사람이나 실패한 사람이나 다 똑 같이 형제요 자매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 병든 사람, 귀신 들린 사람 모두를 똑같이 영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자 한 사람을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작은 자라고 해서 업신여기고 무시하다가 그를 실족하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6)” 어릴 적 할아버지 시골 집 옆에 연자 맷돌이 있었습니다. 힘센 황소나 끌 수 있는 그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진다고 하니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실족하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것이 더 낫다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실족하게 하는 사람에게 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화가 얼마나 큰 지 예수님은 영원한 지옥불에 비유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께서 무시무시하고 살벌하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이렇게 강하게 경고하지 않으면 우리는 실족하게 하는 일을 가볍게 여기고 지나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실족하게 해 놓고서 실족하게 한 사실조차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연약한 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일을 너무 많이 겪다 보니 우리가 실족하게 하는 일에 무감각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족하게 하는 일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실족하게 하는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은 손과 발을 찍어버리고 눈을 빼어버릴 정도로 각오를 단단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너무 아프지 않을까요? 그런데 왜 내가 아픈 것만 생각합니까? 내가 실족하게 만든 그 사람은 지금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10b)” 작은 자 뒤에는 엄청난 빽이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자를 돌보며 지키는 천사가 있습니다. 누군가 작은 자 한 사람을 업신여기면 천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즉시 그를 고발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작은 자 한 사람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시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잃은 양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백 마리 중에 겨우 한 마리인데 그냥 내버려두자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길 잃은 양을 찾을 것입니다. 만약 찾으면 너무 기뻐서 목자는 덩실덩실 춤을 출 것입니다. 목자에게 양 한 마리의 가치는 백 마리와 같고 양 백 마리의 가치는 한 마리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이 목자의 마음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에서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14)”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는 우리 안에 있는 안전한 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길을 잃고 산과 들에서 헤매는 양이 늘 있기 마련입니다. 한 양을 찾는데 드는 수고를 새로운 양을 얻는데 기울이면 두 세 마리 양을 얻는다는 식의 계산이 앞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마리의 양이라도 잃어버리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큰 자이든 작은 자이든 하나님께 소중하지 않은 영혼은 없습니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낼 수 있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우리 안암 1부에 한 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입니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부서진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회복시키는 일에 우리를 쓰시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그 마음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말씀에서 단 한 가지 우리가 환대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작은 자 한 사람을 환대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환대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거리 두기가 필수가 되었고 모든 것이 비대면이 되었습니다. 환대하고 싶어도 온 몸으로 환대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으로, 기도로, 줌으로, 카카오톡으로, 전화로라도 환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 주위에 잃어버린 사람이 없는지 돌아보는 가운데 환대의 공동체, 섬김의 공동체를 함께 이루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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