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섬기러 오신 예수님

이창무 2020. 10. 4.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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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30 강 / 이창무

섬기러 오신 예수님

말씀 / 마태복음 20:17-28
요절 /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모두가 인정할 만큼 정결하고 경건하게 일생을 살아온 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마귀의 부하들이 그를 돈으로 유혹하고 여자로 유혹하고 별의별 방법을 다 써봤지만, 수도사는 끄떡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한 부하가 내가 반드시 넘어지게 하겠다며 자신 있게 나섰습니다. 그가 수도사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이자 정말로 수도사는 즉시 수도를 그만두고 뛰쳐나가 버렸습니다. 다른 졸개들이 도대체 뭐라고 말했느냐고 물었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별말 안 했지. 다만 ‘수도사님! 수도사님의 동생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답니다.’라고 말했을 뿐이야.” 였습니다. 이 우화는 사람이 경쟁심과 시기를 극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우리에게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해법을 들려주실까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였습니다. 이때 제자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 일에 살아나리라(18,19)” 예수님께서는 16장 21절과 17장 22,23절에 이어 세 번째로 자신이 받으실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 번마다 제자들은 반응은 달랐습니다. 첫 번째 반응은 거부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항변했습니다. 두 번째 반응은 근심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현실이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세번째 제자들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무반응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침묵은 말없이 순종하며 따르겠다는 뜻이었을까요? 전혀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그 악플보다 더 무섭다는 무플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이 말씀을 영접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때 제자들의 마음은 도대체 어디에 가 있었을까요?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20)” 세베대의 아들은 요한과 야고보를 가리킵니다. 이 두 제자의 어머니인 살로메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자매 사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물질로 예수님을 섬긴 여인 중 하나였습니다. 이런 분이 절하며 청탁한다면 예수님도 거절하기가 쉽지 않겠지요? 두 제자가 이렇게 엄마 찬스까지 써가며 간절히 얻고자 했던 것이 무엇일까요?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21)” 그들은 자신들을 곧 있으면 이루어질 메시아 왕국에서 각각 No 1, No 2의 자리에 앉게 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청탁이란 본래 뒤에서 몰래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모든 제자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습니까? 두 제자가 자신들의 뜻이 곧 예수님의 뜻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근거가 있었습니다. 앞서 예수님은 19장 28절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그들은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왕위에 오르실 때 제자들에게도 한 자리를 주시겠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곧이어 30절에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요한과 야고보는 이 말씀을 자신들이 베드로를 밀어내고 수제자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음을 예수님이 넌지시 암시하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치맛바람을 일으켜 뒤집기 한판승을 시도해 보려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드러난 제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선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자들 귀에 필터가 있었습니다. 부담스러운 말씀은 차단하고 입맛에 맞는 말씀만 쏙쏙 받아들였습니다. 이 모습이 제자들만의 모습일까요? 사실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너희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런 말씀을 들으면 우리도 처음에 거부 반응을 보입니다. 또 들어도 영접이 안 되어 엎치락뒤치락 씨름하곤 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예 그 말씀을 걸러내 버리기도 합니다. 이 상태가 되면 아예 말씀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보내고 맙니다. 반면 부담이 없는 말씀, 위로가 되는 말씀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렇게 말씀을 편식하면 어떻게 됩니까? 어린아이들이 지나치게 편식을 하면 건강을 해치고 제대로 성장할 수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필터에 넣어 걸러낸다면 영적으로 성장할 수도 없고 성숙에 이를 수도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 해도 늘 미성숙한 상태에 머무르게 됩니다. 모든 일을 자기중심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계속 주위 사람들과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없습니다. 계속 섬김만 받게 됩니다.

성숙해지기를 원하십니까? 열매 맺는 풍성한 인생을 살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내 귀에 있는 필터부터 제거해야 합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말씀만 들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부담스러운 말씀, 듣기 싫은 말씀, 거북한 말씀도 듣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2-14)”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 중에 부드러운 것뿐 아니라 단단한 음식도 먹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진보를 이루고 성숙함에 이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두 제자의 청탁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오해하고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22a)”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울 나라를 옛날 다윗 왕국의 영광과 위엄을 재현한 세속적인 왕국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을 단지 다른 제자들보다 우월한 자리에 앉는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 자리를 더 많은 권력을 누리고 섬김 받고 영광 받는 자리로만 생각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2b)” 잔에는 여러 종류의 잔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마실 잔을 축배의 잔, 승리의 잔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마시려는 잔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고난의 잔, 죽음의 잔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사람 역시 예수님과 함께 이 잔을 나누어 마셔야 했습니다. 이 잔을 마실 수 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두 제자는 할 수 있나이다 대답했습니다. 이 자신감은 무지에서 나온 자신감이었습니다.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23a)” 놀랍게도 예수님은 두 제자의 대답을 긍정하셨습니다. 이 당시에는 야고보와 요한은 몰랐겠지만, 예수님이 긍정하신 대로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열 두 사도 중 가장 먼저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가장 오래 살면서 가장 많이 고난을 짊어지고 산 사도가 되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천국의 자리는 사람의 뜻대로 주어지는 자리로 오해하고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23b)” 예수님의 좌우편에 누가 앉을 것인가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얻게 될 영광스러운 지위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선택하신 자들을 위해 마련된 것입니다.

두 제자만 오해하고 착각하고 있었을까요?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24)” 나머지 열 제자는 “그래 잘 되었다. 너무 힘들고 끝없이 섬겨야 할 자리인데 너희 둘이 수고를 감당해 주겠다 하니 정말 고맙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너희 둘만 모든 권력을 독점하겠다고?” 하면서 화를 냈습니다. 순수한 청년 나다나엘도 사심이 일도 없어 보였던 안드레도 불을 뿜었습니다.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았을 뿐 권력을 향한 욕망은 모두 다 같았습니다. 이런 제자들이 모인 공동체는 곧 폭발할 것처럼 위태해 보였습니다.

교회에서 누가 어떤 직분을 맡게 되는가를 두고 갈등을 겪는 일은 아주 흔한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교회를 서열에 기초해서 권력을 행사하는 곳으로 오해하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권한을 행사하는 있는 자리를 향한 목마름이 생깁니다. 서로 경쟁 관계로 보고 시기하고 질부하고 다투고 분열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문제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처럼 대놓고 지위와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이들에게 분통을 터트린 열 제자 사이의 갈등과 분열은 21세기에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곳에서 내 존재감이 얼마나 되는지 관심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명단에서 내 이름이 몇 번째 나오는가를 세어 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목자라서 다행입니다. 직분이 여럿 있었으면 그중에 뭐가 높은가를 놓고 문제가 생겼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셨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하셨지만 우리는 내가 얻을 타이틀에 더 목을 맬 때가 많습니다. 주님을 따른다 하면서도 머릿속은 야망으로 가득 차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 신앙 생활을 하는 동안 이 문제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십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리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25-27)” 세상에서 권력을 쥔 사람은 자기 멋대로 권력을 휘두릅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큰 권력을 가졌는지 사람들에게 과시하기를 즐깁니다. 내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굽실거리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얼마나 신이 나는 일입니까? 부려 먹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내 존재 의미가 막 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를 쓰고 으뜸이 되고자 합니다. 더 높은 지위에 올라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분명히 못을 박으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리니” 세상 나라의 원리가 하나님 나라에서도 같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과 달라서 권력 서열에 기초한 나라가 아니라 섬김의 원리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인 교회 역시 권력과 서열로 움직이고 작동되는 조직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섬기는 자는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종은 고대 사회의 노예를 가리킵니다. 전적으로 주인의 지시를 받고 통제를 받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앉아서 먹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웨이터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주인이 되기를 바라지 종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속된 말로 짬밥이 쌓일수록 부리는 종들이 많아지고 서열이 높을수록 섬김 받는 것에 익숙해집니다. 그러나 교회는 정반대입니다. 큰 직분을 맡았다면 그만큼 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연륜이 오래되면 될수록 주인이 되지 말고 더욱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큰 자이고 으뜸인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섬김은 성숙함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가정을 보십시오. 어린 자녀를 성숙한 어른인 부모가 종이 되어 섬깁니다. 섬기는 부모가 큰 자이고 섬김 받는 아이가 작은 자 아닙니까?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도저히 남을 섬길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 하나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으며 사려 깊고 지혜로운 사람이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나이와 관계없이 섬기는 사람이 어른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억지가 아닌 기쁨과 감사로 섬기려 하고 종이 되어 섬기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이렇게 섬기는 자와 종들이 즐비한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서로가 더 섬기려고 경쟁하고 더 섬기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교회는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곳입니까?

사람은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을 닮아간다고 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사람이 되고 섬김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모델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섬김의 본이 되시는 분이 우리 마음 중심에 계시고 그분을 지속해서 바라볼 때 우리도 섬기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 모델이 누구일까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8)” 섬김의 모델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집권자들처럼 주관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 고관들처럼 권세를 부리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심에도 자신을 낮추고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섬김의 절정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우리의 대속물로 내어 주신 일, 곧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만약 여전히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자기 중심적인 야망으로 똘똘 뭉쳐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과 대속의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왜 그 쓰디쓴 고난의 잔을 기꺼이 마시고자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구속해 주신 은혜, 구속해 주신 그 사랑을 더 깊이, 더 온전히 알게 해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 은혜와 그 사랑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섬기는 자로서, 종으로 살아가는 기쁨과 감격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내가 마땅히 섬겨야 할 그분이 도리어 나를 섬기기 위해 자기의 목숨까지 내어 놓으신 그 은혜를 알수록 우리가 자기 중심성을 이기고 섬길 힘을 얻게 됩니다. 교회는 그런 곳입니다. 대속해 주신 은혜를 알고 은혜에 기초해서 서로를 섬기는 곳입니다. 교회 안에서 세상 나라의 원리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마구 뒤죽박죽 섞어 놓으면 안 됩니다. 요한과 야고보가 저질렀던 무지와 착각을 우리가 또 반복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가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 영적으로 무지하고 무감각한 저를 깨우쳐 주셔서 대속해 주신 주님의 은혜를 더 알게 하옵소서. 섬기는 종으로 오신 주를 따라 저도 그렇게 섬기며 사는 복된 인생 살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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