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창무 2020. 9. 27.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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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29 강 / 이창무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말씀 / 마태복음 20:1-16
요절 / 마태복음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어느 날 어린 딸이 엄마에게 이렇게 쓰여진 종이를 내밀었다고 합니다. “이번 주 내 방 청소한 값 2000원, 가게에 엄마 심부름 다녀온 값 1000원, 엄마가 시장 간 사이 동생 봐 준 값 3000원, 쓰레기 내다 버린 값 1000원, 아빠 구두 닦은 값 4000원, 전부 합쳐서 13000원” 딸 아이의 얼굴은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엄마는 뒷면에 이렇게 적어서 돌려주었습니다. “너를 내 뱃속에서 열 달 동안 데리고 다닌 값 무료, 네가 아플 때 밤새워 너를 간호하고 기도한 값 무료, 장난감, 음식, 옷 사주고 코까지 풀어준 값 무료, 널 키우며 힘들 때마다 눈물 흘린 값 무료” 딸 아이는 그 글을 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더니 큰 글씨로 이렇게 썼습니다. “전부 다 지불되었음” 혹시 우리도 이 딸 아이처럼 하나님께 청구서를 내민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내민 청구서에 어떤 답변을 적어 주실까요?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의 원리를 가르쳐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집 주인은 포도원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주인은 이른 아침인 오전 6시부터 나가 일할 곳을 찾던 사람들에게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포도원에서 일하게 했습니다. 또 오전 9시에도 장터에 가서 사람들을 포도원에 보내 일하도록 하면서 상당한 보상을 약속했습니다. 일꾼들은 이 말을 품삯을 깎지 않고 일한 시간만큼 쳐주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주인은 낮 12시, 오후 3시에 또 나가서 같은 방식으로 일꾼들을 불렀습니다. 이쯤 되면 주인의 의도가 도대체 무엇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이 시간까지 일할 곳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재능이 있고 팔팔한 사람은 진작에 다 스카우트가 되었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능력이 없거나 체력이 뒷받침해 주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주인은 이런 사람들을 왜 자기 포도원으로 데려가려 했을까요? 더욱 더 이상한 점은 주인이 오후 5시에도 나갔다는 사실입니다.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이제 한 시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작업복 입고 연장 챙기고 나가면 뒷정리할 시간입니다. 실질적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이 시간까지도 일을 찾지 못하고 온 하루를 허비한 사람들을 불러 포도원에서 일할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주인도 대단하지만 이 시간까지 장터에 남아 기다린 사람들도 대단합니다. 그들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자기들에게 일할 기회가 있을 리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남아 있었던 이유는 차마 빈 손으로 집을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자기만 바라보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놀고 싶지 않지만 놀 수밖에 없을 때, 그 비참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오후 5시에 일자리를 얻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1/12 데나리온 수당이라도 받아 5개 묶음 라면과 계란 한 판을 사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습니다. 그저 주인의 손을 꼭 붙잡고 ‘감사합니다’를 연발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품꾼은 복음의 일꾼을, 포도원은 하나님께서 복음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사명의 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부터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엘리야 등등 여러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비롯한 열 두 제자와 사도 바울을 친히 천국 복음의 일꾼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만약 이들을 하나님께서 일꾼으로 부르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노아는 대홍수와 함께 떠내려가 물고기 밥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 판매나 하다가 자식 하나 없이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나 잡다가 물거품처럼 허무하게 인생을 마칠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다가 심판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생명을 살리고 구원하는 천국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사탄에 매여 종 노릇하던 인생들을 해방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역사에 그들을 사용하셨습니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능력이 부족하거나 자격이 없어도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기드온은 타작 마당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던 겁쟁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도 부르셔서 삼백 용사와 함께 미디안을 물리치는 위대한 사사로 사용하셨습니다. 돌라라는 사사의 이름은 벌레라는 뜻입니다. 자타공인 벌레 같이 별 볼일 없는 사람도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사로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구원하고 부르신 것 역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요, 주권입니다. 우리가 자격이 있거나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를 불러 주지 않으셨다면 죄의 종 노릇 하다가 인생을 헛된 일에 낭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찾으셨고 부르셨고 지금까지 복음 역사에 품꾼으로 일하며 열매 맺는 삶을 살게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항상 기억하고 감사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포도원 품꾼의 비유의 2막을 살펴 볼 차례입니다. 해가 저물자 주인은 청지기에게 나중 온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고 명했습니다(8). 오후 5시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품꾼들이 제일 먼저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받고 나서 깜짝 놀랐습니다. 혹시 계산이 잘 된 것 아닌가 물었지만 청지기는 이것이 주인의 뜻이라고만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큰 호의에 감격했습니다. 이제 저녁에 라면 파티가 아니라 삽겹살 파티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먼저 온 품꾼들은 이 모습을 보고 자기들은 더 받으리라 기대했습니다. 아침 6시에 온 사람은 12 데나리온을 받고 한우 파티를 할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그들은 모두 주인에게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아침 6시이 온 사람들이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나중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12)” 어떻습니까? 이들의 말이 무척 공감이 되지 않습니까?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라도 똑같이 말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인은 원망하는 일꾼들을 부드럽게 타이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13-15)” 주인은 약속했던 대로 지급했기에 먼저 온 품꾼에게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주인은 자기의 것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용했을 뿐입니다. 주인은 줄 것보다 덜 준 것이 아니라 더 준 것이기 때문에 선합니다. 그 주인의 선함을 먼저 온 품꾼들이 악하게 본 것이 문제였습니다.

먼저 온 품꾼의 원망과 주인의 대답 사이에는 보상이냐 은혜냐 하는 주제가 교차하고 있습니다. 품꾼은 자신의 품삯을 보상으로 여겼기 때문에 공정함이라는 기준이 제시했습니다. 즉 한 시간만 일한 사람과 종일 12시간을 수고하고 더위를 견딘 사람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공정함이 세상 사람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조국 사태, 인천공항공사 정규직 전환 논란, 추미애 장관 아들 휴가 논란 등등이 모두 다 공정이라는 가치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이슈들입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모든 품꾼에게 똑같이 각각 한 데나리온을 지급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주인은 품꾼들에게 한 데니리온을 보상으로 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상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바로 은혜요 선물로 준 것입니다. 당시 하루 일해서 하루 먹고 사는 품꾼들의 품삯인 한 데나리온은 한 가족이 한 날을 먹고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금액이었습니다. 주인은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그들이 얼마나 일했는가에 대한 계산이 아니라 그들의 하루의 필요라는 기준에 그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 중의 하나인 은혜의 원리입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에도 보상의 원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보상의 원리는 은혜의 원리라는 기초 위에 서 있습니다. 아무리 공정함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 잣대로 은혜를 재단할 수는 없습니다.

마이클 야코넬리라는 작가가 한 다음의 말은 이 비유를 설명하기에 적절한 말입니다. “은혜보다 교회 안의 사람들을 더 화나게 하는 일도 없다.” 비유 속에서 품꾼들을 화나게 한 것 역시 은혜였습니다. 세상에서는 오직 공정함이라는 기준만이 통용되기 때문에 은혜 때문에 화낼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은혜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유일한 사회입니다. 공정함을 기준으로 삼은 사람은 은혜를 보면 화가 납니다. 요나서 4장에 보면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기로 하신 하나님의 결정에 대해 화를 냈습니다. “주님, 암만 봐도 주님이 이렇게 하실 것 같아서 제가 다시스로 도망쳤던 것입니다. 주님의 너그러우심과 은혜 때문에 화딱지가 나서 못 살겠습니다. 차라리 절 그냥 여기서 죽여주세요.” 우리가 이 비유에서 품꾼들의 원망에 공감이 간다면 우리 역시 은혜에 대해 화를 내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은혜는 즐겁고 기뻐하지만, 남에게 주어지는 은혜에 분노하곤 합니다. “은혜는 나에게, 공정함은 너에게” 이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공정함이라는 잣대마저 나와 타인에게 공정하게 적용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 먼저 온 품꾼들이 자신들을 가리켜서 했던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들은 종일 수고했고 더위를 견뎠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남들보다 더 나은 대우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것을 요구할 권리가 나에게는 충분하고도 넘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크게 착각하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이 한 수고보다 훨씬 큰 것을 은혜로 받아 누렸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포도원에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큰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인이 그들을 지목하여 불러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들은 하루 종일 장터에서 빈둥거리며 놀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인으로부터 부여 받았습니다. 그 덕분에 마음 졸이며 초조하게 불러줄 사람을 기다리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알차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너그럽고 자비로운 주인의 포도원에 탐스럽게 익은 포도 열매를 수확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여기에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에 충분한 한 데나리온의 품삯까지 받았는데 더 이상 무엇을 요구할 수 있습니까? 포도원에 아침에 들어온 것도 은혜이고 들와서 오래 일한 것도 은혜이고 오후 5시에 막차를 타고 들어온 것도 은혜이고 그래도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도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눈을 뜨게 합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행하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16)”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은 것도 다 주권자이시며 은혜 베풀길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입니다. 우리의 원망 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부당하게 대우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그 사람이 받아야 몫 이상을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롭고 자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이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세 가지 의미를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채무자가 아니십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 35절에서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고 했습니다. 아무도 하나님께 먼저 드리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보상하도록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빚을 먼저 꿔드리고 빚 갚으라고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먼저 온 품꾼의 원망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반드시 보상해야 할 채무자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은혜가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격과 권리를 주장하면서 하나님께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지금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은혜입니다. 내가 이렇게 섬겼으니, 내가 이렇게 고생했으니 최소한 이만큼 보상을 해 주시겠지 하는 생각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주님께 드릴 고백은 이것뿐입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

둘째로 보상이 섬김의 동기가 될 때 공동체의 연합을 깨트립니다. 섬김의 동기가 보상 때문이라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될까요? 모든 사람들이 다 공정함의 잣대를 서로에게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많이 섬겼는데 왜 나에게 합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느냐’ 하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불평을 쏟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면 누군가는 ‘크게 기여한 일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 무리한 요구를 하느냐’ 말하며 비판할 것입니다. 그 사이에 또 어떤 사람은 ‘정작 가장 수고한 사람인 나는 조용히 있는데 왜 너희들이 목소리를 높이느냐’ 하면서 부글부글 끓어오를 것입니다. 또 어떤 형제에게 은혜가 주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기분이 상합니다. “왜 저 형제에게만 특혜를 주나요? 이건 불공정하다구요.” 그런데 우리 가운데 사도 바울만큼 수고한 사람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바울이 이렇게 고백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작은 일을 해 놓고도 나의 공로를 내세우려 하는 우리의 입을 닫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오직 은혜만이 있음을, 그리고 그 은혜를 아는 사람만이 교회의 하나됨을 지켜갈 수 있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다 이룬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눅17:10)”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재물의 신, 쾌락의 신과 같은 헛된 우상을 섬기지 않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 하신 은혜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와 같이 무익한 종을 불러 주를 섬기게 하신 은혜에 무한 감사합니다. 제가 무언가 한 일이 있다면 그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이 땅의 삶을 마치고 하나님께 마지막으로 드리는 고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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